럼스펠드의 새로운 압박 카드’
  • 남문희 (bulgot@sisapress.com)
  • 승인 2003.11.1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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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 외교는 시나리오형이다. 여러 갈래 시나리오를 상정해 놓고 필요에 따라 운용의 묘를 살려간다. 미국 외교는 <손자병법>에 등장하는 성동격서 같은 부분 전술에 능통한데 ‘언론 플레이’가 그 대표적 수단 가운데 하나이다.

그런데 최근 미국 정부의 언론 전략에 미묘한 변화가 나타나고 있다. 미국의 유수 언론을 한반도 정책과 관련한 창구로 활용해오던 관행을 바꾸어 일본 언론을 새로운 스피커로 내세우고 있는 것이다. 미국 두뇌집단 관계자들은 ‘한국 정부나 언론이 도쿄 또는 워싱턴 발 일본 언론 보도에 민감하게 반응한다는 점을 감안한 것’이라고 분석한다.

최근의 대표적 사례가 바로 ‘북·미 평화협정’에 대한 일본 언론의 거듭된 보도다. 지난 11월5일 <니혼게이자이 신분>은 최근의 제2차 6자회담 개최 분위기와 관련된 민감한 사안을 워싱턴 발로 보도했다. ‘북한이 핵 무기 개발 계획을 완전히 포기하고, 나아가 생물 화학 무기와 미사일 문제 등을 전면적으로 해결하는 것을 전제로 휴전협정을 대체할 새로운 평화체제를 구축하는 방안을 미국이 북한에 제의했다’는 내용이었다.

이 신문은 또한 ‘미국은 지난 4월 북·미 협상과 8월에 열린 6자회담에서 북한이 핵무기를 완전 포기하면 휴전협정을 대체할 항구적인 평화 메커니즘 구축을 위해 다른 국가들과 협상에 들어갈 수 있다고 제안했다’는 사실을 새삼 환기했다.

미국 ‘언론 플레이’ 스피커가 된 일본 신문

이틀 뒤인 11월7일 이번에는 <요미우리 신분>이 ‘워싱턴의 관계 소식통’을 인용해, 조금 더 진전된 내용을 보도했다. ‘미국 정부는 현재 북한에 대한 안전 보장 문서와 관련해, 6자회담이 계속되는 동안 안전을 보장하는 문서와 핵문제가 완전히 해결된 후 항구적으로 안전을 보장하는 문서 등 2단계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즉 1단계 안전 보장 문서에서 북한의 핵 포기와 안전 보장을 느슨하게 연계해 놓은 다음, 북한의 핵 포기 움직임이 구체화할 경우 2단계에서 항구적인 평화 체제를 검토한다는 것이다. 이 신문 역시 지난 8월 6자회담에서 미국의 켈리 차관보가 북한에 대해 ‘미·북 및 북·일 국교 정상화와 휴전협정을 대신할 새로운 평화체제 구축 등을 제안했다’고 상기시켰다.

두 신문의 잇단 보도에 대해 한국 언론은 연합뉴스와 <문화일보> 외에는 거의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따라서 ‘언론 플레이’ 의도가 제대로 관철되었는지는 미지수이다. 한국 국가안전보장회의 관계자는 “일본 신문들은 한반도 문제에 대해 비교적 부담이 없다. 그래서 팩트가 틀린 기사가 많다. 그러나 묘하게도 흐름은 제대로 짚는 경우가 많다”라고 평했다.

두 일본 신문의 보도 내용을 압축하면, 미국이 북한과의 평화협정 체결에 관심을 가지고 있으며, 그러한 의사를 벌써부터 북한측에 전달해 왔다는 것이다. 지난 4월의 베이징 3자회담과 8월의 6자회담을 전후로 <시사저널>이 보도했던 내용들을 일정한 수준에서 확인해 준 것이다.

지난 4월 3자회담 때 <시사저널>은 미국측이 협상대표단에 포함된 국가안전보장회의(NSC) 마이클 그린 아시아 담당 국장을 중심으로 대북 평화협정안을 준비해 왔다고 밝힌 바 있다. 그러나 북한측 대표인 이 근이 돌발적으로 ‘핵무장 발언’을 하는 바람에 당시 베이징을 방문한 조명록 북한 국방위원회 부위원장과의 협상 계획에 차질이 생겼다고 추가 보도했다.

지난 8월 6자회담 때에는 중국측 특사였던 다이빙궈 외교부 부부장을 매개로 미국·중국·북한 3자 사이에 평화협정을 둘러싼 교신이 오고갔다는 점을 보도했다. 미국은 당시 평화협정 체결 방식과 관련해 중국의 중재 역할을 높이 평가해 중국을 포함하는 한편, 당사자로서 한국을 배제할 수 없어 남북한과 미국, 중국 등 4개국이 참여하는 방안을 검토했다는 내용이었다.
8월의 6자회담에서 미국측 대표인 켈리 차관보가 평화체제 구축을 제안했다는 사실은 6자회담 직후 미국측 인사들을 통해 언론에 일부 흘러나왔다. 그리고 더 상세한 배경이 9월5일 <뉴욕 타임스> 인터넷판에 실리기도 했다. 당시 <뉴욕 타임스>는 부시 대통령이 “단계적 대북 제재 완화에서 영구적인 평화협정 체결까지 일련의 대북 지원 조처를 취할 용의가 있다”라고 발언한 것을 해설하는 형식이었다.

<뉴욕 타임스>가 당시 고위 소식통들을 인용해 보도한 기사를 분석해 보면, 부시 대통령이 평화협정안이 포함된 국무부의 새로운 대북협상안을 보고받은 것은 8월 크로퍼드 목장에서였다. 그리고 8월 말 국가 안보 관련 고위 관리들과 회의를 거쳐 이를 승인했다. 그리고 6자회담에 참석할 미국 협상 대표들에게 (평화협정 체결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북한측에 밝혀도 좋다는 뜻을 전했다. 6자회담에서 미국측 대표가 언급한 ‘평화체제 구축’ 의사는 바로 부시 대통령의 뜻에 따라 제안된 것이었다.

<뉴욕 타임스>는 이 기사의 말미에서 ‘미국 관리들은 10월에 재개될 것으로 기대되는 차기 6자회담에서도 이러한 전략을 계속 밀고나갈 것이라는 입장을 밝혔다’고 지적했다. 평화협정 체결 문제가 일과성 정책이 아니라 앞으로도 대북 정책의 주요 골간으로 거듭 제시될 것이라고 예고한 것이다.

따라서 최근 일본 언론들의 평화협정 관련 보도는 일종의 후속편에 해당한다. 워싱턴의 외교 소식통들에 따르면, 미국 행정부가 평화협정에 대한 의사 결정을 내린 시점은 부시 대통령이 10월20일 개막된 에이펙(APEC) 정상회담에 참석하기 바로 직전이라고 한다. 당시 국무부를 중심으로 한 협상파가 부시 대통령에게 일련의 대북 협상안을 보고해 부시 대통령의 승인을 받았다는 것이다.

이 내용을 국무부 협상팀이 중국 특사로 북한을 방문하는 우방궈 전인대 상무위원장을 통해 북측에 전달했다. 즉 북한이 핵 문제를 해결할 경우 미국이 북한과 평화협정을 체결할 의사가 있다고 흘린 것이다. 북측 역시 뉴욕 채널을 통해 평화협정에 대한 미국측의 일련의 제안이 아직도 유효한지 타진했다.

이처럼 평화협정 문제는 최근 미국의 대북 정책 및 북·미간 이면 접촉 과정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그러나 뜨거운 이슈’로 살아 움직여 왔다. 그렇다면 일본 언론들의 보도에 대해 고도의 ‘언론 플레이’라는 해석이 나오고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동안 국내의 보수 세력이나 안보우선론자들은 북·미 평화협정에 대해 우려와 경계심을 가져왔다. 평화협정이 주한미군 철수와 동전의 양면과 같은 관계라고 보는 것이다. 현재 북한과 미국은 법적으로 정전 상태이다. 아직 전쟁이 끝나지 않은 상태이기 때문에 주한미군이 남한에 주둔할 명분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평화협정을 체결하게 될 경우, 북·미간 정전 상태가 평화 상태로 전환되는 것이다. 따라서 미군이 주둔할 명분이 약해지거나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북한과의 평화협정이 거론되고 있는 워싱턴 내부에서 그런 ‘우려’가 이미 현실로 등장하고 있다. 주한미군을 감축할 필요성이 강력하게 대두하고 있다는 것이다. 지난 11월7일자 <중앙일보>의 해외 칼럼 난에는 리처드 부시 브루킹스 연구소 동북아정책센터 소장의 글이 실렸다. ‘다자 안전보장 함정 생각하라’는 제목의 글에서, 그는 앞으로 6자회담에서 김정일 위원장이 북한의 대량살상무기 문제와 주한미군 철수 문제를 맞바꾸기 위한 거래를 시도할 것이라면서 경계감을 표시했다.

그동안 잠잠하던 주한미군 감축론은 에이펙 한·미 정상회담 이틀 전인 지난 10월18일 AP 통신을 통해 또다시 수면 위로 올라왔다. 당시 AP는 부시 행정부가 ‘주한미군 3만7천명의 3분의 1 가량인 1만2천명을 감축하기를 원하고 있으며 한국 정부와 세부 사항에 대한 협상을 진행중’이라고 보도해 눈길을 끌었지만, 하필 노무현 대통령이 부시 대통령을 만나기 이틀 전에 이런 기사가 나오게 된 배경이 더 궁금했다. 하지만 그 의도는 곧 드러났다. 노대통령이 부시 대통령에게 ‘(이런 보도로 인해) 당황스럽다’고 말했으니, 큰 효과를 거둔 셈이다.

그렇다면 이번에는 어떤 효과를 노리고 있는 것일까. 워싱턴의 두뇌집단 및 의회 주변에서는 ‘럼스펠드의 방한 보따리를 주목하라’는 얘기가 나돌고 있다고 한다. 럼스펠드 국방장관이 한·미 연례안보협의회(11월17∼18일) 참석차 서울을 방문할 예정인데, 그가 들고 올 보따리가 최근 일본 언론의 평화협정 관련 보도와 상관 관계가 있다는 것이다. 럼스펠드 장관은 11월15일 방한해 조영길 국방부장관과 이라크 추가 파병 문제를 중점 조율하고 18일 출국에 앞서 노무현 대통령을 예방할 예정이다.
현재 워싱턴 내부에서는 럼스펠드 장관의 방한을 둘러싸고 그가 방한하는 목적과 관련해 몇 가지 관측이 나오고 있다. 우선 이라크에 전투병을 파견하도록 한국 정부에 압력을 가한다는 것이다. 럼스펠드 장관이 한국의 전투병을 파병시키기 위해 총대를 멨다는 것이다. 이라크 전쟁 실패의 원인 제공자인 그는 미군을 한국 전투병으로 대체하지 않으면 안되는 절박한 상황이다. 이라크 주둔 미군을 한국 전투병으로 대체하지 못할 경우, 부시의 재선 가도에 먹구름이 드리울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난 11월5∼6일 이틀간 워싱턴에서 열린 한·미 국방당국자 회의에서도 드러났듯이 한국 정부는 전투병 파병에 부정적이다. 미국으로서는 뭔가 압박할 카드가 필요한 시점인 것이다. 워싱턴의 소식통들에 따르면, 미국 당국자들 스스로도 미국이 가지고 있는 가장 유력한 카드가 주한미군 카드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다.

럼스펠드는 한국이 이라크 파병을 거부할 경우 주한미군을 보낼 수밖에 없다고 압박할 것으로 보인다. 압박은 또 있다. 럼스펠드가 주한미군을 감축하겠다고 통보하는 것. ‘최근 언론 보도에서도 보듯이 현재 미국 국무부가 북한과의 평화협정을 준비하고 있고, 그렇게 되면 주한미군 감축이 불가피하다. 결국 당신들(한국 정부)에게 달려 있다. 이라크에 전투병을 파병하면 생각을 바꿀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으면 어쩔 수 없다’는 메시지를 예상할 수 있다는 것이다. 미국의 ‘시나리오 외교’는 당분간 평화협정의 두 얼굴을 십분 활용하며 다양한 외교 게임을 한반도에서 펼쳐갈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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