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방송 기부승낙서 변조됐다
  • 소종섭 기자 (kumkang@sisapress.com)
  • 승인 2005.02.2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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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저널>, 5·16장학회 설립 과정 의혹 밝혀줄 자료 단독 입수
<시사저널>은 정수장학회 전신인 부일장학회 설립자 김지태씨(작고)가 1962년 5·16장학회에 낸 기부승낙서를 누군가가 변조한 것을 처음으로 확인했다. 이 같은 사실은 <시사저널>이 5·16장학회가 1962년 서울시교육청에 낸 설립 신청 서류에 첨부되어 있는 김씨 등 16명의 기부승낙서를 단독 입수함으로써 밝혀졌다.

이에 따라 김지태씨 유족이 ‘박정희 정권에게 미운 털이 박혀 부일장학회를 강탈당했다’고 한 주장이 더욱 힘을 얻게 되었다. <시사저널은 지난해부터 ‘정수장학회 사건’의 실체를 다양한 각도에서 추적해 왔다.(<시사저널> 제771·772·774 호 참조)

기부 날짜, 왜 6월30일로 바뀌었나

기부승낙서 변조는 그 동안 증언으로만 존재했던 이러한 강탈 의혹을 뒷받침하는 강력한 물증이 될 것으로 예상된다. 이에 따라 지난 2월3일 정수장학회 사건을 우선 조사 대상으로 선정한 ‘국가정보원 과거 사건 진실 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과거사위·위원장 오충일)의 조사 활동도 더욱 탄력을 받을 것으로 보인다.

 
기부승낙서는 가로 19cm, 세로 25.5cm 크기 용지에 ‘기부승낙서’라는 제목을 달았고, ‘갖고 있는 (부산일보·한국문화방송·부산문화방송) 주식 000주를 5·16장학회에 무상 기부할 것을 승낙하고 훗날 주식에 하자가 있을 때는 본인이 일체 책임을 부담하겠다’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기부자들이 기부하는 주식 수·주소·성명을 쓰고 도장을 찍는 형식이다. 기부승낙서를 쓴 사람은 당시 김지태씨가 경영했던 부산일보·한국문화방송·부산문화방송의 간부 16명인데, 한 사람이 2~3개 회사 주식을 갖고 있는 경우도 있어 존재하는 문서는 모두 25장이다.

김지태씨가 이들 주식을 5·16장학회에 ‘기부’한 것은 1962년 6월20일이다. 정수장학회가 1994년 9월 펴낸 <정수장학회 30년지> 87쪽 제2절 ‘재단의 출범’ 항목에는 ‘1962년 6월20일, 부산일보·한국문화방송·부산문화방송 주식 3천4백87만6천원어치를 기증받았다’는 내용이 있는 등 정수장학회 자체 서류에도 6월20일로 명기되어 있다.

자명 김지태 전기간행위원회가 펴낸 자명 김지태 평전 <문항라 저고리는 비에 젖지 않았다> 423쪽에도 ‘1962년 6월20일 부산일보 주식 100%를 포기하고 그 해 7월 부산일보 사장에서 물러났다’고 되어 있어 6월20일에는 양측이 이견이 없다.

 
그런데 기부승낙서에는 기부 날짜가 하나같이 1962년 6월30일로 변조되어 있다. 날짜는 한자로 쓰여 있는데 누가 보아도 한눈에 알 수 있을 정도로 ‘二’자 위에 ‘一’자를 덧붙여 ‘三’자로 만들었다. 아주 손쉽게 20일을 30일로 만든 것이다. 그렇다면 누가, 왜, 언제 날짜를 변조했을까. 40여년이 흐른 지금 누가, 언제 변조했는지를 밝히는 데는 한계가 있다. 관련자들 가운데도 세상을 떠난 사람이 많다. 그러나 왜? 라는 물음에는 일정한 답이 가능하다. 1962년 3월27일 중앙정보부 부산지부는 김지태씨가 운영하던 회사 간부 10명을 부정축재·재산해외도피 혐의로 구속했다. 당시 김씨는 기계 수입 문제를 협의하고 신병을 치료하기 위해 일본에 머무르고 있었다. 같은 날 김씨의 부인 송혜영씨마저 관세법과 외환관리법 위반 혐의로 구속되었다. 해외 여행에서 돌아오면서 다이아몬드 한 개와 카메라 한 대를 사가지고 왔는데 이를 밀수로 몰아 구속한 것이다. 일본 도쿄 적십자중앙병원에 입원해 있던 김씨는 4월10일 귀국하자마자 중앙정보부 부산지부에 체포되어 5월24일 부정축재처리법과 농지법을 위반한 혐의로 고등군법회의 결심 공판에서 징역 7년형을 구형받았다.

이에 앞서 부인 송씨는 “다이아몬드 반지와 카메라를 휴대하고 귀국한 것은 밀수가 아니다”라는 부산세관 담당자의 증언으로 석방되었다. 김씨는 구형 다음날인 1962년 5월25일 부산일보·한국문화방송·부산문화방송의 경영권을 포기한다는 각서를 쓰고 한 달 뒤인 6월20일 기부승낙서에 도장을 찍은 후, 6월22일 군 검찰이 공소를 취하해 풀려났다.

이처럼 6월20일과 6월30일은 김씨가 감옥에 있을 때와 풀려났을 때라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김씨는 “당국자들은 내가 강경하게 나가자 번갈아가며 나를 압박했다. 그들이 작성해 온 각종 양도서를 내밀고 강제로 날인하게 했다”라고 감옥 생활을 회고한 적이 있다. 따라서 날짜를 변조한 것은 김씨가 감옥에 있을 때 기부승낙서를 쓴 것이 훗날 법적으로 문제가 될 수 있다고 판단한 누군가에 의해 저질러진 것으로 보인다. 정상적인 기부가 아니었음을 뒷받침할 수 있는 증거다.

일부 관계자 “기부승낙서 쓴 일도 없다”

 
유족에게 확인한 결과 기부승낙서에 쓰여 있는 주소·성명·주식 수의 필체 또한 김씨 것이 아니었다. 1971년 5·16장학회 김현철 이사장에게 보낸 서신에 있는 김씨의 자필 서명과 비교해 보아도 확실히 달랐다. 김씨는 자기가 갖고 있던 부산일보·한국문화방송·부산문화방송 주식을 기부한다는 기부승낙서를 3장 썼는데 각각의 필체가 모두 다르다.

또 부산일보·부산문화방송 주식에 대한 기부승낙서에는 도장이 2개씩 찍혀 있는데 이 또한 다르다. 한국문화방송 주식에 대한 기부승낙서에는 개인 도장이 아니라 대표이사 도장이 찍혀 있다. 같은 날 작성된 문서라고 볼 수 없을 정도로 다른 점이 너무 많다. 이는 김지태씨가 기부승낙서를 작성할 당시 상황이 매우 비정상적이었다는 것을 짐작케 한다.

일부 관계자들은 기부승낙서를 작성한 적이 없다고 주장한다. 당시 한국문화방송 사장 직무대리를 맡았던 김종한씨는 “기부승낙서를 쓴 적도, 도장을 찍은 적도 없다”라고 강조했다. 현재 85세로 부산에 살고 있는 김씨는 “죽기 전에 진실이 밝혀지도록 노력하겠다”라고 말했다.

만약 기부승낙서가 법적으로 문제가 있고 유족이 원인무효 소송을 낸다면 상황이 복잡해진다. 원인무효 소송에는 시효가 없기 때문에 법률적인 판단 여부에 따라 소유권 자체가 바뀔 수 있기 때문이다. 아직까지 유족은 소송에 대해서는 말을 아끼고 있다.

박근혜 이사장은 지난 2월1일 정수장학회측에 이사장 직을 사임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정수장학회는 2월 말 이사회를 소집해 이 문제를 논의할 계획이지만 2월19일 현재까지 이사회 날짜를 잡지 않았다. 정수장학회 이사는 박대표를 포함해 5명이다.

“박근혜 이사장 퇴진만이 능사 아니다”

박대표의 사임이 정수장학회 문제의 끝이 될지, 또 다른 시작이 될지는 박대표가 어떤 결단을 하느냐에 달렸다. 이미 사안 자체가 박대표 혼자 물러나는 것으로 해결되기에는 사회적인 관심도가 높아졌기 때문이다. 열린우리당의 한 핵심 당직자는 “박대표가 자신만 이사장 직을 사임하면 이 문제가 끝날 것으로 본다면 오산이다. 현 이사진과 명칭을 그대로 둔다면 이는 눈 가리고 아웅하는 것과 같다. 이렇게 되면 정수장학회 문제는 계속 살아 있는 문제가 되어 박대표를 괴롭힐 것이다”라고 말했다.

정수장학회가 100% 지분을 갖고 있는 부산일보 노동조합도 지난 2월4일 성명을 내고 “박대표는 앞으로 장학회 운영에 영향력을 행사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라고 못을 박았다. 과거사에 흠결이 없고 사회적 신망이 높은 인사들로 이사진을 재구성해야 하고, 정수장학회라는 이름도 고쳐야 한다는 것이다. 부산일보 김승일 노조위원장은 이런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을 경우 지속적으로 투쟁하겠다고 말했다.

고 김지태씨 유족은 박대표의 퇴진 이후 새로 구성하는 이사회에 자신들의 참여가 보장되어야 한다는 입장이다. 정수장학회측에서 1~2명, 유족측에서 1~2명, 사회적으로 신뢰를 얻는 인사 1~2명으로 이사회를 구성하자는 것이다. 물론 이름도 바꾸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유족은 장학회 명칭에 고 김지태씨의 아호인 ‘자명’이라는 이름이 들어가기를 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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