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코소보 전략''이 급선회한 까닭
  • 프랑크푸르트/허 광 (rena@sisapress.com)
  • 승인 2000.11.1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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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자치 선거 이후유엔안보리 결의 깨고 '분리 독립'으로 선회…유럽과 갈등 예고
지난 10월28일 코소보에서는 나토군이 주둔한 이후 처음으로 지방 자치 선거가 있었다. 이번 선거 결과를 놓고 서방에서는 코소보 주민들이 민주주의 시험에 합격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먼저 약 10만명으로 추산되는 세르비아계 주민 대부분이 선거를 거부했다. 또 여전히 코소보에서 살고 있는 터키계·슬라브계 주민 일부도 선거 거부에 동조했다. 이들은 코소보에서 추방된 소수 민족들이 다시 돌아오기 전에, 또 비알바니아계를 차별하는 정책을 그대로 두고서 치르는 선거는 알바니아계가 권력 독점을 정당화하는 요식 절차에 불과하다고 보고 있다.

실제로 유럽연합이나 유엔난민구조기구의 통계를 보면 코소보에서 추방된 비알바니아계 주민은 약 20만명, 학살된 주민은 2백명이 넘는다. 희생자들은 주로 코소보를 떠나지 못했거나 또는 떠나기를 거부했던 노약자와 부녀자이다. 그밖에 비알바니아계가 폭행이나 암살 협박을 받은 사례는 셀 수도 없다. 미국의 인권감시조직은 선거를 앞두고 현지 상황을 조사한 보고서에서 ‘자유롭고 공정한 선거에 필요한 최소한의 조건을 마련하기보다는 이미 정해진 선거 일정을 지키려는 분위기’라고 지적했다.

그러면 선거 결과는 어떠한가. 이번 선거에서 쌍벽을 이룰 것으로 예상되던 당은 ‘코소보 민주당’과 ‘코소보 민주동맹’이었다. 코소보민주당은 코소보해방군이 주축을 이루고 있는데 이번 선거 득표율은 28%이다. 코소보민주동맹은 비폭력 독립 노선으로 유명한 루고바가 당수이며 득표율은 57%이다. 다시 말해 나토의 지원을 받아온 코소보해방군을 알바니아계 주민조차도 원치 않는다는 사실이 드러난 것이다.

물론 코소보해방군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나토가 주둔한 이후 이른바 ‘코소보 임시 정부’의 경찰 조직이라고 자처해온 ‘코소보 자경단’은 지휘 계통이나 인적 구성에서 코소보해방군을 그대로 이어받았다. 코소보민주당 당수인 하심 타치는 코소보해방군에서 정치부 대표를 맡았던 인물이며, 코소보자경단을 이끌고 있는 아김 체쿠는 유고전쟁 중에 코소보해방군 장교로 활약했다. 코소보자경단은 비알바니아계 주민뿐만 아니라 정적들에 대한 정치 테러도 일삼고 있다. 일부 지역에서는 ‘세금’도 거두며, 지하 이권 사업을 벌이는 마피아 조직을 가동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번 선거를 전후해 여전히 불씨가 되고 있는 문제는 코소보의 독립이다. 선거에 참여한 20여 정당은 하나도 빠짐없이 ‘코소보 독립’을 선거 공약으로 내세웠다. 이 점에서는 코소보민주동맹도 마찬가지다. 루고바는 늦어도 내년 중반까지는 국회의원·대통령 선거를 통해 코소보를 완전 독립시킨다는 공약을 내걸었다. 더욱이 코소보 유엔임시행정부 대표 쿠쉬너는 아예 “나의 과제는 코소보 독립을 준비하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유엔안보리 결의 1244조에 따르면, 모든 나라는 유고연방의 주권과 영토를 보호할 의무를 지고 있다. 코소보 역시 유고연방에 속하는 이상, 서방 일부 언론이 ‘쿠쉬너가 월권을 하고 있다’고 지적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또 1244조에는 코소보의 자치기구나 코소보의 지위를 결정하는 ‘최종 규정’은 코소보의 임시 자치기구와 유고 정부가 협상을 통해 합의한다는 조항이 있다. 따라서 코소보의 정치 제도는 어디까지나 ‘임시’ 자치기구이며, 유고연방에서 일방적으로 분리·독립할 수 없다. 루고바와 유고 정부가 협상한다 해도, 1244조에 따르면 여기에는 어디까지나 코소보가 유고연방의 일부라는 전제가 깔려 있는 것이다. 따라서 내년 중반까지는 코소보 선거를 통해서 모든 정치 기구가 완비될 것이라는 루고바의 선거 공약도 분명히 1244조 위반이다.

사실 루고바가 코소보 독립 일정을 선거 공약으로 내세우기 전에도 1244조는 공수표와 다르지 않았다. 유엔임시행정부가 코소보 독립을 공공연히 거론하고 코소보해방군이 활보하는 분위기에서 코소보 독립은 단지 시간 문제로 보였다. 그러나 밀로셰비치가 대통령 직에서 물러나고 그 자리를 코스투니차가 이어받으면서 사정은 달라졌다. 한편으로는 유고의 민주화를 상징하고 또 한편으로는 서방의 유고 개입 전략의 성공 사례가 되는 인물인 코스투니차의 민족주의를 서방은 무시할 수 없는 처지이다. 그런데 그는 코소보에서 세르비아계의 정치 참여가 막혀 있는 한 코소보 선거는 무효라고 말한다.
세르비아계 난민이 코소보에 복귀하려면 그들을 보호하는 연방 군대도 코소보에 주둔할 필요가 있다. 쿠쉬너는 “코소보에 들어오는 유고군은 총살한다”라고 말하지만, 1244조는 유고군의 코소보 주둔도 인정하고 있다. 베오그라드에 파견된 미국 특사는 세르비아계 난민을 코소보에 안전하게 정착시킨다는 유고 정부 방침을 지지했다고 한다. 미국은 코스투니차를 후원하는 이상 코소보를 분리하기는 어렵다고 계산한 것일까?

미국이 1244조를 인정한다면 남는 문제는 알바니아계의 반응이다. 코소보 독립이라는 꿈이 깨질 때 그들의 총구는 나토군을 겨냥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때는 미국의 코소보 전략은 물론 발칸 전략도 타격을 받게 된다. 그렇다면 미국이 빠져나갈 방법은? 10월30일자 영국 신문 <인디펜던트>는 미국이 최근 코소보 전략을 재검토했으며, 그 내용은 홀부르크 유엔 주재 대사가 코소보에서 코소보해방군 출신 요인들과 비밀 회의를 가진 후 확정되었다고 한다. 미국은 또 이 비밀 회의 이후 대외적으로는 1244조가 코소보의 독립을 배제하는 것은 아니라는 입장을 알리기로 했다는 것이다.

만약 미국이 이런 해석을 고집하면 코스투니차 정부뿐만 아니라 유럽과도 갈등에 빠지게 된다. 최근 유럽연합의 외교담당 위원은 베오그라드를 방문한 자리에서 코소보를 독립시킬 계획은 없다고 못박았다. 그러나 ‘미국은 코소보를 독립시킨다는 원칙에 변화가 없으며 이 문제를 놓고 유럽과 대결할 준비도 되어 있다’고 영국 신문 <가디언>은 전한다. <가디언>에 따르면, 1244조에 대한 미국의 새로운 해석이 공개되는 시점은 12월. 유고에서 국회의원 선거가 끝난 후가 된다. 코소보 독립이 기정 사실로 알려질 경우 코스투니차가 입게 될 상처를 최소화한다는 계산 때문이다.

코피 아난 유엔 사무총장은 10월24일 쿠쉬너의 후임으로 영국 출신 애쉬다운을 뽑았다. 애쉬다운은 코소보 분리와 독립을 주장해온 인물이며, 지난해 유고전쟁 때는 알바니아 북부 코소보해방군 근거지에서 신병 훈련을 지원하기도 했다. 1244조를 둘러싼 서방 외교는 ‘조약은 깨지는 목적으로 존재한다’는 국제 정치의 속담을 다시 한번 검증케 하는 사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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