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첸에 깊어지는 ''전쟁의 늪''
  • 모스크바·이건욱(자유 기고가) ()
  • 승인 2000.02.10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러시아·체첸 전쟁 장기화… 푸틴, 대통령 자리 노려 맹공 지시
지난해 가을부터 체첸에서 벌어지고 있는 러시아의 군사 작전은 당초 예상과 달리 장기전으로 흐르고 있다. 1차 체첸 전쟁에서 막대한 피해를 본 러시아가 신중해진 것도 한 원인이지만, 체첸 반군이 지형 지세를 이용해 탁월한 전술을 펼치고 있는 것도 중요한 요인이다. 게다가 미국을 위시한 서방 세계가 러시아를 견제하고, 빈 라덴을 비롯한 이슬람 테러 세력이 체첸 반군을 아낌없이 지원해 이번 전쟁은 언제 끝날지 누구도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 되어 버렸다.

전쟁을 반대하는 러시아의 참전용사어머니회는 1천1백여 명이 전사하고 3천명이 부상했다는 러시아 당국의 공식 발표와 다른 통계 수치를 내놓았다. 이미 3천명이 전사했고, 5천명이 넘게 다쳤다는 것이다. 게다가 얼마 전 체첸의 수도 그로즈니에서 작전을 수행하던 미하일 말로페예프 준장이 실종되어 생사를 확인할 수 없게 되는 등 전황은 러시아에 유리하다고 볼 수 없다.

하지만 이번 전쟁으로 러시아에서 스타가 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 직무대행은 오는 3월26일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하기 위해 군부에 맹공을 지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최소한 수도 그로즈니에는 입성해야겠다는 복안이다.

그로즈니에서 치열한 접전이 계속되고 있는 요즘 이타르-타스 통신에 의하면, 체첸 반군 야전 지휘관 4명이 현재 모스크바에서 러시아 연방군과 투항 협상을 진행 중이라고 한다.

‘하얀 스타킹’ 생포로 체첸 여성 용병 실체 드러나

하지만 러시아 연방군의 사기는 형편없다. 정예 호위대를 거느린 장성이 생사를 확인할 수 없게 된 것은 병사들에게 적지 않은 충격을 주었다. 현지 언론은 러시아군의 사기를 염려해 전사했는지 포로가 되었는지 밝히지 않고 있다.

또한 일간 <이즈베스티야>는 1월14일 머리 기사로 그로즈니에서 시가전을 벌이다 부상해 식물 인간이 된 한 병사의 사진을 실었다. 이 병사의 목에는 인식표가 걸려 있었지만 어느 부대 누구인지 알 수 없었다. <이즈베스티야>가 국방부 등 관련 기관에 신원을 조회했으나 전혀 기록되어 있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국영 방송 ORT에 의뢰해 뉴스 시간을 통해 전국에 방송을 내 보낸 뒤에야 그 병사의 친척으로부터 연락을 받아 신원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 사건을 지켜본 전선의 병사와 징집을 기다리는 젊은이들 그리고 그들의 가족은 국가의 안일한 조처에 아연실색했다. 이에 대해 국방부는 장교에게만 인식표를 주다가 1차 체첸 전쟁 이후 전선에 나가 있는 일반 사병에게도 나누어 주었는데, 아직 체계가 잡히지 않은 탓에 행정 사고가 일어났다고 해명했다.

하지만 국방부의 해명을 믿는 러시아 국민은 거의 없다. 일반 국민은 장군이 실종해도 생사를 모르고 병사가 다쳐도 어느 부대 소속인지 모를 정도의 상황이라면 이번 전쟁 또한 1차 체첸 전쟁처럼 엄청난 피해를 남긴 채 끝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감을 떨치지 못하고 있다.

한편 최근 전투에서 러시아군과 경찰 20여 명을 사살한 우크라이나 출신 여자 저격수 엘레나가 생포됨으로써 러시아는 물론 전세계적으로 체첸의 여성 용병 부대 ‘하얀 스타킹’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그동안 체첸 반군에 여성으로 구성된 용병 부대가 존재하는지에 대해 추측이 엇갈렸는데, 엘레나가 생포됨으로써 실체가 드러나게 되었다. 아직 심문 결과가 나오지 않아 자세한 사실은 알 수 없으나, 여성 용병은 1차 체첸 전쟁 때부터 존재한 것으로 알려졌다. 여성 용병은 대부분 강인한 정신력과 집중력을 요하는 사격을 전공한 운동 선수들이며, 발틱 3국과 우크라이나 출신이 대다수를 차지한다고 한다. 하지만 전체 여성 용병의 숫자는 1차 체첸 전쟁 때보다는 훨씬 적다고 한다.

현재 다른 이슬람 국가들이 원조 의사를 거듭 밝히고 있지만, 체첸 국경이 완전히 봉쇄되어 실현되지 못하고 있다. 군수 물자는 물론 현금조차 들어가지 못해 우크라이나와 발틱 3국의 비 이슬람 용병에게 줄 돈이 없다고 한다. 실제로 이번에 연방군에 생포된 엘레나도 1995년에 돈을 벌기 위해 체첸 용병 부대에 입대했지만 전장에서 만난 체첸 반군 장교와 결혼해 생포되기 전까지 남편의 조국을 위해 싸운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러시아 언론은 이러한 여성 용병 부대의 존재에 대해 의구심을 나타내고, 심지어 여성 저격수를 생포했다는 국방부의 발표조차도 미심쩍어 한다. 전쟁이라는 특수 상황에서는 항상 미화한 신화나 전설이 나오게 마련인데 이른바 하얀 스타킹 부대도 이런 신화나 전설의 일부가 아니겠느냐는 것이 현지 언론의 반응이다. 러시아군 전문가들은 체첸 반군을 위해 전세계에서 모여든 용병이 1천5백명이라고 집계했다.
체첸에서도 ‘인종 청소’… 난민 다시 급증

전쟁이 벌어지면 가장 피해를 보는 것은 항상 일반 민중이다. 이번 전쟁에서도 평화롭게 살아가던 체첸 사람들은 고향을 등진 채, 먹을 것도 없는 낯선 땅에서 온갖 불편을 감수하며 살아가고 있다. 현재 인접 공화국인 잉구셰티아에는 그동안 줄어들던 체첸 난민의 수가 다시 급증하고 있다. 하루 평균 2천∼2천5백명이 체첸을 탈출하고 있는데, 비정부기구 ‘메모리얼’의 드미트리 그루슈킨 박사에 따르면, 이러한 현상은 체첸 곳곳에서 자행되고 있는 인종 청소에 따른 것이라고 한다. 이미 1월12일부터 10∼60세 체첸 남성의 국경 이동을 금지했으며, 이러한 조처는 1940년대 스탈린 시대에 체첸인을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시킨 것에 버금가는 사건으로 국내외의 강력한 비판에 직면해 있지만, 러시아측은 개의치 않고 밀어붙이고 있다. 러시아 전역에서 거주 등록이 안되어 있는 체첸 남성은 무조건 체포되어 구금되는 일까지 벌어지고 있다.

이에 대해 블라디미르 루샤일로 내무장관은 “체첸 반군이 난민 사이에 섞여 있어 국경에서 남자의 출입을 막는 것이며, 러시아 전역에서 벌어지는 체포·구금 행위 또한 언제 일어날지 모를 체첸 반군의 테러에 대비하는 차원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라며 국내외 비판을 일축했다.

현재 잉구셰티아 공화국에는 체첸 난민 20여만 명이 피난와 있다고 한다. 그루슈킨 박사는 “난민들의 상태가 매우 열악하며, 러시아 재해대책본부를 비롯한 세계 각국에서 구호품이 답지하고 있지만 도움이 필요한 난민 수에 비하여 턱없이 부족하다. 따뜻한 음식은 하루 한 번밖에 제공되지 않고, 우유는 전혀 배급되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또 텐트가 모자라 난민들이 빈 기차에서 지내고 있으며, 텐트에 있는 사람들도 침대와 생필품이 부족해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덧붙였다. 또한 그들은 전염병에 노출되어 있으나 방역 당국의 장비와 인원이 부족해 그야말로 대책이 없는 상황이다. 체첸 난민은 자기 나라 반군에 대해 적개심을 품고 있지만, 러시아 연방군에 대해서도 몸서리를 치고 있다. 러시아 언론이 한두 차례 연방군이 저지르는 범죄를 언급했는데, 실제로는 매일같이 연방군에게 난민이 피해를 당하고 있으며, 그나마 어느 정도 보호막이 되어 주던 젊은 체첸 남성이 다른 수용소로 격리되면 노인·여성·어린이는 더욱 고통스러울 것이라고 메모리얼 관계자들은 전했다.

특히 러시아의 대공세 전에 그로즈니에 남아있던 민간인을 위해 탈출구를 만들어 주었지만 러시아군이 그 곳에 집중 폭격을 가해 메모리얼 관계자마저 부상하는 등 피해가 극심했다고 한다. 결국 그로즈니에는 수많은 민간인이 오도가도 못한 채 남아 있게 되었다. 이들은 전기와 식수가 끊긴 상태에서 연방군의 공격과 반군의 징집을 피하면서 초조하게 보내고 있다. 1차 체첸 전쟁 때도 연방군의 무자비한 횡포를 보고 자란 청소년들이 지금 체첸 반군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데, 또다시 이런 상황이 되풀이될까 봐 체첸 전문가들은 걱정하고 있다.

하지만 푸틴 대통령 만들기에 나선 러시아의 재벌 소유 언론사들은 이러한 문제를 단지 형식적으로만 보도할 뿐이다. 그들은 난민 문제를 제기하고 나서는 미국 및 서방 세계가 순수한 군사 작전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비난하며 반미 감정과 민족주의를 부추기고 있다.


러시아 언론, 난민 참상 외면… 반미 감정 부추겨

인류의 역사가 시작된 뒤로 전쟁은 거의 매일같이 일어나고 있다. 전쟁의 원인이야 가지각색이지만 그 피해는 항상 패자보다 묵묵히 생업에 종사하는 민간인의 몫이었다. 정작 전쟁을 일으킨 당사자들은 죽는 날까지 호의호식하며 지내고, 아들을 잃고 남편을 잃은 수많은 여인들은 말못할 고초를 겪으며 살았던 현실이 인류 역사의 한 부분이다. 급진적 민족주의자였다는 그루슈킨 박사는 인터뷰 도중 자기가 직접 체첸과 잉구셰티아를 돌아본 후 그 끔찍한 참상에 분노해 반전주의자가 되었다고 고백했다. 그는 수많은 러시아·체첸 인들의 피를 제물로 삼아 대통령이 되어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게 될 푸틴을 보노라면 과연 이 세상에 진리가 존재하는지 의심이 든다고 하면서, 잉구셰티아의 난민촌으로 가는 구호품 수송기에 몸을 실었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