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너져 내리는 ‘문명의 고향’
  • 박성준 기자 (snype00@sisapress.com)
  • 승인 2003.05.2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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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후유증·개발 몸살로 유적지 사라질 위기
'두강 사이의 땅’이라는 뜻을 지닌 이라크는 글자 그대로 티그리스 강과 유프라테스 강 사이에 자리잡고 있다. 이 지역은 미국 시카고 대학의 근동 지역 고고학자 맥과이어 깁슨 교수가 말했던 것처럼 ‘사실상 전역이 고고학 유적지’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풍부한 유물과 유적을 자랑한다. 이 지역은 인류 최초 문명의 요람이자 7천년 이상 문명의 교통로 구실을 해왔기 때문이다.

유네스코가 ‘이라크판 세계 문화 유산 임시 목록’을 작성해 발표한 때는 2000년이었다. 원래 유네스코의 세계 문화 유산 목록에 정식으로 등재된 유적지는, 이라크 북부의 고대 성채 도시로서 로마 제국의 침략에도 끄덕 없이 견뎌낸 것으로 유명한 하트라 한곳뿐이었다(1985년 지정). 유네스코는 그 뒤 이라크 유적지 여러 곳을 문화 유산으로 지정하려고 했지만 1991년 페르시아 만 전쟁 이래 계속된 특수한 정치 상황과 준비 부족 등 사정이 여의치 않아 하트라 이외의 유적지를 문화 유산으로 지정받는 데는 성공하지 못했다.
이라크가 ‘임시로나마’ 문화 유산 지적을 수락한 때는 2000년. 하지만 이때 이미 상당수 유적지는 전란의 후유증이나 개발의 몸살을 앓고 있었다. 이번 전쟁은 이처럼 위기에 몰린 유적지에 또 한번 결정타를 가했다. 임시 목록에 오른 이라크 유적지는 모두 일곱 곳. 그 중 아슈르는 바빌론·아테네·로마·테베 등 인류 역사에 빛나는 도시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고대 도시 유적지이다. 아시리아 제국의 최초 수도가 아슈르이며, 초기 수메르 왕조(기원전 2800년께)도 이곳을 배경으로 번성했다. 아시리아 시대의 피라미드 사원으로 유명한 지구라트도 아슈르에 있다.

바그다드 북쪽 400km 지점에 자리잡은 니네베는 19세기 제국주의 시대 고고학 유물 발굴로 이름 난 곳이다. 기원 전 7세기께 아시리아 수도 구실을 한 니네베는 성서에도 자주 나타나는 곳으로 쐐기 문자가 새겨진 점토판이 다수 출토되어 널리 알려져 있다.

이와 비슷하게 이라크 남부 나시리아 근처에 자리잡은 우르도 구약 성서의 인물 아브라함이 태어난 곳으로 잘 알려져 있다. 우르는 1920∼1930년대에 본격적인 고고학 발굴이 이루어졌는데, <길가메시> 서사시의 내용이 담긴 점토판도 이곳에서 출토되었다.

이밖에 ‘임시 목록’에 오른 유적지로는 알 우카이디르·님루드·모술·사마라 등이 있다. 이들 유적지의 한결같은 공통점은, 1991년 페르시아 만 전쟁과 그 후 10년간 지속된 경제 제재로 소리 없이 무너져내려 왔으며, 그대로 방치할 경우 ‘잿더미’가 될 공산이 높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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