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로 다치고, 측근에 차이고…사면초가 몰린 일본 모리 총리
  • 도쿄/채명석 (cms@sisapress.com)
  • 승인 2000.11.1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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잇달 실언에 측근 장관 추문까지…조기 퇴진 목소리 커져
모리 요시로(森喜朗) 총리가 잇단 실언과 측근의 불상사로 사면초가에 직면해 있다.

모리 총리는 지난 10월27일 측근 중의 측근으로 알려진 나카가와 히데나오(中川秀直) 관방장관을 전격 경질하고, 그 후임에 후쿠다 전 총리의 장남인 후쿠다 야스오(福田康夫) 의원을 임명하는 인사를 단행했다.
나카가와 전 관방장관은 자타가 공인하는 모리 총리의 심복. 자민당 간사장으로 전출한 노나카 히로무(野中廣務) 전 관방장관의 뒤를 이어 4개월 전 제2차 모리 내각의 안 살림을 꾸려가는 관방장관 직에 중용되었다. 나카가와 장관은 관방장관 재임 중 주변으로부터 ‘신문기자 출신답게 정세 판단이 빠르며, 행동력이 있다’는 호평을 받아 왔다.

그러나 최근 <포커스>라는 사진 전문 주간지가 나카가와 장관이 거물 우익과 친밀한 관계이며, 전직 호스테스 여성과 애인 관계였다는 사실을 폭로하자 사정이 변했다. 나카가와 장관은 처음에는 ‘그런 사실이 없다’ ‘기억에 없다’는 식으로 위기를 넘기려 했다. 하지만 <포커스>가 나카가와 장관이 거물 우익과 식사하는 사진과 호스테스 애인이 그의 자택 침실에서 애견을 안고 찍은 사진을 증거물로 공개하자 언론은 물론 야당으로부터 사임 압력이 가중되기 시작했다.

결정적인 증거물은 또 있었다. 나카가와 장관이 호스테스 애인에게 ‘경찰이 당신을 마약 사용 혐의로 단속한다는 정보가 있으니 조심하라’고 귀띔한 전화 통화 내용을 녹음한 테이프이다. 텔레비전 방송국들이 이 녹음 테이프를 저녁 뉴스 시간에 공개하자 자민당 간부들은 나카가와 장관을 경질하지 않고는 사태를 수습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모리 총리에게 장관 경질을 요구하기에 이르렀다.
모리 총리는 나카가와 장관의 추문이 불거지고 사임 압력이 가중되자 처음에는 “그가 관련된 사실을 부인하고 있기 때문에 나는 그의 말을 전적으로 신용한다”라고 자신의 충복을 감싸는 태도로 일관했다. 그러나 나카가와 장관이 이 문제에 대해 국회에서 야당 의원들의 질문에 허위로 답변했다는 사실과 호스테스 애인에게 경찰의 수사 정보를 누설했다는 사실이 드러나자 모리 총리로서도 그를 더 감쌀 수 없게 되었다. 모리 총리는 결국 사표를 수리하는 형태로 나카가와를 경질했다.

야당들은 나카가와 장관 경질에도 불구하고 11월2일 열린 당수 토론회에서 모리 총리의 ‘임명 책임’을 호되게 추궁했다. 하토야마 유키오(鳩山由紀夫) 민주당 대표는 “나카가와 씨가 국회에서 허위로 답변한 것은 커다란 범죄이다. 그런 사람을 각료에 임명한 모리 총리의 책임도 중대하다”라고 몰아붙였다. 이에 대해 모리 총리는 “각료 인사에 대한 책임은 자각하고 있으나 임명 당시 이런 사태가 올지 전혀 예측할 수 없었다”라며 궁색한 변명을 늘어놓았다.

11월2일 열린 당수 토론회에서는 모리 총리의 문제 발언 두 가지도 도마에 올랐다. 하나는 모리 총리가 3년 전(당시 자민당 총무회장) 여 3당 방북단을 이끌고 평양에 갔을 때, 북한측에 일본인 납치 의혹을 해결하는 방법의 하나로 “그들이 베이징이나 방콕에서 발견된 것으로 하면 어떻겠냐”라고 제안했다는 문제이다.

모리 총리의 이 ‘일본인 행방불명자 제3국 발견 제안’이 처음 알려진 것은 서울에서 아시아유럽정상회의(ASEM)가 열리고 있던 지난 10월20일이다. 모리 총리는 서울에서 영국의 블레어 총리와 개별적으로 회담한 자리에서 블레어 총리가 영국 정부의 대북 수교 방침을 설명하면서 “북한과 교섭하려 하는데 한마디 훈수를 부탁한다”라고 운을 떼자, 다음과 같은 비화를 털어놓았다고 한다.

“내가 3년 전 여 3당 방북단 단장으로 북한에 갔을 때 나카야마 데루아키(中山正暉) 부단장이 납치 문제를 꺼내자 북한측이 맹렬히 항의했다. 그래서 내가 나서서 점심 식사나 하자면서 양쪽을 악수시켰다. 오후에는 그들을 행방불명자로 해도 좋으니 베이징이나 방콕에 있었다고 하는 방법도 있다는 말을 했다.”

이 발언이 전해지자 일본 국내는 발칵 뒤집혔다. 우선 언론들은 모리 총리가 북한과 접촉한 경위를 제3국 수뇌에게 털어놓은 것은 외교상의 비밀을 누설한 몰상식한 행위라고 경솔함을 공격했다. 언론들은 또 납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 중의 하나인 ‘제3국 발견안’을 공개함으로써 납치 문제를 해결하기 더욱 어렵게 만들었다고 비난했다.

언론들은 또 모리 총리의 과거 실언, 즉 천황 중심 신의 나라 발언(5월), 교육칙어 부활 발언(5월), 천황 중심의 국체 보전 발언(6월), 후방이란 뜻의 총후(銃後) 발언 등을 열거하면서 그의 실언벽은 고칠 수 없는 중병이라고 분개했다.

하토야마 민주당 당수도 11월2일 열린 당수 토론회에서 이 문제를 다시 끄집어내어 모리 총리의 경솔함을 신랄히 공격했다. 그는 모리 총리를 ‘견딜 수 없는 경솔한 존재’라고 혹평하면서, “외교 접촉 상의 비밀을 공개함으로써 일본의 주권을 침해한 납치 사건을 북한에 납치 사건으로서 제기하기가 사실상 불가능해졌다”라고 공격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모리 총리가 3년 전 북한에 쌀 50만t을 지원하겠다고 약속했다는 밀약설도 불거져 나왔다.

일본 언론들의 보도에 따르면, 북한의 김용순 비서는 지난해 7월 평양을 방문한 사회당 의원들에게 “3년 전 이곳에 온 모리 단장이 쌀 50만t을 지원해 주기로 약속했는데 아직껏 소식이 없다”라며 불만을 털어놓았다는 것이다. 또 지난 4월 평양에서 7년 반 만에 재개된 북·일 수교회담에서도 북한측은 ‘일본이 이번에 10만t을 지원해 주기로 결정했는데, 나머지 40만t은 어떻게 된 것이냐’고 물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모리 총리는 “내가 단장으로 참석한 전체회의에서는 그런 얘기는 일절 없었다”라고 북한과의 밀약설을 강력히 부인했다. 그러나 노나카 자민당 간사장이 “갈 때마다 북한측으로부터 50만t, 100만t을 지원해 달라는 요청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라며, 북한측으로부터 3년 전 그런 요청이 있었음을 인정해 모리 총리와는 상반된 설명을 하고 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에게 비밀리에 친서를 보냈다는 소문도 모리 총리를 곤혹스럽게 만들었다. 일본 언론들의 보도에 따르면, 모리 총리는 지난 8월 하순 재미 언론인 문명자씨를 몰래 만나 김정일 위원장에게 보내는 친서를 맡겼다고 한다. 야당과 언론 들은 이 문제에 대해서도 정식 외교 경로를 통하지 않고 밀사를 통해 친서를 전달하려고 했던 모리 총리를 비난하고 있다.
이같이 모리 총리가 실언을 되풀이하고 측근인 나카가와 관방장관의 추문까지 겹치자 야당은 물론 자민당 내부에서도 모리 총리 조기 퇴진을 촉구하는 소리가 높아가고 있다.

자민당 젊은 개혁파 의원들의 모임인 ‘자민당의 내일을 만드는 회’는 최근 내년 9월로 예정된 자민당 총재 선거를 연내로 앞당겨 실시하자고 주장했다. 각종 실언으로 지지율이 15%를 맴돌고 있는 모리 총리를 간판으로 내걸고 내년 여름의 참의원 선거에 임했다가는 자민당이 또다시 대패할 수 있다는 우려에서이다.

모리 총리의 ‘참을 수 없는 경솔함’이 자신의 퇴진을 재촉하고 있는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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