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스크바는 워싱턴을 믿지 않는다
  • 워싱턴·卞昌燮 편집위원 ()
  • 승인 1999.11.0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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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탄도미사일금지조약 개정 제의 러시아 “군비 경쟁 초래” 사실상 거부
지난 1월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은 보리스 옐친 러시아 대통령에게 은밀히 편지를 보냈다. 골자는 미국이 72년 옛 소련과 맺은 탄도미사일금지조약(ABM)을 개정하자는 것이었다. 그 가운데는 만일 러시아가 협상에 응할 경우 현재 러시아가 시베리아 이르쿠츠크 지역에 미사일 추적 레이더 시스템을 구축하는 데 드는 비용을 미국 정부가 제공하겠다는 내용도 포함되어 있다.

탄도미사일금지조약은 흔히 전략무기제한협정(SALT)과 함께 냉전 시절의 양대 군축 협정이라고 일컫는다. 이 조약의 핵심은 미국과 러시아가 서로 미사일 방어 체계 건설을 제한함으로써 공세적 차원의 미사일 위협을 줄이자는 것이다. 그런데 바로 이 조약 재협상을 위해 미국이 지난 봄부터 은밀하고도 끈질기게 러시아를 상대로 로비를 한 사실이 최근 밝혀졌다.

<뉴욕 타임스> <워싱턴 포스트> 등 주요 언론을 통해 폭로된 내용은, 무엇보다 군축 협정과 관련해 미국 외교 목표가 국내 정치에 휘둘리는 모습을 드러냈다는 점에서 시사점이 적지 않다. 사실 이번에 클린턴 행정부가 재협상에 적극 나서게 된 것도 실은 국가미사일방어체계(NMD) 법안을 통과시킨 연방 의회의 압력이 크게 작용했다. 국가미사일방어체계 자체가 탄도미사일금지조약을 위반하는 것이기 때문에 미국 정부로서는 러시아에 재협상을 요구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주요 언론을 통해 ‘기밀’이 새어 나가자 미국 정부 고위 관리들도 보도 내용을 기정사실화하는 분위기다. 존 포데스타 백악관 비서실장은 지난 10월17일 ABC 방송에 나와 “미국이 국가미사일방어체계 건설을 위해 탄도미사일금지조약을 수정할 필요가 있을지 모른다”라고 말했다. 또 윌리엄 코언 국방장관은 지난 1월 러시아가 재협상을 거부할 경우 미국이 일방적으로 조약 파기를 검토해야 한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현재 미국 정부가 러시아에 이 조약 재협상과 관련해 내세운 표면적인 이유는 이렇다. 미국과 러시아가 72년 조약을 체결할 때만 해도 서로가 자국 영토 안에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을 요격할 미사일 방어 체계를 건설하지 말자는 것이었는데, 미국 처지에서 보면 요즘 사정이 바뀌었다는 것이다. 그 사정이란, 미국이 다음 세기에 북한·이란·이라크 등 일부 ‘불량 국가’로부터 탄도 미사일 공격을 방어하기 위해서는 전국적 규모의 미사일 방어 체계 건설이 불가피하다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미국은 이같은 미사일 방어 체계가 방어 차원의 ‘제한된 능력’만을 갖게 될 것이라고 러시아를 설득하고 있다. 그런데 미국의 이같은 국가미사일방어체계 건설이 사실상 탄도미사일금지조약을 위반하는 것이므로, 개정 문제를 협상해 보자는 것이다.

미국, 재협상 대가로 파격적 선물 제시

미국이 러시아에 설명한 국가미사일방어체계 계획에 따르면, 1단계로 2005년까지 미국은 알래스카에 초강력 레이더 기지를 건설해 요격미사일을 최고 100기 배치하고, 그린랜드·영국과 미국 동서부 해안에 배치된 기존 조기 경보 레이더 시설을 현대화한다는 것이다. 이런 방어망이 구축되면 기술 수준이 떨어지는 적국의 탄도미사일을 능히 막아낼 수 있다는 것이다.

이처럼 1단계 방어 체계가 완성되면 2010년까지 노스다코다 주 그랜드 포크스 지역에 알래스카 레이더 기지와 비슷한 미사일 방어 시설을 짓고, 요격미사일 100기를 배치하겠다는 것이다. 이처럼 2단계 방어망이 구축되면 미국은 핵탄두를 실은 적국의 탄도미사일이 침공해도 능히 대처할 수 있다는 논리다.

미국의 이같은 방어 논리에 대해 러시아 반응은 부정적이다. 우선 옐친 대통령은 클린턴의 서한을 접수한 지 9개월이 넘도록 아직껏 긍정적인 신호를 보내지 않고 있다. 오히려 러시아는 재협상론 뒤에 미국의 ‘불순한’ 국내 정치 목적이 깔려 있지 않느냐 하는 회의적인 눈길을 보내고 있다. 이를테면 미국이 북한을 대표적인 탄도미사일 잠재 위협국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과장이라고 본다. 즉, 북한은 모든 면에서 볼 때 아직은 미국 본토를 공격할 수 있는 대륙간탄도미사일 발사 능력을 확보하지 못했고, 앞으로 그렇게 되려면 상당 기간이 소요될 텐데도 미국이 호들갑을 떠는 이유를 알 수 없다는 것이다.

특히 러시아 군사 전문가들이 가장 우려하는 부분은 전략 핵균형 붕괴 가능성이다. 즉 미국이 막강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다음 세기에 1백5억 달러에 이르는 천문학적인 돈을 들여 국가미사일방어체계를 구축해도, 러시아는 경제난 때문에 그같은 방어 체계를 세울 형편이 못된다는 것이다. 그럴 경우 러시아는 궁여지책으로 냉전 시절의 대표적인 대륙간탄도미사일인 SS-18이나 개량형인 Topol-M 미사일을 재배치할 수밖에 없다. 이는 미국과 승산 없는 군비 경쟁을 하는 것이다. 옛 소련이 무너진 원인 가운데 일부가 바로 천문학적인 군비 경쟁이었음을 감안할 때 러시아의 고민이 근거 없는 것은 아니다.

여기서 주목할 사실은 미국이 탄도미사일금지조약 재협상론을 내세우면서 러시아에 내민 이런저런 보상책이다. 미국은 러시아의 극심한 반발을 미리 의식한 듯, 선물 보따리도 크게 준비한 듯하다. 우선 시베리아 이르쿠츠크에서 서북 쪽으로 100㎞ 떨어진 미셀프카에 대규모 미사일 추적 레이더 기지를 건설하는 데 수백만 달러를 지원하겠다는 것이다. 동남향으로 설계된 이 레이더 기지가 완공되면 북한을 포함한 아시아 대부분이 레이더 추적 범위 안에 들게 된다. 미국은 또 아제르바이잔의 리야키에 설치된 레이더 기지를 현대화하는 데 드는 비용도 대겠다고 제안했다. 미국은 이 기지가 아제르바이잔 영토에 있다는 점을 감안해 러시아에 공동 관리를 제안했는데, 아제르바이잔 정부가 이를 승낙할지는 알 수 없다.
러시아 “냉전 시대로 돌아가자는 것인가”

그밖에도 미국이 러시아에 제시한 보상책을 보면, 미국내 조기 경보 레이더 기지에 대한 러시아 관리 방문 허용, 앞으로 국가미사일방어체계 구축 계획에 따라 알래스카에 건설될 레이더 기지가 보유할 자료에 대한 접근 허용, 각종 요격미사일 시스템에 대한 컴퓨터 공동 모의 실험 등이 있다.

그러나 러시아는 이같은 미국의 제의가 매력적이기는 해도, 탄도미사일금지조약을 미국에 유리하게 재협상하면서까지 받아들일 만한 것은 아니라는 입장이다. 러시아 군축 문제 전문가인 베르데니코프는 <뉴욕 타임스>와 가진 인터뷰에서 “기본적으로 협상의 문은 열어놓고 있지만, 이것이 탄도미사일금지조약을 변경하는 것을 의미한다면 ‘절대 불가’라는 것이 러시아의 기본 입장이다”라고 설명했다. 또 블라디미르 야코블레프 러시아 전략미사일부대 사령관은 미국이 기어코 국가미사일방어체계를 건설할 경우 “또다시 냉전 시대와 같은 군비 경쟁이 일어날지 모른다”라고 경고했다.

물론 경제난에 허덕여 온 러시아 국민이야 국가미사일방어체계 문제에 별 관심을 보이지 않을지 모르지만, 러시아 정치인들에게는 핵심적인 국가안보 문제일 뿐 아니라 나라의 위신과도 직결된 사안이다. 따라서 이 문제와 관련해 러시아 정부가 수수방관하는 자세를 보였다가는, 우파 민족주의자들이 핵 억지력 균형 차원에서 대응책을 마련하라고 압력을 가할 가능성도 있다. 최근 러시아 하원 격인 두마가 2단계 전략무기제한협정을 거부한 것도 그런 분위기를 그대로 보여준 것이다. 이 협정이 통과되면 러시아의 핵탄두는 6천개에서 3천개로 줄어든다.

러시아, 중국과 연합해 미국에 맞설 방침

러시아 정부는 미국이 탄도미사일금지조약을 위반하면서까지 국가미사일방어체계 건설을 강행할 경우 중국과 공동 전선을 구축해 강력히 대응할 방침이다. 중국은 늦어도 2015년까지 미국 본토를 공격할 수 있는 대륙간탄도미사일을 수십 기 보유할 것으로 전망된다. 따라서 아직도 핵탄두를 6천개나 가진 러시아가 중국과 연대해 강력히 대응할 경우 미국의 국가미사일방어체계는 무용지물이 될 것이라는 견해가 상당히 우세하다.

미국 정부는 논란의 초점이 되고 있는 국가미사일방어체계 건설에 관해 최종 승인 여부를 결정하지 못했다. 클린턴 대통령은 1백5억 달러라는 엄청난 비용이 들어가고, 기술의 완벽성에 대한 확신이 아직 없으므로, 러시아 등 반대국의 의견을 종합 판단해 내년 6월까지 결론을 내릴 방침이다. 그러나 러시아는 본질적으로 미국의 이같은 계획을 83년 레이건 대통령이 제안했던 우주 미사일 요격용 시스템인 ‘스타워스 계획’의 재판이라고 보고 탄도미사일금지조약을 위반한 것으로 간주한다. 따라서 국가미사일방어체계 건설을 이유로 미국이 러시아에 내건 탄도미사일금지조약 재협상론에는 앞으로 적지 않은 진통이 따를 것으로 예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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