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자가 미래의 기술이다”
  • 소종섭 기자 (kumkang@sisapress.com)
  • 승인 2004.12.1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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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자원 연구자들 한자리 모여…“세계적 자원 전쟁 대비책 시급”
지난 12월7일 오전 10시, 서울 삼성동 그랜드인터콘티넨탈호텔 로즈홀에서는 ‘국가지정 연구소재은행 발전 방안을 위한 심포지엄’이 열렸다. 횟수로는 4회째이지만 학자는 물론 청와대 비서관, 과학기술부·해양수산부 관계자들까지 관련자 100여명이 한자리에 모인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2003년 2월 결성된 국가지정 연구소재은행협의회(협의회) 회장을 맡고 있는 이연희 서울여대 교수는 “지금 전세계 물밑에서는 치열한 자원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 이대로 가면 우리는 싸울 무기조차 없게 된다. 그런 절박함이 우리를 한자리에 모이게 했다”라고 말했다.

이 날 모인 교수 40여명은 모두 전·현직 ‘은행장’이다. 국내에는 1995년 과학기술부 지원으로 한국세포주은행 등 5개가 생긴 이래 현재 감자육종소재은행·배추유전자은행·한국해양미세조류은행·광물은행 등 모두 26개 자원 은행이 운영되고 있다(오른쪽 표 참조). 자원으로 관리할 필요가 있는 연구 소재를 국가 차원에서 확보·보급하는 기관들이다. 과학기술부는 한 은행에 한 해 평균 8천9백만원(전체 예산 22억5천만원)을 지원한다. 5년마다 평가해 재지정하기 때문에 중도에 탈락하는 은행도 있다.

‘은행장’들은 세계적으로 자원 무기화 현상이 갈수록 심각해지고 있기 때문에 시급히 대비책을 세워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자원은 단순히 자원에 그치지 않고 의학·생명공학 등 다른 산업과도 긴밀한 관련이 있기 때문에 국가 차원에서 철저한 준비가 절실하다는 것이다.

해외 유출된 토종 자원 수두룩

자원의 해외 유출은 진작부터 문제가 되어 왔다.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이 ‘미스김 라일락’ 사건이다. 1947년 미국인이 북한에서 씨앗을 받아가 육종 개량한 이 품종은 미국 라일락 시장의 30%를 차지할 정도로 인기를 끌고 있다. 국내에도 역수입되었다. 세계 각국에서 크리스마스 트리로 애용되는 구상나무, 2002년 미국 펜실베이니아 원예학회가 우수 품종으로 꼽은 ‘코리안 파이어’로 불리는 동백나무도 비슷한 경우다.
강병화 교수(고려대·환경생태공학부)는 “어지간한 우리의 식물 자원은 이미 모두 유출되었다”라고 단언했다. 국가적인 대비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몇년 전만 해도 우리 스스로 외국인들을 안내해 식물 채취를 도왔을 정도로 ‘자원’에 대한 인식이 부족했던 것이다.

강교수는 ‘산토끼꽃’ 사례를 들려주며 자원을 확보하려는 외국인들의 노력이 얼마나 집요한지를 설명했다. “영국 학자로부터 ‘산토끼꽃’ 종자를 구해달라는 e메일을 여러 차례 받고 응하지 않았더니 얼마 뒤 한 국내 대학의 교수가 어디 가면 산토끼꽃을 구할 수 있느냐고 연락해왔다. 위치를 알려주었더니 정작 찾아온 것은 한 영국인이었다. 그는 산토끼꽃과 관련 있는 살충제 성분을 연구한다며 산토끼꽃을 찾으러 같이 가 줄 수 없느냐고 했다. 물론 나는 거절했다”라는 것이다. 강교수는 우리 나라 연구자들보다 선진국 연구자들이 우리 나라 식물에 더 관심이 많아 두렵기까지 하다고 걱정했다.

식물 자원만 유출되는 것이 아니다. 야생동물 유전자원은행장인 이 항 교수(서울대·수의학과)는 “미국에서 잘 팔리는 고양이 중에 벵갈캣이라는 품종이 있다. 야생 살쾡이를 집고양이와 교배해 만든 것이다. 야생 살쾡이는 한국을 비롯한 동남아 지역에 서식한다. 면밀한 조사가 필요하지만 우리 나라에서 유출되었을 가능성이 있다”라고 말했다.

그 동안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서울대공원의 사례도 있다. 4~5년 전 서울대공원은 일본에 살쾡이를 몇 마리 보낸 적이 있다. 일본이 황새를 줄 테니 살쾡이를 달라고 했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살쾡이는 흔한 동물이었지만 일본에서는 멸종 위기인 아주 귀한 동물이었다. 한 순간의 판단 실수가 귀한 ‘무기’가 될 수 있는 동물 자원을 고스란히 일본에 넘긴 것이다. 이후 일본은 교미에 성공해 이 살쾡이를 수십 마리로 늘린 것으로 알려졌다.

최근 일본이 구하려고 안달하고 있는 것은 일본에서는 멸종된 동물인 수달이다. 서울대 이 항 교수는 “최근 일본 학자로부터 수달을 구해달라는 e메일을 받은 적이 있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수달은 문화재청과 환경부의 허가가 있어야 해외로 나갈 수 있는 1급 유출 금지종이다.
로열티에 치이는 딸기·장미 수출

자원이 ‘무기’가 되는 사례를 잘 보여준 사건이 이른바 2002년 일어났던 ‘딸기 사건’이다. 딸기 재배 기술이 뛰어난 국내 농가가 겨울철 하우스 재배 또는 여름철 고랭지 재배를 통해 차별화한 품질로 일본 시장을 공략하자 일본이 딴죽을 건 사건이다. 일본은 우리가 수출한 딸기가 ‘육보’ ‘장희’ 등 일본 품종이라는 데 주목해 로열티를 내든지 아니면 일본 시장 진출을 포기하라고 압박했다. 이 때문에 해마다 늘어났던 일본으로의 딸기 수출은 2002년 들어 전년의 절반 수준인 7백t에 그쳤다.

외환위기 이후 장미 수출이 50배나 늘어나자 독일과 일본의 육종회사들이 자국 품종이라는 데 주목해 ‘국제 식물 신품종 보호 조약’을 들먹이며 국내 장미 수출 회사들에게 수입하는 장미 한 그루에 1달러씩 로열티를 부과했던 것도 같은 맥락이다. 협의회 이연희 회장은 “상추·토마토·감자도 외국 품종이 우리 시장을 장악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식탁에 자주 오르는 흰색 팽이버섯도 20년 전 일본이 자연산인 갈색 팽이버섯을 돌연변이시켜 만든 신품종이다.

야생버섯균주은행을 운영하는 인천대 이태수 교수는 “국제적으로 종자협약이 준비되고 있어 조만간 종자 전쟁이 벌어질 가능성이 있다”라고 우려했다. 국내에서 재배되는 느타리버섯·표고버섯 등이 어느 나라 품종인지가 불분명하기 때문에 자칫하면 큰 분쟁에 휩싸일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서교수는 이들 버섯에 토종 버섯의 유전자를 집어넣어 새로운 품종을 개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종자 전쟁이 걱정되는 것은 비단 버섯만의 문제가 아니다. 1997년 서울종묘가, 1998년 흥농과 중앙 종묘가 외국 회사에 넘어가 우리의 종자 시장은 이미 외국이 장악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이 낳은 신개념 감자 ‘보라밸리’

국내 전문가들이 자원을 지키기에 급급하는 수세적인 모습으로만 자원 전쟁에 임하는 것은 아니다. 공격이 최선의 방어라며 새로운 품종을 개발하고 외국의 자원들을 수집하기 위해 밤낮을 가리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대표적인 경우가 ‘감자 대통령’이라고 불리는 한국감자육종소재은행장 임학태 교수(강원대)다. 임교수는 “1조원에 달하는 국내 감자 시장은 수미(미국 품종)와 대지(일본 품종)가 95%를 장악하고 있다. 30년 전에 들어왔기 때문에 로열티를 내는 것은 아니지만 신품종으로 바뀔 때가 된 만큼 우리 품종을 개발할 필요가 있다”라고 강조했다. 임교수에 따르면, 감자는 일본이 30개, 미국이 50개 품종을 가지고 있는 반면 우리는 14개뿐이다.
유전공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은 임교수는 전공과 무관한 감자 연구에 뛰어들어 ‘보라밸리’라는 비장의 무기를 세계 감자 시장에 내놓았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겉에서 안까지 온통 보라색인 이 감자는 이미 국내외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다. 지난 가을 강원도 내 초등학교를 대상으로 1주일 동안 교육용으로 분양하겠다며 신청을 받았는데 1백50개 학교에서 신청서가 쇄도했다. 다른 시·도에서도 보라밸리를 구할 수 있느냐는 문의가 빗발쳐 임교수는 곤욕을 치렀다.

보라밸리는 캐나다 종자회사인 PDI 사에 수출하는 쾌거도 이루었다. 지난 3월 씨감자 1개당 2백원씩, 모두 1만 달러어치를 수출했다. 규모는 작지만 우리도 ‘종자 수출국’이 된 것이다. PDI 사는 중국에 보라밸리를 보급할 계획으로 현재 지린성과 산둥성에서 시험 재배를 하고 있다. 일본에서도 껍질을 벗겨 가공한 보라밸리를 수입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임교수는 감자에 색깔을 입히고 ‘장 정화용 감자’ ‘천연 항생제용 감자’ 등으로 품종을 특성화했다. 임교수의 사례는 자원 전쟁을 어떻게 헤쳐 가야 하는지를 잘 보여준다.

공격적으로 자원 전쟁에 임하는 경우는 야생작물유전자은행을 운영하는 영남대 서학수 교수에게서도 찾아볼 수 있다. 서교수는 세계에서 가장 많은 3천5백점의 야생 벼를 갖고 있다. 서교수가 갖고 있는 야생 벼는 전부 외국 품종이다. 국내에는 야생 벼가 없다. 서교수는 “자원을 확보하는 차원에서 야생 벼를 수집하고 있다. 재해와 염분·가뭄에 강한 야생 벼의 특성을 우리 벼에 이식해 우리 벼의 경쟁력을 높이는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라고 밝혔다.

표본을 수집하기 위해 은행장들은 현장을 뛰기에 바쁘다. 지난 12월11일 인천대 이태수 교수는 대학원생 3명을 데리고 강화도 마리산에 올랐다. 겨울 버섯을 채집하기 위해서다. 그는 1년에 100일은 채집을 하기 위해 국내외를 오간다고 했다. 고려대 강병화 교수는 “식물의 종자를 확보하려면 종자가 익어 떨어지는 시기를 잘 맞춰야 한다. 이 때문에 같은 장소를 네댓 차례 방문하는 경우도 허다하다”라고 말했다. 강교수도 1년 평균 1백40일 동안 표본을 채집하러 현장에 나가 있다.
그러나 아직까지 개인이 수집하는 식이어서 제대로 체계화되어 있지 않다. 서울대 이 항 교수는 “도로에서 사고로 죽는 야생 동물들은 모두 어디로 가는지 알 길이 없다”라고 말했다. 외국에서는 이를 주제로 한 연구 논문도 많은데, 우리는 수집조차 제대로 안 되고 있다는 것이다. 연구자들은 때로 위험을 무릅쓰고 외국에서 몰래 자원을 가져오기도 한다. 영남대 서학수 교수는 “고려시대 문익점 선생이 어떤 어려움을 겪었을지 짐작될 때도 있다”라고 말한다.

외국은 연구비 수십억~수백억 원 투입

국가지정 소재은행은 먼 장래를 내다보고 운영하는 측면도 있지만 당장 비용을 절감하는 효과도 크다. 동결폐조직은행장인 고려대 김한겸 교수는 “외국으로부터 조직 0.2g을 사려면 100 달러를 줘야 한다”라고 말했다. 서울대 구자록 교수가 운영하는 한국세포주은행에서는 국내 연구자에게 5만원을 받고 세포주를 판다. 그러나 연구자가 같은 세포주를 외국에서 사려면 50만원을 주어야 한다. 값도 값이려니와 해당 국가 윤리위원회의 심사를 거쳐야 하기 때문에 보통 6개월에서 1년이 소요된다. 연구자들 처지에서 국내 자원은행의 존재는 큰 도움이 된다.

국가지정 소재은행들은 최소한 올해 50억원에 이르는 수입 대체 효과를 거둔 것으로 평가되는데, 갈수록 그 규모가 커질 것으로 보인다. 과거에는 한국이 갖고 있는 표본과 다른 나라가 갖고 있는 표본을 교환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갈수록 ‘우리가 줄 것이 없기 때문에’ 돈을 주고 사와야 하는 상황이 늘고 있다.

그러나 미국이나 중국이 보통 한 자원은행에 수십억~수백억 원을 쏟아붓고 있는 것에 견주면 국내 연구자들의 현실은 너무 열악하다. 협의회 이연희 회장은 “자원은행을 국가 차원에서 전폭적으로 지원할 필요가 있다”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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