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중국 ‘북 핵 빅딜’ 있었다
  • 남문희 기자 (bulgot@sisapress.com)
  • 승인 2003.05.1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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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징 3자 회담 앞서 물밑 협상…중국, ‘일본 핵무장 저지’ 등 약속 받고 중재자로 나서
베이징 3자 회담에서 중국은 과연 어떤 역할을 했을까. 북한이 주장하는 대로 단순히 장소만 제공하는 데 그쳤는가, 아니면 뭔가 드러나지 않은 부분이 있는 것인가. 3자 회담과 관련한 얘기들이 단편적이나마 흘러나오고 있지만 여전히 이 부분은 안개에 가려 있다. 장소 제공국에 불과하다는 북한의 주장과 달리 뭔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며 미국측이 거듭 사의를 표했던 것을 보면 중국이 어떤 역할을 한 것은 분명해 보인다. 따지고 보면 북한측 태도도 이상하기는 마찬가지였다. 회담 일정과 거의 비슷한 시점에 조명록 북한 국방위원회 제1 부위원장이 중국을 방문해 중국 수뇌부와 공공연하게 만나고 돌아간 사실도 뭔가 심상치 않은 대목이었던 것이다. 단순한 장소 제공국에 대한 예의로는 과공(過恭)이었다.

도대체 중국은 어떤 위치에서 어떤 역할을 수행한 것일까. 베이징 회담 직후 미국 당국자들의 발언 내용에서 한 가닥 실마리를 찾아 볼 수 있다. 즉 미국측 관계자들은 중국이 회담 자리에서 1992년 남북한이 채결한 ‘한반도 비핵화 협정’을 공개 거론하며 북한의 핵개발을 반대했다는 점에 감격하는 듯한 태도를 보였다. 예를 들어 지난 4월26일자 연합통신은 “중국이 한반도 비핵화 협정을 언급한 사실이 중국의 우려를 입증한 것이며, 중국이 3자 회담에서 자신의 역할을 십분 수행했음을 뜻하는 것이다”라는 ‘미국측 관계자’의 발언을 소개하기도 했다.

이 관계자가 언급한 ‘중국의 역할’이란 무엇일까. 워싱턴의 한 외교 소식통은 이와 관련해 바로 그 부분에 이번 회담의 비밀스런 내막이 들어 있다고 지적했다. 이번 회담에 앞서 미국과 중국 간에 ‘빅딜’이 오갔다는 것이다. 이 외교 소식통이 “미국이 이번 회담에서 가장 주력한 것은 바로 북한의 핵 포기와 한반도 비핵화 달성을 중국이 앞장서서 이끌어낼 수 있는가를 탐색하는 것이었다”라고 말할 정도였다.

그렇다면 빅딜의 내용은 무엇인가. 북한이 핵을 개발하는 데 대한 미국의 전략은 시종일관 중국을 활용하는 데에 초점이 맞추어져 왔다. 중국이 앞장서 북한에 핵 포기를 유도하면 좋고, 실패할 경우에는 중국을 앞세워 북한에 대한 경제 제재를 단행해 북한 체제 붕괴를 유도한다는 것이 골격이다. 그 배경에는 이라크와 달리 북한에 대한 군사 공격은 불가능하다는 인식이 깔려 있다. 미국 내 온건파뿐 아니라 강경파도 이 점에 대해서는 동의하고 있다. 결국 미국은 외교 협상이든 붕괴 전략이든 중국의 뒷다리를 꽉 붙잡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미국은 당근과 채찍이라는 두 가지 수단을 통해 중국을 설득해 왔다고 한다. 우선 미국은 중국이 만약 미국의 협조 요청을 거부할 경우 북한의 핵무장을 용인할 수밖에 없다고 압력을 가했다고 한다. 그뿐 아니라 한반도와 동아시아 주둔 미국 군사력을 재편하고 재무장을 추진하겠다는 압박도 가했다. 바로 채찍의 측면이다. 지난 4월30일자 일본 <산케이 신분>이 ‘미국은 중국에 타이완 핵 카드까지 내밀며 북한을 설득해 달라고 부탁했다’고 보도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반대로 중국이 북한을 설득해 한반도 비핵화를 달성할 경우 미국은 역으로 동북아에서 일본의 재무장을 막고 중국의 역할과 리더십을 인정하겠다는 당근책을 제시하기도 했다. 즉 앞으로 동북아 구도를 미·중 협력 구도로 이끌어 가겠다는 메시지인 셈이다.

미국의 제안은 중국에도 솔깃한 것이었다. 중국도 북한의 핵무장은 반대한다. 더군다나 중국은 일본의 재무장과 역할 증대를 깊이 우려해 왔다. 고심을 거듭하던 중국측은 결국 미국이 김정일 정권에 대한 붕괴 전략을 더 추진하지 않는다는 것을 전제로 미국의 요구를 받아들였다고 한다. 이번 협상 과정에서 중국이 ‘한반도 비핵화’에 대한 강력한 메시지를 발표하고 미국이 이 부분을 거듭해서 치하한 것은 바로 서로의 밀약이 일단 성공적으로 작동했다는 확인 과정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 미·중 간의 밀약이 3자 회담 진행 과정과도 깊이 관련되어 있다고 한다. 예를 들어 미국은 북한이 1차 회담에서 발표한 요구안에 대해 자신들이 안을 내기보다는 중국이 중재안을 내는 형식을 취할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북한이 그동안 요구해온 불가침 조약에 대해 미국은 미국·중국·러시아 등이 문서로 불가침을 보장하는 방안을 내심 검토해 왔다. 이 안을 바로 중국측이 중재안이라는 형식으로 제시함으로써 북한에 대한 압박 수위를 높인다는 전략이다. 결국 중국을 활용하는 이이제이 전략으로 북한 핵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것이 미국의 전략인 셈이다.

북한은 두 가지 전략을 병행해 이에 대응했던 것 같다. 우선 조명록 부위원장의 중국 수뇌부 방문이다. 중국이 한반도 비핵화라는 명분을 내세우며 실제로는 미국의 요구대로 끌려가는 것을 견제하기 위한 포석이다.

한편으로는 미국의 대북 정책 중심이 군사적 선제 공격에서 북한 체제 붕괴 유도 쪽으로 이동하고 있다는 점을 간파하고 요구의 수위를 높인 것이다. 즉 지난번 협상에서 북한은 기존 불가침 조약보다 한 단계 높은 체제 보장 문제를 전면에 내세웠다. 이는 곧 북한에 대해 붕괴 전략을 추진하지 않겠다는 것을 미국이 명시적으로 밝혀야 한다는 것이다. <시사저널>은 워싱턴의 복수 소식통들로부터 북한이 체제 보장 방법으로 현재의 정전협정 체제를 평화협정 체제로 전환하자고 요구했다는 정보를 입수한 바 있다.

그런데 어찌된 셈인지 한국 정부나 미국 정부가 아직까지 이 문제에 대해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어 궁금증을 자아내고 있다. 다만 윤영관 외교통상부장관이 얼마 전 외신 기자들과의 회견에서 발언한 내용이 이와 관련해서 해석의 여지를 남겨두고 있다. 즉 윤장관은 일부 언론이 북한이 3단계 협상안을 제안했다고 보도한 데 대해 ‘실제로는 3단계가 아니라 4단계였다’고 언급한 것이다. 참고로 북한이 제시했다는 3단계 해법안은 미국이 중유 공급을 재개하면 북한은 핵 포기를 약속하고(1단계) △미국이 불가침 조약을 체결하면 그 직후 북한은 핵 사찰을 수용하고(2단계) △ 북·미 간에 관계 정상화가 이루어지면 핵 시설 완전 해체에 착수한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 워싱턴의 한반도 전문가는 2단계 불가침 조약 체결 다음 단계가 바로 평화협정 체결 단계라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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