급물살 탄 북·일 수교 “베이징 회담에 달렸다”
  • 도쿄/채명석 (cms@sisapress.com)
  • 승인 2000.11.0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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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북한과 11차 본회담 재개…대규모 식량 지원으로 물꼬 터
미·북 관계가 급진전하는 데 영향을 받아 북·일 관계도 급물살을 탈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고노 요헤이(河野洋一) 외상은 지난 10월17일 북한과의 국교 정상화교섭 11차 본회담을 오는 10월30일과 31일 중국 베이징에서 개최한다고 정식 발표했다. 북·일 양국은 도쿄에서 열린 10차 본회담 때 다음 회담을 10월께 제 3국에서 열기로 합의했으나, 일정과 의제 등을 둘러싸고 이견을 보여 차기 회담 재개가 불투명했다.

이러한 교착 상태에 돌파구를 연 것이 일본 정부가 지난 10월6일 결정한 쌀 50만t 지원 결정이다. 일본 정부는 처음 세계식량계획(WEP)이 국제 사회에 요청한 범위에서 북한에 추가로 식량을 지원하겠다고 강조해 왔다. 그러나 일본 정부가 실제로 발표한 지원량은 세계식량계획이 요청한 19만5천t을 훨씬 뛰어넘는 규모였다.

그것도 전량을 질이 좋은 일본 국내 쌀로 지원한다는 파격적인 조건이다. 다카기 유키(高木勇樹) 농수산부 사무차관은 10월19일 기자회견에서 “전량을 국산 쌀로 지원한다는 결정은 아직 하지 않았다”라고 부인하면서도, 머지 않아 정치적 판단이 내려질 것이며, 전량을 일본 쌀로 지원하는 안이 현재 유력하다는 것을 시사했다.

일본 정부가 지난 3월 북한에 지원한 쌀 10만t은 대부분 질이 떨어지는 수입 쌀이었고, 일본 국내산 쌀은 3%에 불과했다. 일본 언론들의 보도에 따르면, 50만t을 전량 일본 국내산 쌀로 충당할 경우 일본 정부가 부담하는 비용은 약 천억 엔으로, 외국산 쌀을 지원할 경우(약 2백50억 엔)보다 네 배나 비용이 더 들어간다. 이런 파격적인 쌀 지원을 주도하고 있는 것은 일본 외무성이다. 고노 외상은 대량 쌀 지원에 반대하는 자민당 보수 우파를 설득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외무성 담당자들도 자민당 보수 우파 의원들을 찾아가 대북 관계를 획기적으로 개선하려면 ‘인도적 명분에 의한 소량 지원’보다는 ‘전략적인 차원에서의 대량 지원’이 필요하다는 점을 역설한 것으로 알려졌다.

일본 외무성을 안달하게 만든 것은 물론 북·미 관계 급진전이다. 북·미 관계가 올브라이트 국무장관의 방북, 클린턴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 간의 연내 정상회담 개최로 치닫자, 외무성은 ‘북·미 관계 개선은 북·일 관계에도 플러스가 될 것이다’라는 성명을 내놓았다.

그러나 외무성의 속내는 다르다. 남북 관계에 이어 만약 북·미 관계가 북·일 관계를 추월할 경우 일본 외무성이 안게 되는 외교적 패배감은 과거의 미·중 수교 때보다 훨씬 심각하다. 그것은 일본 외무성이 외교 수완을 발휘해 미수교 상태를 종결할 수 있는 지구상 최후의 국가가 바로 북한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외무성은 납치 문제와 미사일·핵 문제 해결을 조건으로 내세우기보다 북·일 수교 교섭을 우선해 그 과정에서 납치 문제 등을 해결한다는 ‘선 수교, 후 현안 타결’ 전략으로 궤도를 수정하고, 외교 전략적 차원에서 대량 쌀 지원을 결정하게 된 것이다.

고노 외상은 대량 쌀 지원을 발표하면서 “평양과 도쿄에서 재개된 9차, 10차 본회담에서 양쪽이 하고 싶은 말을 다 했으니 이번에는 구체적인 의제에 대해 실질적인 협의에 들어가고 싶다”라고 희망을 피력했다. 과거에도 1·2차 회담은 양측이 상견례를 하는 정도로 끝내고 3차 회담부터 본격적인 토의에 들어간 바 있다.

따라서 북·일 양국은 베이징 회담에서 북한측이 우선 타결을 주장하고 있는 과거에 대한 사죄·보상 문제와 일본측이 주장하는 납치 의혹 해결을 위한 구체적인 토의에 들어갈 것으로 보인다.

북한은 전전과 전후에 대한 보상금으로 지금까지 100억 달러를 거론해 왔다. 그러나 최근 보도에 따르면, 북한은 배상 50억 달러, 경제 협력 30억 달러 등 80억 달러를 주장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다.

일본측이 그동안 전면에 내세워 온 미사일과 핵 문제는 북·미 공동성명과 북·미 관계 급진전으로 북·일 수교 교섭 협상 테이블의 중요 의제로서는 김이 빠져버렸다. 따라서 일본측이 전면에 내세울 수 있는 의제는 일본인 납치 의혹뿐인데, 북한이 일본인 행방불명자 조사에 성의를 보일 경우 이 의제도 뒷전으로 넘어갈 가능성이 크다.

대신 베이징 회담에서 가장 주목되는 것은 고노 외상의 방북과 북·일 정상회담 개최에 관해 양측이 얼마나 의견을 접근시키느냐는 점이다. 고노 외상은 지난 7월 방콕에서 열린 아세안 지역안보 포럼 때 북한의 백남순 외상과 사상 처음으로 북·일 외상회담을 가진 바 있다. 또 모리 총리는 9월 밀레니엄 정상회의를 이용해 북한의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과 첫 북·일 정상급회담을 가질 예정이었다. 이 회담은 김영남 위원장이 도중에 귀국하는 바람에 무산되었지만, 일본 정부는 북한 요인과의 직접 접촉에 상당한 의욕을 보였다.

고노 외상 방북 문제도 이같은 연장선상에서 거론된다. 더욱이 올브라이트 국무장관이 직접 북한에 들어가 김정일 위원장과 회담하는 장면을 지켜보아야 하는 일본으로서는 고노 외상의 방북을 이번 베이징 회담의 물밑 접촉에서 타결하고 싶을 것이 당연하다. 정상회담도 일본 정부가 적극 추진하는 과제이다. 일본 언론들의 보도에 따르면, 지난 8월 하순께 재미 언론인 문명자씨를 통해 모리 총리가 김정일 위원장에게 비밀리에 친서를 보낸 것으로 드러났다. ‘북한의 최고 권력자와 통할 수 있는 대화 채널을 가져야 한다’는 김대중 대통령의 충고에 따라 모리 총리는 지난 7월 중순께 자민당 친북파 거물 의원이었던 우쓰노미야 도쿠마(宇都宮德馬) 전 참의원 의원의 장례식에 참석하러 도쿄에 들른 문명자씨를 비밀리에 만났으며, 8월 하순에 다시 만나 김정일 위원장 앞으로 보내는 친서를 맡겼다는 것이다. 일본 언론들의 보도에 따르면, 이 친서에 대한 북한측의 반응은 아직 없다.

그렇다면 북·일 수교 타결과 정상회담 개최에 관해 칼자루를 쥐고 있는 김정일 위원장의 의향은 무엇일까. 지난 8월 방북한 남한의 신문·방송 사장단 앞에서 그는 “나는 자존심을 꺾으면서까지 일본과는 절대로 수교하지 않는다”라고 단언했다. 그러면서 대일 수교의 전제 조건으로 보상 문제 등 과거 청산이 우선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일본인 납치 문제에 대해서는 “일본이 부당한 해명을 요구하고 있지만, 그렇다면 메이지 유신 때부터 따지지 않으면 안된다”라고 강경한 입장을 보였다.

이같은 일련의 발언을 분석해 보면, 김정일 위원장은 대일 수교는 아직 서두르지 않고 있는 것 같다. 먼저 남북 관계를 개선하고 그 후 북·미 관계를 정상화한 다음, 북·일 관계를 챙긴다는 생각인 것이다. 일본을 안달 나게 하면 할수록 전전·전후 배상금을 최대한으로 우려낼 수 있다는 전략도 깔려 있다.

베이징 회담은 그런 면에서 중요한 고비이다. 이 회담에서 북한측이 보이는 태도가 앞으로의 북·일 관계 개선 속도를 점칠 수 있는 중요한 가늠자가 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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