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시 재선 걸림돌 ‘윌슨 게이트’
  • 워싱턴·변창섭 편집위원 ()
  • 승인 2003.10.07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백악관 참모, CIA 요원 신분 누설 의혹…“이라크 전쟁 비판에 대한 보복” 논란
미국 백악관 고위 관리가 중앙정보국(CIA) 소속 비밀 공작원의 신분을 의도적으로 언론에 흘린 사건을 놓고 이전투구가 벌어지고 있다. 야당인 민주당은 부시 대통령이 임명한 존 애시크로프트 법무장관이 이번 수사를 지휘하기에는 한계가 있다며 특별검사를 도입하자고 총공세를 펴고 있고, 수세에 몰린 백악관과 여당인 공화당은 불가론을 외치며 반발하고 있다. <워싱턴 포스트>와 ABC 방송의 지난 10월3일 여론조사 결과도 미국민 10명 중 7명이 특별검사제 도입을 찬성한 것으로 나타나 부시 행정부를 긴장시키고 있다.

여론의 압박을 이기지 못해 전면 수사를 결정한 법무부는 지난 9월30일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백악관 모든 직원에 대해 e메일과 전화 기록 등 관련 자료를 보전하라고 명령하고, 수사 대상을 중앙정보국 국방부 국무부와 유관 부서 관리들에까지 확대하는 것도 검토 중이다. 정치 분석가들은 수사 결과가 어떻게 나오든 측근이 연루된 이번 사건으로 부시 대통령의 재선 가도에 빨간 불이 켜진 것으로 보고 있다.

이번 사건의 발단은 3개월 전인 지난 7월6일 <뉴욕 타임스> 여론 난에 실린 한 전직 대사의 기고문에서 비롯했다. 기고자는 직업 외교관 출신인 조지프 윌슨 전 대사(53)이다. 윌슨은 <내가 아프리카에서 발견하지 못한 것>이라는 기고문에서, 부시 행정부가 이라크 전쟁 개시 전에 명분으로 내건 핵 의혹에 이의를 제기했다. 그는 이 기고문에서 2002년 2월 중앙정보국 부탁을 받고 아프리카의 니제르를 몰래 방문해 이라크가 1990년대 후반 이 나라로부터 우라늄을 구입하려 했다는 정보가 사실인지 밝히고자 했지만, 전·현직 관리들과 핵발전 업계 종사자 등 수십 명을 접촉한 결과 문제의 정보가 의심스런 것이라고 결론지었다고 밝혔다.

윌슨이 정작 이 기고문에서 여론을 환기하고 싶었던 점은, 부시 행정부가 이라크 전쟁을 정당화하기 위해 자신의 정보 보고를 묵살했다는 것이었다. 그는 기고문에서 ‘만일 내 정보가 이라크에 대한 어떤 선입견에 맞지 않았기 때문에 무시됐다면, 우리가 거짓 구실로 이라크 전쟁을 벌였다는 주장이 제기되는 것은 당연하다’고 지적했다.

공교롭게도 사태는 엉뚱한 데서 터졌다. 저명한 보수 논객이자 부시 행정부 출범 이후 ‘우군’ 노릇을 해온 로버트 노박(72)이 윌슨을 반격한답시고 중앙정보국 비밀 공작원이던 그의 부인 이름을 공개한 것이다. <워싱턴 포스트>를 비롯해 미국 전역의 3백여 신문에 칼럼을 실을 정도로 영향력 있는 보수 논객이던 노박은 지난 7월14일자에 실린 <니제르 임무>라는 칼럼에서 ‘윌슨의 부인은 중앙정보국에서 대량살상무기와 관련한 정보 획득 업무에 종사하는 비밀 공작원으로서 이름은 발레리 플레임이다. 이같은 사실을 고위 관리 2명으로부터 들었다’고 밝혔다. 노박은 이 사실을 공개함으로써 ‘공작원의 남편’인 윌슨의 신뢰도를 깎아내리려 했지만, 부시 행정부 처지에서 보면 오히려 역효과를 부른 꼴이 되었다.

사건 초기에 미미했던 언론의 관심은 9월26일 NBC TV가 중앙정보국이 법무부에 누설자 색출을 위한 수사를 요청했다고 특종 보도한 직후 증폭했다. <워싱턴 포스트>도 9월28일 행정부 고위 관리의 말을 인용해 ‘노박의 칼럼이 실리기 앞서 최고위 백악관 관리 2명이 최소한 6명의 기자에게 전화를 걸어 윌슨 부인의 정체와 직함을 알려주었다’고 대서 특필했다.

비밀 누설자의 신원이 ‘행정부 고위 관리’라는 막연한 표현에서 ‘백악관 최고위 관리’로 좁혀지면서 민주당이 특검제 도입을 요구할 만큼 큰 정치 스캔들로 비화한 것이다.

그렇다면 비밀 누설자는 도대체 누구이며 어떤 의도로 그런 정보를 일부 ‘선택된’ 기자들에게만 흘렸을까. 이와 관련해 처음으로 흥미로운 단서를 제공한 사람은 윌슨 전 대사이다. 그는 지난 8월 민주당 의원이 주최한 토론회에서 “이 문제를 그냥 넘기지 않겠다. 결국 칼 로브가 수갑을 찬 채 백악관에서 끌려나올 수 있느냐 여부가 나의 지대한 관심사이다”라면서 부시 대통령의 대선 일등 공신이자 최측근인 칼 로브 백악관 선임 자문관(52)을 비밀 누설자로 지목했다. 로브는 정치 문외한이던 부시를 텍사스 주지사는 물론이고 지금의 대통령 자리에까지 오르게 한 주역으로 백악관 안팎에서 흔히 정치 공작의 귀재로 알려져 있다. 윌슨의 이런 주장에 대해 백악관의 스콧 매클러랜 대변인은 즉각 부인했다. 로브도 ABC 방송 기자의 질문에 ‘노!’라는 한마디를 내뱉고는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다.

윌슨이 칼 로브를 지목한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그는 최근 믿을 만한 기자로부터 “로브가 그러는데, 당신 마누라는 사냥감이라고 하더라”는 말을 들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발언이 큰 파문을 일으키자 윌슨은 “나는 비밀 누설의 출처가 백악관이라고 보고 있는데, 칼 로브가 바로 백악관 정치 공작의 화신 아니냐”라며 한 발짝 물러서는 모습을 보였다.

로브와 마찬가지로 부시 대통령의 최측근이어서 의심을 사고 있는 콘돌리자 라이스 안보보좌관은 의혹이 증폭되기 시작한 9월28일 보수 언론인 폭스 뉴스에 출연해 “대통령은 백악관이 그런 일에 관여하리라고 보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비밀 누설 사건과 관련해 확인도 부인도 않는 어정쩡한 태도를 보였다.

언론은 딕 체니 부통령의 고위 측근들에게도 의혹의 눈초리를 보내고 있다. <뉴욕 타임스> 칼럼니스트인 모린 다우드는 “백악관은 비밀 누설자가 누구인지 알고 있다. 부시가 할 일은 그의 두건을 벗기는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이런 가운데 또 다른 관심사는 문제의 백악관 관리가 어떤 의도로 특정 언론에 비밀 정보를 흘렸느냐 하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 윌슨 전 대사는 행정부 관리가 자기에게 접근했다고 말하는 한 기자에게서 ‘문제의 핵심은 윌슨과 그 마누라’라는 말을 들었다고 밝혔다. 누군가 부시의 이라크 정책을 비판해온 자신의 입을 틀어막기 위해 벌인 짓이라는 것이다. 제인 하먼 민주당 의원은 <로스앤젤레스 타임스>와의 회견에서 “내 직감으로는 이번 사건이 우연이 아닌 보복 차원에서 일어난 것이다”라고 말했다.

현재 부시 행정부는 이번 사건이 자칫 특별검사까지 동원되는 ‘윌슨 게이트’로 비화하는 것을 막기 위해 2단계 방안을 극비리에 마련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 중 하나는 공화당으로 하여금 민주당 인사인 윌슨을 ‘당파적 이해에 집착해 파문을 일으킨 장본인’으로 몰아붙인다는 것이다. 또 다른 방안은 상·하원을 장악하고 있는 공화당 지도부를 결속시켜, 어떤 일이 있어도 민주당이 밀어붙이고 있는 특별검사제 도입을 저지하겠다는 것이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