실업자 인권운동 펼치는 ‘세 남자의 도원결의’
세 남자. 공통점은 찾아보기 어렵다. 일단 주덕한씨(35). 전국백수연대 (cafe.daum.net/backsuhall) 대표인 주씨는 백수 생활 8년차인 ‘프로 백수’이다. <캔 맥주를 마시며 생각해낸 인생을 즐기는 방법 170가지>처럼 백수를 위한 책도 여러 권 냈다. 일본·유럽의 백수들과 국제적으로 두루 친하다. 다음은 최내현씨(34). <딴지일보> 편집장을 거쳐 현재는 <미디어몹>(www.mediamob. co.kr) 편집장으로 있다. 누구는 ‘골 때리는 패러디 뉴스’라고 부르고, 누구는 ‘인터넷상의 <9시 뉴스>’라고 부르는 <헤딩라인 뉴스>의 산실이 바로 미디어몹이다. 마지막으로 이재현씨(31).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시민단체에 뛰어든 경력 5년차 시민운동가이다. 인천 경실련과 환경재단 간사를 거친 그는 현재 포털 사이트 다음에 ‘전국의 젊은 시민운동가 모임-NGO love’라는 카페를 운영하고 있다(카페 회원들은 ‘NGOlove’를 ‘응골러브’라고 부른다).
이 세 남자가 뭉쳤다. 이름하여 ‘백수인권대회’를 치르기 위해서이다. 애초에 뭉친 동기는 조금씩 달랐다. 주덕한씨는 백수의 설움을 몸소 체험한 사람이다. 특히 올 초 있었던 홍사덕 전 국회의원의 이른바 백수 폄하 발언이 백수들의 인권 의식을 일깨우는 직접 계기가 되었다고 주씨는 말한다. “요즘 촛불시위에 나오는 젊은이들이 다 단단한 직장을 갖고 있다고 믿지 않는다”라던 말에 분노한 백수들은 노도처럼 거리로 몰려나왔다.
그러나 거리에서 백수들은 다시 한번 상처를 받았다. 시위대 중 일부가 명함을 모으고 있었던 것. 취지인즉 ‘시위대도 번듯한 직장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겠지만 이는 백수를 ‘두번 죽이는’ 일이나 다름없었다. 주씨는 이런 의문이 절로 들었다고 말한다. “우리도 대한민국 국민입니다. 이태백·사오정 같은 백수들은 정치적 표현의 자유조차 누릴 수 없단 말입니까?”
국가와 자본, 개인에게 실업 책임 떠넘겨
그런가 하면 이재현씨는 예비 백수들과 시민단체를 잇는 일에 관심을 갖고 있었다. 본래 응골러브는 시민단체 막내급 간사들이 ‘술자리 뒷담화’ 겸 각자 몸 담고 있는 단체에 대한 정보를 나누고자 만든 친목 모임이었다. 그런데 모임이 결성된 지 2년이 지나면서 청년 실업 문제가 이들의 주요 관심사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좋은 사람을 구하지 못해 애를 먹는 시민단체와 좋은 직장을 구하지 못해 애타 하는 백수들을 연결해 주자, 이런 취지로 응골러브는 지난 9월 ‘잡(job)소리 프로젝트’에 돌입했다.
여기에 최내현씨가 가담했다. 최씨는 일찍부터 누리꾼(네티즌)들의 이중성에 관심을 갖고 있었다. 20대가 즐겨 쓰는 블로그 특성상 미디어몹 이용자 중 상당수는 예비실업·준실업·실망실업 상태 백수들일 것으로 추산된다. 그러나 이들은 스스로를 백수라고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 ‘마음만 먹으면 언제라도 이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의식이 이들을 지배하고 있는 탓이다. 최씨가 보기에 이는 허위 의식이다. 구조화한 실업이 만연한 오늘날 개인이 이를 극복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그런데도 국가와 자본은 ‘눈높이만 낮추면 된다’는 식으로 개인에게 모든 책임을 떠넘기려 한다. 개인 또한 이러한 자본의 이데올로기를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인다.
세 남자가 ‘도원결의’를 감행한 것은 이런 비틀린 구조를 바로잡기 위해서였다. 백수인권대회를 조직하면서 세 남자는 백수를 이등 국민으로 취급하는 시선에 반기를 들었다. 백수는 시혜의 대상이 아닌 사회 공동체의 일원이다. 따라서 이들을 위한 최소한의 안전망을 구축하는 것은, 우리 사회가 마땅히 짊어져야 할 책무라고 이들은 주장했다.
그런 의미에서 <꿈의 피라미드>(KBS) 같은 것은 이들이 꼽는 최악의 프로그램이기도 하다. 실시간 구인·구직이 이루어지는 이 프로그램에서 구인자는 왕이다. 왕의 간택을 받기 위해 구직자들은 뛰라면 뛰고 구르라면 구르고 수영복을 입으라면 수영복을 입은 채로 자신의 모든 것을 내던진다. 그래보았자 한 기업체당 채용하는 인원은 2~3명. 텔레비전 황금 시간대에 자신들의 브랜드를 노출함으로써 이들 기업체가 거두어들이는 홍보 효과에 비한다면 이들 신규 인력 인건비는 그야말로 새 발의 피 수준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도 생색은 기업이 다 낸다며 세 남자는 분통을 터뜨린다.
‘요즘 젊은 것들은…’이라며 혀를 차는 기성 세대 또한 이들에게는 절망의 대상이다. 열심히 일하면 언젠가는 잘살 수 있다는 기대를 품고 살아가던 세대와 열심히 일해도 언제 백수가 될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품고 살아가는 세대 간에는 분명 넘을 수 없는 간극이 존재한다. 꿈이 사라진 세대의 절망을 이해하지 못한 채 무조건 눈높이를 낮추라고 강요하는 기성 세대에 주덕한씨는 이렇게 반문한다. “대졸자가 눈을 낮추면 고졸자는, 여성은, 외국인 노동자는 눈을 땅에 묻으란 말입니까?”
‘일천만 백수가 인간답게 살 수 있는 대한민국 건설’을 인권대회 화두로 내건 이들 세 남자는 무엇보다 백수에 대한 일반의 의식을 개혁하는 운동과 더불어 정부의 실업 대책에 대해 종합적으로 문제 제기를 할 방침이다. “대통령·국무총리 산하, 노동부 산하 각종 실업대책위원회가 최대 당사자인 실업자들의 목소리를 직접 듣는 경우를 본 적이 없다”라는 이재현씨는, 버스 한번 안 타본 사람들이 버스 노선 개편하겠다고 나서는 거나, 백수 생활에 대한 간접 경험 한번 안해 본 사람들이 실업 대책 세우는 거나 오십보 백보라고 꼬집었다.
그러다 보니 말이 좋아 ‘일자리 창출’이지, 정부가 실제로는 학원 배불리는 정책만 펴고 있다고 최재현씨는 지적한다. 이를테면 세상에 널린 것이 웹디자이너인데도 여전히 정부 실업 대책은 학원에서 웹디자이너 자격증을 습득할 때 교육비를 지원하는 식으로 짜여 있다는 것이다. 이보다는 백수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줄 방향으로 실업 대책이 다시 세워져야 한다고 세 남자는 주장한다.
“문화·교통 시설 할인 혜택 달라”
가장 대표적인 것이 기초적인 사회 안전망 제공이다. 직장 잃고 몇 달간 건강보험금이 밀리다 보면 병원 가는 것을 아예 포기해 버리는 백수들을 위해 건강보험 내지 국민연금 납입을 한시적으로 유예해 주는 정책이 선행되어야 한다고 이들은 주장한다. 백수들이 컴퓨터 등을 마음 편히 이용하며 구직 활동을 할 수 있게끔 백수들을 위한 공간 마련도 시급하다.
백수증 도입도 이들의 주요 요구 사항이다. 정규 교육 과정을 밟지 않는 비진학 청소년들에게 ‘청소년증’이 발급되듯 백수들에게도 백수증을 발급해 교통·문화 시설을 이용할 때 할인 혜택을 제공해야 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프랑스에서는 실업자를 위한 무료 교통 카드를 발급하는 주가 크게 늘고 있다고, 최근 한국을 방문한 프랑스 실업자운동가 로베르 크레미유는 전했다.
1990년대 후반 이래 유럽에서는 노동운동과 별개로 실업자운동이 하나의 명확한 흐름을 형성하고 있다. 12월4일 서울 종로에서 열린 ‘백수 100인 인권 대회’를 필두로 본격적인 백수 인권 운동에 돌입한 세 남자는, 그런 의미에서 한국형 청년 실업 운동의 새로운 탄생을 예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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