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재계 양대 가문 ''합방설'' 내막
  • 도쿄/채명석 (cms@sisapress.com)
  • 승인 2000.05.1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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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단체 라이벌 게이단렌·닛케렌, 빠르면 내년 5월 통합…산업구조 개혁 따른 자구 노력 일환
일본 재계에도 통합 바람이 거세게 불고 있다. 닛케렌(日經連·일본경영자단체연맹)의 오쿠다 히로시(奧田碩) 회장은 최근 기자회견에서 재계의 양대 산맥인 게이단렌(經團連·경제단체연합회)과 통합하는 문제를 질문받고 “경제단체가 각각 인적·물적·금전적 낭비를 덜기 위해 조직 축소와 효율화를 위해 노력하는 것은 당연하다”라고 말해 게이단렌과 통합할 의사가 있음을 정식으로 밝혔다.

오쿠다 회장의 이 발언에 따라 일본 재계를 대표하는 두 단체는 통합 검토 팀을 발족해 올 여름에 구체적인 안을 마련할 방침인 것으로 알려졌다. 두 단체는 빠르면 내년 5월께, 늦어도 게이단렌 이마이 다케시(今井敬) 회장의 임기가 끝나는 2002년 5월까지 통합할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두 단체는 이미 3년 전부터 궁합을 보아 왔다. 도요타 자동차 명예회장 도요타 쇼이치로(豊田章一郞)가 게이단렌 회장을 맡고 있던 1997년 여름, 4개 경제단체의 하나인 게이자이도유카이(經濟同友會)와 재계 통합을 검토하게 된 것이 그 시초이다.

도요타 회장은 4개 경제단체 중 ‘상공회의소 법’에 의해 설립된 일본상공회의소를 제외한 게이단렌·닛케렌·게이자이도유카이가 세 단체의 상부 조직 격인 지주회사를 설립해 재계를 통합하자는 안을 두 단체의 지도부에 제시했다. 그러나 당시의 네모토 지로(根本二郞) 닛케렌 회장이 원천적인 반대론을 전개해 지주회사 설립 계획은 불발로 끝났다.


“불황인데 재계 단체 너무 많다”

그러다가 지난해 네모토 회장이 물러나고 도요타 자동차 출신인 오쿠다 씨가 닛케렌 회장에 선출되자 분위기가 호전되었다. 재계 통합의 선봉장인 도요타 씨와 오쿠다 회장이 같은 도요타 자동차 출신이기 때문이다. 오쿠다 회장은 ‘재계 단체가 너무 많다’는 도요타 회장의 주장에 일찍부터 공감해 온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도요타 씨의 뒤를 이어 게이단렌 회장에 선출된 이마이 회장은 철강회사인 신닛데쓰(新日鐵) 회장 출신이다. 하지만 그 역시 전임 회장인 도요타 씨로부터 재계 통합을 신탁받은 상태이다. 그래서 이마이 회장도 회장 취임 직후부터 재계 통합에 남다른 열정을 쏟아온 것으로 알려졌다. 이렇게 보면 도요타 씨를 둘러싼 인맥 관계가 재계의 양대 산맥이자 라이벌 관계이던 게이단렌과 닛케렌의 통합을 크게 앞당긴 셈이다.

일본 언론들에 따르면, 만약 두 단체가 내년 5월 통합에 합의하게 되면, 게이단렌의 이마이 회장이 새로운 경제단체의 회장을 맡게 될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이마이 씨의 게이단렌 회장 임기가 2005년 5월까지이기 때문에 그의 임기는 길어야 1년이다. 그 다음은 닛케렌 회장인 오쿠다 씨가 회장 직을 이어받을 예정이며, 통합이 늦어질 경우에는 오쿠다 씨가 새로운 경제단체의 회장에 바로 선출될 가능성도 없지 않다.

그렇다면 일본 최대의 제조업체인 도요타 자동차를 이끌고 있는 도요타 씨가 3년 전 재계 통합을 결심하게 된 동기는 무엇일까.

앞서 말한 것처럼 일본의 재계는 현재 네 단체로 나뉘어 활동하고 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영향력이 큰 단체는 두말할 나위 없이 ‘재계의 총본산’으로 불리는 게이단렌이다.

게이단렌은 일본이 패전한 직후인 1946년 8월 일본경제연맹회 등 네 단체가 모여 발족한 경제단체연합회이다. 현재 일본의 대표적 대기업 1천13개와 무역·금융·제조업 등 주요 업종별 1백19개 단체가 회원으로 가입해 있다. 한국의 전경련(전국경제인연합회)처럼 대기업 위주로 운영되는 특성을 지니고 있다. 닛케렌은 경영자 단체의 전국 조직으로 게이단렌 설립 2년 후인 1948년 발족했다. 현재 철강연맹 등 업종별 단체 60개와 47개 지방자치단체에서 활동하고 있는 경영자협회 1백7개 단체가 회원으로 가입해 있다.

게이단렌은 발족 직후 일본의 재군비 계획을 작성하고, 자유당과 민주당의 보수 합동을 공작하는 등 정치에도 깊숙이 관여했다. 1955년 보수 합동으로 탄생한 자민당 정권을 응원하기 위해 국민정치협회라는 정치 헌금 단체를 만들어 회원사로부터 거두어들인 막대한 정치 자금을 자민당에 제공해 왔다. 이 때문에 일본에서는 한때 게이단렌 회장을 ‘재계 총리’라고 불렀다.

반면 닛케렌은 ‘재계의 노무부’라는 이름으로 회자되어 왔다. 닛케렌은 본래 노동조합의 세력 확대에 불안을 느낀 경영자들이 노동쟁의와 단체교섭에서 경영권을 사수하기 위해 설립한 경제단체이다. 이에 따라 닛케렌은 매년 되풀이되는 봄철 임금인상투쟁인 ‘순토(春鬪)’에서 노동조합측의 임금 인상 요구를 억제하는 활동에 주력했다.

그러나 시대의 변천과 더불어 일본을 대표하는 두 경제단체의 위상은 급속도로 하락하고 있다. 정치 헌금을 배경으로 일본 정계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해 온 게이단렌은 스스로 정당에 대한 기업 헌금 알선을 폐지한 이후 재계의 총본산이라는 위세를 잃었다.

전문가들도 게이단렌이 재계에 호의적인 정권을 창출하는 데 개입하거나 대기업들의 권익만을 옹호하는 단체에서 각종 경제 정책을 제언하거나 의원입법에 조언하는 두뇌집단 기관으로 거듭나야 한다고 충고하고 있다.

‘재계 노무부’라고 불리던 닛케렌의 위상도 이전과 다르다. 격렬한 스트라이크로 ‘순토’의 계절이 찾아왔다는 것을 알리던 일본의 노동조합들이 대화와 협조 노선으로 선회함에 따라 닛케렌의 역할도 크게 줄었다. 닛케렌은 이에 따라 최근 노동 문제에 관한 정책을 내놓거나 인재 교육과 교육 개혁 정책을 제언하는 데 힘을 기울이고 있다.

전문가들은 그러나 네 경제단체가 어떤 문제에 대해 비슷한 정책을 경쟁적으로 내놓는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 반문한다. 실제로 경제단체 4개를 운영하는 데 회원 기업들이 부담하는 인적·물적·금전적 손실도 엄청나다.

예컨대 신닛데쓰는 이마이 회장을 게이단렌에 파견하고 있을 뿐 아니라, 바로 밑의 사장을 게이자이도유카이(부대표 간사)와 일본철강연맹(회장)에도 파견하고 있다. 또 도요타 자동차는 오쿠다 회장을 닛케렌에 보낸 데 이어 순번으로 돌아오는 차기 일본자동차공업회 회장 직도 오쿠다 회장에게 맡겨야 할 처지이다.

다른 회사들도 사정은 마찬가지이다. 예컨대 지사장이나 지점장을 지방에 파견하면 각종 경제단체의 지방 조직 간부를 겸임해야 한다. 이 때문에 회원사 간에 본업을 챙길 시간도 없다는 불평이 커지고 있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은행 통합으로 재벌 울타리 무너진 것도 요인

불황이 장기화하고 있어 기업들이 여러 경제단체에 내야 하는 회비도 만만치 않다. 회장을 배출한 기업은 연간 억 단위에 이르는 회비뿐 아니라 다른 필요 경비도 부담해야 한다. 그런데 내부적으로 심각한 구조 조정을 추진하고 있는 마당에 경제단체에 내는 각종 회비를 호황 때처럼 선선히 부담할 처지가 못된다. 그래서 불황의 끝이 보이지 않았던 3년 전 재계를 통합해야 한다는 소리가 터져 나온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분석한다

산업계에 불고 있는 재편 바람도 재계 통합을 촉진하고 있는 큰 요인이다. 특히 일본의 거대 기업집단을 받쳐 온 재벌계 은행 간에 통합·합병이 일어나 재계 판도가 크게 바뀌고 있다. 주력 은행의 통폐합으로 미쓰비시·미쓰이·스미토모와 같은 옛 재벌 집단의 울타리가 무너져 내리고 있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산업계의 이런 변화를 수용할 수 있도록 재계의 틀과 형태가 크게 달라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한 재계를 개혁해야 하는 이유로 일본의 산업 구조가 중후장대(重厚長大)에서 경박단소(輕薄短小)로, 나아가 IT 산업으로 그 중심이 변하고 있는 현실도 강조한다.

정경 유착의 대명사였던 일본의 재계가 어떤 모습으로 환골탈태하게 될는지는 아직 모른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일본의 재계가 개혁을 위해 첫 삽을 떴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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