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 한국 학자의 북한 나진시 탐방기
  • 김형아(허주 국립대 교수.정치역사학) (sisa@sisapress.com)
  • 승인 2000.03.0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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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나진시 방문기/사회간접자본 시설 절대 부족, 친절한 시민이 ‘희망’
호주 국립대학 김형아 교수가 북한의 나진·선봉 지대를 최근에 다녀왔다. 지난해 미국 오리건 주 힌 필드 대학 초청 교수로 부임한 김교수는 지난 1월 학기 교육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미국 대학생 14명을 이끌고 서울·베이징·하얼빈·투먼을 거쳐 북한의 나진시에 들어갔다. 김교수는 이곳에서 겪었던 ‘춥고 힘들었던, 그러나 결코 잊을 수 없었던 몇 가지 경험들을 <시사저널> 독자들과 나누고 싶다’며 방문기를 보내왔다.


나진으로 가는 길은 예상보다 훨씬 멀고, 춥고 또 어려웠다. 우리들-필자와 동료 교수 존 핀처(중국 역사 전공) 그리고 미국 대학생 14명-이 두만강을 가로지른 원정리 다리의 중국쪽 검문소에 도착한 것은 1월20일 오전 11시30분. 이미 북한 세관이 오전 업무를 끝마친 지 30분이 지난 뒤였다. 그들은 오후 3시에 다시 업무를 시작한다는 통보 외에는 아무런 설명을 해주지 않았다.그러나 이내 알게 된 사실이지만, 우리와 같은 비상 사태(?)가 생길 때마다 중국인 여행사들은 근처에 거주하는 조선족 가정집을 임시 휴게소로 사용하고 있었다

여기서 만난 인정 많은 조선족 아주머니는 미세스 양이라고 했다. 그녀는 열띤 목소리로 “학생 여러분, 돌아가시면 부디 잊지 말고 가난한 북한 사람들과 어린이들을 어떻게든 도와 주십시오. 이 근처에는 많은 어린이들이 구걸을 옵니다. 헌옷도 좋고 무엇이든 환영합니다. 꼭 잊지 마십시오”라고 말했다.
압수당한 CD 플레이어 되찾느라 애먹어

중국 검문소의 까다로운 입국 심사를 마치고 마침내 원정리 다리를 건너 북한 세관 건물 앞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오후 4시가 다 된 무렵이었다. 북한 세관 앞에서 우리를 맞이한 북한 관광 안내원은 미스터 김이라는 미남형 청년이었다. 그는 거의 완벽한 서울 말씨로 “안녕하세요. 먼 길에 수고하셨습니다”라면서 밝게 웃었다.

우리 일행이 세관에 들어섰을 때, 그 안은 마치 시골 장터 같았다. 검열을 기다리는 사람들로 꽉 차 있었고, 냉랭하기가 건물 밖과 다를 바 없었다. 이 북새통에 세관원 2명이 입국자들의 짐을 일일이 조사하고 있었다. “전기가 나가 스캔을 할 수 없어서 시간이 좀 걸립니다. 양해하고 기다리십시오”라고 그들은 이유를 설명했다.

웃지 못할 사건은 잠시 후 엉뚱한 데서 일어났다. 세관원들이 학생들 가방 속에서 CD 플레이어 9개와 성경책 한 권·포르노 잡지 두 권을 압수한 것이다. “교수 선생, 이 물건들은 통과시킬 수가 없기 때문에 우리가 보관했다가 출국할 때 돌려드리겠습니다.” 그러더니 얼마 후 그들은 나에게 이른바 영수증이라는 것을 주었다.

미국 학생들에게는 CD 플레이어가 일상품이라고 세관원들과 실랑이를 해보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결국 세관 책임자와 담판할 요량으로 조사국이라고 표시가 되어 있는 사무실로 들어갔다. 사무실 안에는 남자 직원 5∼6명이 불도 켜지 않은 채 앉아 있었다. 한 직원이 내 앞으로 왔다. 그리고는 호주머니에서 라이터를 꺼내서 불을 켰다. “걱정마십시오, 제가 책임자입니다. 이 영수증을 출국하실 때 제시하면 물건을 돌려드리겠습니다. CD는 오늘 가져 가셔도 됩니다”라고 그는 정중하게 말했다. 나진으로 가는 길은 그렇게 열렸다. 나는 그 순간 가슴이 뭉클했다. 촛불도 켤 수 없는 각박한 사정이라는 것을 그때서야 몸으로 느꼈다.

원정리 세관에서 버스로 4시간쯤 울퉁불퉁하고 위태로운 빙판 길을 달려 결국 나진시에 도착했다. 밖은 칠흑 같은 어둠에 잠겨 있었다.

저녁을 먹으러 들어간 건물의 출입구는 호텔 연회실처럼 보였다. 테이블마다 가득 차려진 훌륭한 음식들, 한겨울에 해산물 위주로 차려졌는데 이번 여행 기간에 맛본 단연 최고의 요리들이었던 셈이다. 또 연회실 안에는 붉은 색 한복을 곱게 차려 입은 젊은 여성 7∼8명이 대기하고 있었다. 북측이 보여준 그러한 환대 덕분에 긴장감이 풀어지면서 비로소 편하게 서로 웃을 수 있었다.

바로 이 때 자신을 나진시 관광국장이라고 소개한 또 다른 미스터 김이 인사말을 끝낸 뒤 나에게 다가왔다. 그는 나에게 한국계 학생이 누구인지 물었다. 나는 그가 케이트를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케이트는 한국에서 미국으로 이민온 학생이다. 내가 그녀에 대해 설명해주자 그는 “케이트 양, 당신은 조선 사람입니다. 내 누이동생이나 마찬가지이지요. 이 점을 잊지 마세요”라고 말했다.

세 김씨 모두 자신을 관광 가이드·나진시 관광국장·안전국장 등으로 소개했지만, 그들 모두 그리고 운전기사까지도 군대와 관련된 일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라는 점을 알 수 있었다. 그들은 평양에서 대학을 졸업했고 그 중에는 김일성대학 출신자도 있었다.

호텔은 몹시 낡았고, 우리 외에는 거의 손님이 없었다. 그러나 내부는 의외로 아늑하고 따뜻했다. 다만 시설들은 기본적인 것만 갖추어져 있었다. 우리는 뜨거운 물로 샤워하기를 열망했으나 단 한 방울도 구할 수 없었다. 11시쯤 나는 서비스 데스크를 찾아갔다. 데스크 아가씨는 내게 상냥하고 능숙한 솜씨로 대답했다. “물을 끓여드릴 테니 30분만 기다려 주십시오.” 나는 기꺼이 기다렸고 약속대로 뜨거운 물을 구했다.

나진시는 매우 적막했다. 시내 중심가조차도 사람이 거의 없었다. 버스도 눈에 띄지 않았다. 새로 지은 건물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고, 상업 활동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어떠한 징후도 보이지 않았다. 모든 것이 얼어붙었고 음울해 보였다. 길 양 옆으로 외투를 걸친 사람들이 추위를 이기려고 손을 비비며 오갔다. 가끔 트럭 몇 대가 지나갈 뿐이었고 간간이 검은색 리무진이 눈에 띄었는데, 이 사회의 특권 계층들이 타고 있음에 틀림 없어 보였다.

관광 안내원 교육장에 슬롯 머신도

눈 덮인 산길을 지나 비파도로 가는 동안 우리는 나진시의 인상과 대조를 이룰 정도로 밝고 근사한 경관을 접했다. 관광 안내원인 미스터 김의 설명에 따르면, 비파도에서 우리가 점심을 먹은 건물은 관광 안내원들을 교육하는 장소라고 한다. 이 건물의 인상적인 시설 중에서 특히 관광객을 위해 마련된 슬롯 머신이 눈에 띄었다.

버스가 다시 출발한 이후 차창 밖의 눈 덮인 벌판에서 기껏해야 열한 살쯤 되어 보이는 소년이 땔감을 한아름 안고 우리 일행을 호기심 어린 눈으로 쳐다보았다. 그에게는 미국 학생들을 태운 이 버스가 매우 특별한 광경으로 비쳤을 법하다.

나진시 외곽의 집들은 매우 낡고 비바람에 풍상을 겪은 모습들이었다. 전체적으로 황폐하고 사회간접자본 시설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현재 가동되고 있는 거의 유일한 공장인 나진의 정유공장 역시 가동률이 평균치를 밑돌았다.


개명한 지도자가 필요하다

그들이 처한 물리적 환경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친절한 모습에서 강한 인상을 받았다는 점을 강조해야 할 것 같다. 함께 간 미국 대학생들 역시 비슷한 인상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우리를 안내했던 세 김씨는 실내에서는 매우 조심스럽게 행동했지만, 일단 밖에 나가거나 버스 안에서는 여러 가지 주제에 대해 놀랄 정도로 개방적인 태도를 보여주었다.

이번 여행에서 내가 결론적으로 얻은 인상은, 북쪽 사람들 역시 강인하고 친절하고 낙관적인 조선 사람의 특성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또한 남쪽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그들 역시 자신들의 사회를 번영으로 이끌 역량을 충분히 가지고 있었다. 다만 그들에게는 바깥 사정에 밝은 개명한 지도자와 자원이 필요한 것 같았다. 그 자원을 지원하는 일은 세계의 발전된 국가들이 맡아야 할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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