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은 지금 ''분증 전쟁''
  • 도쿄/채명석 (cms@sisapress.com)
  • 승인 2000.10.1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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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주민카드 제도 도입 놓고 시끌… 야당·시민단체 “개인 사생활 침해” 극력 반대
일본은 신분증이 없는 사회이다. 일본인은 선거 때에도 그냥 투표 통지표만 들고 투표소에 간다. 투표할 때 신분 확인도 하지 않는다. 주민등록증이라는 국가 신분증 제도가 생활 속에 깊숙이 들어와 있는 한국 사람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한국에서 신분증이 없으면 은행 계좌도 개설하지 못하고, 불심 검문에 걸려 경찰서로 끌려갈 수 있다고 이야기하면 일본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한다. 한국이 거주지 등록·신분증 교부·고유 번호(주민번호)와 같은 여러 가지 주민 관리 시스템을 갖고 있는 반면, 일본은 거주지를 등록하는 외에 별다른 제도를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일본이 세계 최초로 IC칩이 내장된 전자 주민 카드 도입을 골자로 하는 새로운 주민 관리 제도를 도입한다. 1999년 8월 야당의 거센 반대에도 불구하고 일본 중의원에서 주민기본대장법(住民基本臺帳法)이 개정되었다. 한국의 주민등록법과 유사한 이 법이 통과됨으로써 일본 국민은 2002년부터 전자 주민 카드를 발급받고 개인 고유 번호를 부여받는다.

그러나 일본의 야당·시민단체·노조는 국민의 사생활이 침해되고, 통제 사회로 바뀌게 된다면서 격렬하게 저항하고 있다. 특히 100만 회원을 지닌 일본 지방자치체 공무원 노조인 지치로(自治勞)가 전자 주민 카드 시스템에 가장 거세게 저항하고 있다. 지치로는 자료집을 발간하고 주민과 간담회를 열어 이 시스템의 문제점을 시민에게 알리고 있다. 야당이나 시민단체 출신 자치단체장의 경우 아예 개정된 주민기본대장법에 의한 주민표 발급 사업에 협조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한국처럼 ‘안보 논리’가 필요 없는 일본에서 이런 반대에도 불구하고 전자 주민 카드를 도입하려는 이유에 대해 일본 정부는 △정확한 과세 △IT산업 육성 △효율적인 주민 관리를 위해서라고 밝히고 있다. 그렇지만 야당·시민단체 등 반대론자들은 이런 효과에 의문을 제기한다. 정부가 주장하는 효과는 추상적이지만, 시민이 볼 피해는 구체적이라는 것이다.

일본 정부는 전자 주민 카드에 이름·주소·성별·생년월일 네 가지만 수록한다고 하지만, 이 카드에 내장된 IC칩이 기억할 수 있는 용량은 영문 8천자나 된다. 이 정도면 운전 면허·인감 증명·국민 연금·의료 보험 관련 사항을 입력할 수 있는 것은 물론 신용 카드·교통 카드와도 연계해 사용할 수 있다. 언뜻 보면 편리할 것도 같지만 만약 카드를 잃어버리면 기본적인 생활 자체가 불가능해지는 상황을 맞을 수 있다. 무엇보다 위험한 것은, 정부가 마음만 먹으면 사생활을 낱낱이 들여다볼 수 있다는 것이다. 다른 사람이 언제 어디서 어떤 방식으로 자신의 정보를 유출할지 장담할 수 없다.

특히 이 제도는 지난 20년 동안 지문 날인을 거부하면서 외국인등록제에 저항해온 재일 동포 같은 일본내 외국인에게 시련을 줄 수 있다. 신분증이 없는 일본 사회에서 유독 재일 외국인만이 지문을 찍고 외국인등록증을 반드시 휴대해야 했다. 여태까지는 남들이 안하는 것을 강요당함으로써 차별을 받았지만, 이제 일본 국민이 주민표·주민 고유 번호를 갖게 되어 이전과는 다른 차별을 받을 가능성이 높아졌다. 일본이 한국처럼 신분증 없이 생활하기 힘든 ‘신분증 사회’가 되었을 때, 일본내 소수자들은 또 다른 새로운 차별에 노출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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