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통일 10년의 상처 '동독 식민화'
  • 프랑크푸르트/허 광 (rena@sisapress.com)
  • 승인 2000.10.1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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흡수 통합 후 재산 대부분 상실…“서독 정권·기업 뜻대로 진행”
해마다 10월3일이면 독일에서는 통일 기념식이 열린다. 그런데 올해에는 생각도 못할 일이 벌어졌다. ‘통일 총리’라 불리는 콜이 기념식 참석을 거부한 것이다. 어떤 사연 때문일까? 매년 각 주 정부가 돌아가면서 주최하는 통일 기념식을 올해는 옛 동독에 속하는 작센 주 정부가 맡았다. 작센 주지사 비덴코프는 지난 여름 콜에게 편지를 보내 ‘기념식에 초대는 하지만 연단에는 설 수 없다’고 통보했다. 비자금 추문에 휩싸여 있는 콜에게는 연설할 자격조차 줄 수 없다는 뜻을 전한 것이다.

비덴코프가 집권당 소속이기만 하더라도 콜은 할 말이 많았을 것이다. 그러나 비덴코프는 콜과 같은 기민당 소속이다. 그는 대학 교수 출신으로 1970년대에 기민당 정책실에 영입되어 당 이론가로 활약했다. 한때 당 개혁론을 들고 나와 콜의 정적으로 떠올랐지만 콜의 견제에 밀려 한직에 머물렀다. 그가 다시 정치 무대에 오른 때는 통일 직후. 서독 출신으로서 작센 주 선거에서 지사가 되었으니, 어떻게 보면 콜의 도움을 받은 셈이다. 그런데도 콜은 비덴코프가 주최하는 기념식에서 연설마저 못하게 되었으니 심사가 뒤틀렸을 만하다.

기민당 지도부는 콜의 불편한 심기를 두고 볼 수만은 없었던지 ‘유럽과 독일 통일’이라는 국제 회의를 따로 열어 그의 업적을 기렸다. 기민당은 이 회의에 내건 현수막에 이런 구호를 담았다. ‘그래도 동독은 부흥한다’. 기민당은 동독에 문제가 있다고 세상이 아무리 떠들어도 사실은 다르다고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공식 통계를 보면 동독 지역의 산업 생산고는 1991년도의 140%에 이른다. 그러나 이 수치는 통일을 1년 앞둔 1989년과 비교하면 94%로 떨어진다. 옛 동독에 매년 천문학적인 자금을 지원하고 있다고 독일 정부는 말하지만 동독 경제는 10년이 지나도 제자리걸음이다.

실제로 동독 기업은 서독 마르크를 도입하면서 상품 가격이 3배로 폭등해 동유럽 시장에서 한순간에 경쟁력을 잃고 말았다. 독일 연방은행장은 유럽연합 경제위원회에서 ‘동서독 화폐 통합은 다시는 있어서는 안될 실책’이라고 실토한 바 있다. 한번 흔들리기 시작한 동독 산업은 통일 후에는 신탁관리청이 관장한 사유화 정책에 휩쓸려 또 한번 진통을 겪었다. 신탁관리청이 남긴 통계를 보면, 동독 재산은 85%가 서독 기업으로, 10%가 외국인 손으로 넘어갔다. 나머지 5%가 동독인 몫으로 남았을 뿐이다. 이런 수치를 두고 독일인권협회는 ‘유럽 현대사에 기록될 소유권 이동이 벌어졌다’고 말한다. 그것은 전쟁을 통해서나 가능한 ‘재산 약탈’이며 그 진상은 여전히 숨겨져 있다는 것이다. 신탁관리청의 행적을 담은 문건은 연방 의회가 조사할 때도 80%가 국가 기밀에 묶여 있었으니 이런 지적도 무리는 아니다.

노벨 문학상 수상 작가 귄터 그라스는 이미 1992년에 동서독 통합 과정을 ‘동독 식민화’라고 예견한 바 있다. 동독의 재산은 서독 재산가들이 모조리 차지하게 될 것이며, 그들의 머리 속에는 ‘모겐소 플랜’이 들어 있다고 그는 말했다. 모겐소 플랜이란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에 연합국들이 독일의 전쟁 위협을 근절할 수단으로 거론한 것으로, 독일 산업 시설을 철거해서 군수 기업을 뿌리 뽑는다는 구상이었다. 그러나 냉전이 시작되어 독일이 분단되고 서독의 재무장이 시작되면서 모겐소 플랜은 구상으로 끝나고 말았다. 귄터 그라스는 냉전에 밀려 사라진 모겐소 플랜이 냉전을 끝낸 통일 독일에서 부활하고 있으며, 신탁관리청은 점령군 행세를 한다고 빗댄 것이다.
귄터 그라스의 발언을 예외로 하면 동서독 통합에 대해 비판적인 분석은 흔치 않다. 독일 지식인들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1년도 못 되어 동독이 흡수 통합되는 현실에 큰 충격을 받았고, 대개는 이런 현실을 어쩔 수 없는 숙명처럼 받아들였다. 그동안 통일 과정에 대한 분석이 적지 않았지만 대개는 독일 정부의 공식 입장을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콜 정부의 통일 협상 파트너였던 동독 총리 드마지에는 동독의 현실이 너무나 급박해 흡수 통합이 불가피했으며, 예상하기 어려운 위기 앞에서 동서독 정부는 최선을 다했다고 말한다.

바로 이런 주장이 정설로 통하고 있을 때 반기를 든 인물들이 있다. 통일 현장을 베를린에서 목격한 정치학자들이다. 서 베를린 자유대학의 몇몇 정치학자들은 1991년 겨울, 동 베를린 훔볼트 대학 동료들에게 통일 과정 연구를 제안하고 이들의 동의를 얻어 체계적인 분석에 들어갔다. 이들의 연구 작업은 1996년, 한 권의 단행본 <동독 식민화>로 출간되어 독일 학계에 격렬한 논쟁을 불러 일으켰고 그동안 벌어진 논쟁과 연구 작업은 최근 두 번째 단행본 <통일 10년의 결산>으로 선보였다.

첫 단행본은 제목 그대로 귄터 그라스가 말한 ‘동독 식민화’를, 두 번째 저작은 ‘구조적 식민화’를 화두로 삼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식민화는 무엇을 말하는가? 이 단어에는 3백년에 걸친 유럽 팽창의 역사, 유럽 점령군과 이민족 학살의 역사가 배어 있다. 그러나 베를린 정치학자들은 식민화를 한 사회가 자기의 가치와 제도를 다른 사회에 이식하는 현상으로 보자고 말한다. 예를 들어 한 사회의 구조를 파괴하고 경제 자원을 착취하는 것은 식민화의 대표적인 현상이다. 한 지역의 이해를 대변하는 정치 엘리트나 지식인을 제거하고 주민의 정체성을 약화시키는 것도 마찬가지다. 식민화를 이렇게 정의하면 독일 통일은 전형적인 식민화에 다름없다는 것이 이들의 분석이다. 동독에서는 시민혁명 세력의 개혁 의지가 무시되고 서독 권력 엘리트들의 이해가 관철되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흡수 통합말고는 다른 선택이 없었다는 논리는 서독 권력의 이해를 대변할 뿐이라고 이들은 말한다.

통일 과정에 숨어 있는 서독 권력 엘리트의 이해는 첫째가 권력 연장이다. 예를 들어 콜은 처음에 통화 통합에 부정적이었다. 그대신 동독 경제를 단계적으로 안정시켜야 한다고 말했다. 1990년 1월까지도 콜은 이런 입장이었다. 그러나 2월에는 통화 통합이 몇 달 이내에 가능하다고 말을 바꾸었다. 그와 동시에 경제부 장관은 동독의 경제 개혁이 우선이고 통화 통합은 1993년에나 가능하다고 말했다. 다시 말해 콜이 내놓은 통화 통합 일정에 합리성이라고는 찾기 어려웠다.

동서독 통일 방안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콜이 1989년 11월 처음으로 밝힌 통일 방안은 ‘연합론’이다. 동서독이 공존하는 ‘연합 체제’를 10년 정도 꾸리고 나서 연방제를 생각해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단계적 통일론이 1990년 2월이 되자 흡수 통일론으로 바뀌었다. 콜이 통일 방안을 바꾼 배경에는 차기 선거 일정이 있었다. 당시 사민당이 우세를 보인 여론조사 결과에 불안을 느낀 콜은 흡수 통합에서 탈출구를 찾았다.

그 결과 동독은 공식적인 통일 시점인 10월3일이 되기도 전에 마르크를 도입했다. 이 때 동독 경제 위기론이 떠돌기 시작했다. 동독 경제는 서독이 개입하지 않으면 곧 무너진다는 경고였다. 그러나 동독의 생활 수준은 서독과는 비교할 수 없지만 남유럽의 시장 경제 체제 국가들보다는 높았다. 통일 전 동독에 훨씬 뒤떨어졌던 폴란드나 체코의 경제가 1990년대 초에는 동독보다 안정된 모습을 보인 것도 고려해 보아야 한다. 이것은 동독 경제가 서독에 흡수됨으로써 불이익을 당했다는 사실을 말해 준다.
콜은 흡수 통일만이 살 길이라는 여론을 통해서 선거전을 승리로 이끌었다. 그럼에도 남는 의문이 있다. 정치적 계산은 그렇다 치고 경제 논리에 맞지 않는다고 지적된 흡수 통합에 서독 기업이 동조한 이유는 무엇인가? 베를린 학자들은 서독 자본이 흡수 통합에서 몇 가지 전략을 관철했다고 본다. 예를 들면 동독에서 경쟁 상대가 될 만한 기업을 해체하고 동독을 서독 잉여 상품의 소비 시장으로 삼는다는 전략이다. 화폐 통합이나 동독 재산 사유화가 모두 이런 전략에 맞아떨어졌다. 이같은 분석을 입증하는 한 가지 통계 수치가 있다. 지난 10년 동안 독일 정부가 동독 지역에 보낸 자금은 연평균 약 8백억 달러에 이른다. 반면 동독 지역에서 서독 기업이 얻은 총수익은 약 1조 달러이다. 다시 말해 서독 시민이 부담하는 동독 지원 자금은 고스란히 서독 기업으로 흘러들어가고 있다.

동독 식민화의 또 다른 현상으로 ‘정리 해고’를 빠뜨릴 수 없다. 동독 군대가 해체되면서 군인 30만명이 모두 해고된 것은 물론이고 공무원 60만명, 대학 교직원 70%가 해고되었다. 이들이 비운 자리는 서독 출신들이 차지했다. 이같은 정리 해고, 인물 교체가 동독 사회에 남긴 변화는 심각했다. 무엇보다 동독 사회 개혁에 필요한 인적 자원들이 사라졌고 서독의 권위주위가 뿌리를 내렸다.

베를린 학자들은 이같은 현실을 예로 들어 ‘동독 식민화’는 가설이 아니라 검증할 수 있는 현실이라고 말한다. 그들 중 일부는 동독 사회 모든 분야에서 자율성이 박탈되고 서독 권력의 가치와 이해가 관철되는 한 고전적인 식민화에 가깝다고 보기도 한다. 한편에는 식민화론이 학문적 틀을 벗어난 것이며 통일 과정에서 배제된 소외 세력의 불평을 대변할 뿐이라는 비판도 있다.

그러나 식민화론은 감정적 저항이나 논쟁을 위한 도발이 아니며 어디까지나 동독 사회 현실을 반영하는 한 가지 개념이다. 단적인 예로 동독 주민 절반이 식민화론을 인정한다는 여론조사 결과도 있다. 물론 식민화론은 통일 과정의 일면이다. 식민화론자들은 독일 통일의 또 다른 결실이 민주화이며, 시장 경제나 의회 민주주의를 대치할 수 있는 가치는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동서독 통합은 권력 정치가 아니라 민주적 가치에 따라 이루어져야 하며, 민주화를 가로막는 현실의 한 측면으로 식민화를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민주화는 식민화와 상극이며 긴장 관계를 이룬다. 그 긴장 관계는 동독 시민들이 자기를 이해하고 표현할 뿐 아니라 관철할 때에 비로소 해소된다. 식민화론자들이 옛 동독의 지배 체제를 범죄시하는 단순 논리를 거부하고 동독 시민의 개혁 운동이나 정당 조직 연구에 주목하는 것도 이런 면에서 이해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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