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핵기밀 절취 사건 3년 법정 공방 막 내리다
  • 워싱턴 · 변창섭 편집위원 ()
  • 승인 2000.10.0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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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핵기밀 절취 혐의 중국 출신 과학자 석방… 법원, 이례적 사과 발표
“리박사, 미국 사법부의 일원으로서 귀하가 행정부에 의해 불공정하게 구금당한 데 대해 진심으로 사과합니다.” 지난 9월13일 미국 연방 지법 제임스 파커 판사는 핵기밀 절취 혐의를 포함해 무려 59가지 죄목으로 기소된 중국계 미국인 핵무기 과학자인 리웬호(중국명) 박사를 석방하면서 이례적으로 사과해 세상을 깜짝 놀라게 했다.

이 날 리 박사는 자신에게 씌워진 59가지 죄목 가운데 핵기밀을 부적절하게 취급했다는 한 가지 혐의만을 인정하고 풀려났다. 그에 대한 석방은 기소 혐의를 입증할 자신이 없던 검찰이 막판에 리 박사 변호인단에게 이른바 ‘유죄 답변 거래(plea bargain)’를 제시해 이루어졌다. 유죄 답변 거래란 피고측이 특정 혐의를 인정하는 대신, 검찰측이 석방이나 가벼운 구형 등 양보안을 제시하는 것을 말한다. 연방 검찰은 기소 내용을 입증할 결정적인 물증을 확보하지 못한 데다, 본격적인 재판이 시작될 경우 핵기밀의 상당 부분이 일반에 공개될 수도 있다는 염려 때문에 유죄 답변 거래를 택했다.

증거 불충분으로 ‘유죄 답변 거래’ 통해 풀려나

그토록 리 박사를 기소하기 위해 안달이던 검찰이 재판이 시작되기도 전에 백기를 들자, 무엇보다 루이스 프리치 연방수사국장이나 재닛 리노 법무장관이 얼굴을 못들게 되었다. 오죽하면 클린턴 대통령이 판결이 나온 다음날 공개적으로 리노 장관을 질타했을까. 그런데도 리노 장관은 파커 판사의 석방 결정에 유감을 표시했을 뿐, 리 박사를 핵기밀을 훔친 ‘확증범’으로 기소하려던 원래의 법무부 입장에서 한 걸음도 물러설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리 박사는 지난해 12월부터 석방 직전까지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한 교도소에서 독방 생활을 했다. 그가 독방에 갇힌 이유는 단 하나, 그가 숙지한 핵무기 관련 기밀이 제3자에게 흘러들어갈 경우 미국 안보에 치명적인 해를 끼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었다. 유죄가 확정될 경우에는 종신형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그처럼 ‘위험 인물’에게 파커 판사가 석방 판결을 내린 것이다. 그것도 연방 지법 판사의 극히 드문 ‘사죄의 변’까지 곁들여서 말이다. 도대체 리 박사는 누구이며, 또 핵기밀 절취 사건의 진실은 무엇일까.

올해 60세인 리 박사는 미국의 3대 국립연구소 가운데 하나인 로스 알라모스 연구소에서 1978년부터 일해온 1급 핵무기 과학자다. 그에게 시련이 닥친 때는 1995년. 당시 미국 중앙정보국(CIA)은 중국이 미국이 개발한 최정예 핵탄두 기밀인 W 88을 훔쳤다는 확증을 잡고, 그 기밀을 건넨 용의자를 색출하고 있었다. W 88은 미국이 1988년에 개발한 최정예 핵탄두 기밀인데, 중국이 이 기밀을 획득해 사정거리 약 8천km인 대륙간 탄도미사일 ‘동풍 31호’ 개발을 완료하고 배치를 앞둔 것으로 알려졌다. 중앙정보국은 수사 끝에 문제의 핵기밀이 누설된 장소가 로스 알라모스 연구소라는 것을 알아냈다.
수사당국은 면밀한 내사 끝에 핵기밀을 다루는 ‘X 부서’ 소속 리 박사가 약 40만 쪽에 이르는 핵기밀 자료를 보안 장치가 되어 있지 않은 일반 컴퓨터 디스켓에 불법으로 저장했다는 혐의를 잡고, 1997년 7월 법무부에 가택수색권을 요청했다. 재닛 리노 법무장관은 증거 불충분을 이유로 이를 거부했다. 그러나 이미 리 박사를 핵심 용의자로 간주한 수사당국은 계속 그를 옥죄었다. 그러자 로스 알라모스 연구소는 그를 기밀을 다루지 않는 부서로 전출시켰다.

그러나 지난해 3월6일, 그간의 수사 결과가 최고의 영향력을 자랑하는 <뉴욕 타임스>에 대서 특필된 뒤 리 박사는 결국 연방 법무부로부터 기소당했다. <뉴욕 타임스>는 1면 머리 기사를 통해 리 박사의 이름을 직접 거명하지는 않은 채 단지 ‘중국계 미국인’이 핵기밀 절취 사건 용의자로 떠올랐다고 보도했다. <뉴욕 타임스>의 보도가 나간 뒤 <워싱턴 포스트> <로스앤젤레스 타임스>를 비롯해 ABC·NBC·CBS 등 방송 매체까지 벌떼처럼 취재 경쟁에 뛰어들어 리 박사를 둘러싼 핵기밀 절취 사건이 미국 정가의 최대 쟁점으로 떠올랐다.

문제는 <뉴욕 타임스> 보도가 나간 다음날 발생했다. 연방수사국(FBI) 수사관 2명이 리 박사의 집에 들이닥쳐 신문 보도를 들이밀며 압박한 것이다. 급기야 빌 리처드슨 에너지장관은 3월8일 리 박사를 전격 해고했다. 이어 4월10일에는 수사당국이 리 박사의 자택을 급습해 문제의 핵기밀 자료가 저장된 컴퓨터 디스켓을 모두 압수했다. 이어 5월26일 공화당의 크리스토퍼 콕스 의원이 이끄는 핵기밀 절취 조사단이, 중국이 20여 년에 걸쳐 미국으로부터 핵기밀을 훔친 내역을 담은 방대한 보고서를 발표했다. 특히 연방 의회를 장악한 공화당은 리 박사를 기소해 중국이 핵기밀을 손에 넣은 진상을 밝히라고 행정부에 연일 압박을 가했다. 그러나 검찰측의 딜레마는 그를 기소하려 해도, 그가 중국에 핵기밀을 넘겼다는 혐의를 입증할 구체적인 증거가 없다는 데 있었다. 결국 그를 기소할 것이냐 여부를 둘러싼 논쟁은 지난해 12월4일 샌디 버거 백악관 안보보좌관이 주재한 대책회의에서도 뜨거웠다. 그로부터 정확히 엿새 뒤인 12월10일 리 박사는 스파이 혐의만 빼놓고 적용 가능한 죄목을 다 열거한 59가지 혐의로 연방 법무부 소속 검사에 의해 기소되었다.
그런데 문제는 기소 직후부터 터졌다. 일부 기소 내용이 사실과 다르다고 드러난 것이다. 이를테면 수사당국은 리 박사가 훔친 비밀 문건이 핵기밀의 ‘정수’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최근 의회 청문회에 출석한 로스 알라모스 연구소의 일부 과학자들은 리 박사가 절취했다는 핵기밀 상당수가 실은 핵 관련 학회지에 이미 발표되었거나 인터넷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것이라고 증언했다. 설상가상으로 이번 수사의 책임자인 연방수사국 로버트 메스머가 지난해 12월 법원에서 증언한 내용마저 허위로 드러났다. 당시 메스머는 리 박사가 해외 연구소에서 일자리를 구하려는 목적으로 핵기밀을 빼내는 과정에서 구직 요청서를 해외 연구소에 보냈다고 증언했는데, 이 내용이 허위임을 최근 법정에서 자백한 것이다.

때문에 당초 이런 증언에 근거해 리 박사에게 보석을 허가하지 않았던 파커 판사는 지난 8월 하순부터 검찰 당국의 기소 행위를 문제 삼기 시작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결국 원고인 연방 법무부는 선수를 쳤다. 리 박사가 핵기밀 절취와 관련한 일체 행위에 대해 수사당국에 모든 것을 밝히면 기소를 기각하겠다고 유죄 답변 거래를 제안했고, 이를 리 박사 변호인단이 받아들인 것이다.

처음 수사당국의 압박이 밀려오던 1997년 여름을 기점으로 지난 3년간 난리 법석을 피운 리 박사의 핵기밀 절취 사건은 싱겁게 끝났다. 그러자 최근 미국 주요 언론들은 리 박사 사건이 그처럼 확대된 데는 ‘인종적 편견’이 작용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지적해 관심을 끈다. 실제로 로스 알라모스 연구소에서 방첩 부서 책임자로 있다가 은퇴한 로버트 브루먼 씨는 지난 8월 의회 청문회에 출석해 ‘핵기밀을 접할 수 있는 백인 과학자가 많았지만 유독 리 박사가 인종적 이유로 수사 대상에 올랐다’고 증언해 충격을 주기도 했다. 또 연방수사국에서 대중국 방첩담당 국장을 지낸 폴 무어 씨도 9월 초 아시아계 출신으로 이루어진 연방의원 친목회 모임에 나와 ‘인종에 따른 신상 기록’ 작업이 지금도 방첩 관련 수사 과정에서 공공연히 행해지고 있다’고 폭로하기도 했다. 이같은 주장에 대해 리처드슨 에너지장관은 말도 안되는 소리라고 일축했지만, 그의 말을 액면 그대로 믿는 아시아계 미국인은 별로 없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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