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황금 연휴를 난자한 17세들의 칼부림
  • 도쿄·蔡明錫 편집위원 ()
  • 승인 2000.05.2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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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두 고교생 살인·납치극에 ‘경악’… 범인 공통점은 ‘이지메’ 피해자
17세 소년들이 일본의 ‘황금 연휴’를 피로 물들였다.

일본에서는 4월 말에서 5월 초까지 연휴가 겹치는 시기를 골든 위크(황금 연휴)라고 부른다. 해마다 이 때가 되면 일본에서는 민족 대이동이 시작된다. 올해는 어린이날이 금요일이어서 토·일 요일을 합치면 연휴가 1주일 이상으로 늘어나 해외 여행객과 국내 행락객 수가 사상 최고를 기록했다. 그러나 대다수 일본인은 연휴 때 일어난 두 가지 흉악 범죄 때문에 모처럼의 대형 연휴를 즐길 기분이 아니었다.

황금 연휴가 막 시작된 지난 5월1일 저녁, 아이치(愛知) 현 도요가와(豊川) 시에서 65세 할머니가 식칼로 40 군데 이상을 찔려 살해되었다. 경찰은 현장에 남아 있던 책가방 등 증거품을 조사한 결과, 도요가와 시의 유명 사립 고등학교 3학년 A군을 유력한 용의자로 단정했다.“사람 죽이는 경험을 해보고 싶었다”

올해 열일곱 살 난 소년은 할머니의 남편에게도 식칼로 상해를 입힌 후 달아났다가 이튿날 경찰에 자수했다. 범행후 기차를 갈아타고 역을 전전했던 소년은 자수하게 된 동기를 “춥고 피곤해서 더 견딜 수 없었다”라고 밝혔다. 그런 뒤 “사람을 죽이는 경험을 해보고 싶었다”라고 충격적인 범행 동기를 털어놓았다.

소년과 살해된 할머니는 일면식도 없는 사이였다. 그러나 소년은 자신의 ‘살인 경험’을 위해 범행 당일 치밀하게 준비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소년은 등교 직전, 도망할 때 필요한 옷가지와 현금 2만 엔을 학교 앞 대밭에 숨겨 놓았다. 학교에서는 평소와 다름없이 수업에 참가했다. 방과 후에는 친구와 함께 편의점에도 들렀다. 그런 다음 ‘살해 대상자’를 물색하다 때마침 대밭을 걸어가고 있던 할머니를 발견하고 그 뒤를 따라가 식칼로 난자한 것이다.

17세 고교생이 사람을 죽이는 경험을 해보고 싶어 일면식도 없는 사람을 살해했다는 뉴스가 각 신문의 1면을 대문짝만한 활자로 장식한 5월3일, 이번에는 17세 소년 B군이 여객 버스를 탈취하고 인질을 살해한 사건이 일어났다.

사가(佐賀)를 출발해 후쿠오카(福岡)로 가던 고속 버스가 소년에게 탈취된 것은 오후 1시 반께이다. 승객들의 증언에 따르면, 한 소년이 갑자기 좌석에서 일어나 식칼을 꺼내들고 버스가 납치되었다는 사실을 알리며 운전사에게 동쪽으로 가자고 요구했다고 한다. 처음에 설마했던 승객들은 소년의 명령에 반발한 한 승객이 칼에 찔리자 사태가 심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소년은 그 후에도 한 승객이 탈출하자 연대 책임이라며 남아 있던 승객을 찔렀다.

탈출한 승객의 신고로 이런 사실을 알게 된 경찰은 납치된 버스를 추적해 범인이 고교를 중퇴하고 정신병원에 입원해 있던 소년이라는 것을 알아냈다. 경찰은 소년의 부모를 버스 납치 현장으로 불러내 아들을 설득하도록 요구했으나, 부모는 자신이 없다며 응하지 않았다. 경찰은 결국 특공대를 투입해 버스가 납치된 지 15시간 만에 범인을 체포했다.

소년의 납치극은 텔레비전을 통해 전국으로 생중계되었다. 승객 1명이 살해되고 5명이 부상한 사실도 중계 방송을 통해 전해졌다. 행락 분위기에 들떠 있던 많은 일본인이 발을 동동 구르며 이 납치 드라마를 지켜보았다.

흥분한 일부 사람은 왜 범인을 사살하지 않느냐고 경찰과 매스컴을 닥달했다고 한다. 그러나 대다수 사람은 착잡한 심정으로 왜 미국처럼 청소년들의 흉악 범죄가 다발하는 사회가 되었는지를 자문했다. 연거푸 흉악 사건을 일으킨 17세 소년들은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보통 소년이었기 때문이다.

소년 A는 부친이 중학교 선생이다. 부모가 이혼하기는 했지만 대신 자산가인 조부모의 사랑을 흠뻑 받고 자랐다. 학교 성적도 우수했다. 그가 다니던 사립 고등학교는 일류 대학 진학률이 높은 그 지방의 명문 고교이다. 소년 B 역시 유복한 가정에서 자랐다. 부친이 회사원이고 모친은 간호사이다. 공부도 잘했다. 비록 고교를 중퇴했지만, 그가 입학했던 고교 역시 경쟁률이 높은 명문 고교였다.

그렇다면 왜 이런 보통 소년들이 흉악 범죄를 저지르게 되었는가. 두 소년의 공통점은 ‘이지메 경험’이다.

소년 B는 중학교 3학년 때 학교 계단에서 뛰어내리다 척추를 다쳤다. 급우들이 담력이 없는 아이라고 조롱하자 자신의 담력을 과시하기 위해 계단에서 뛰어내리다 다친 것이다. 그는 이 부상 때문에 고교 진학 시험을 집에서 치러야 했으며, 그 여파로 고교를 중퇴했다. 소년 B는 체포된 후 ‘사회에 대한 울분’이 범행 동기라고 밝히면서, 자신이 이지메를 당할 때 학교가 아무런 도움을 주지 않았다고 불만을 토로한 것으로 알려졌다.

전문가들은 소년 A가 부모의 이혼과 조부모의 편애로 유년기 성격 형성에 큰 문제가 있었다고 지적한다. 그러나 그 역시 학교에서 겪은 이지메가 성격을 빗나가게 한 중대한 원인이라는 지적도 만만치 않다.

일본에서는 최근에도 이지메 사건이 빈번히 일어나고 있다. 대표적인 사건은 나고야(名古屋)에서 일어난 ‘5천만 엔 갈취 사건’이다.

보도에 따르면, 나고야의 한 중학교에 다니는 소년 C는 급우 12명으로부터 무려 5천만 엔을 갈취당했다. 처음에는 이지메를 모면하려고 만∼ 2만 엔 정도의 용돈을 상납했으나 금액이 점점 많아져 나중에는 백만∼2백만 엔 단위로 상납액이 늘어났다.이렇게 해서 소년 C가 급우 12명에게 갈취당한 돈은 모두 5천만 엔이 넘는다. 한국 돈으로 치면 5억 원이 훨씬 넘는 돈이다. 놀라운 것은 아들이 급우들의 협박에 시달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모친이 이런 거금을 순순히 소년에게 주었다는 것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5천만 엔 갈취 사건의 주범 격인 소년 D도 실은 이지메의 피해자였다는 사실이다. 이 소년의 부모 주장에 따르면, D는 중학교 입학 직후 급우들로부터 지독한 이지메를 당했다. D는 결국 이지메를 모면하기 위해 등교를 거부하게 되었고, 점차 불량 소년으로 전락해 이런 엄청난 사건을 일으켰다는 것이다.

“청소년 범죄는 가정·학교·사회 공동 책임”

실제로 일본에서 이지메가 원인이 되어 불량 소년으로 전락한 예는 많다. 지금 일본에서 베스트 셀러가 되고 있는 <그러니까 당신도 끝까지 견뎌야 한다>는 책의 저자 오히라 미쓰요(大平光代) 변호사의 경우도 그렇다.

이 책에 따르면, 그녀는 중학교 때 지독한 이지메를 당해 불량 소녀가 되었다. 학교도 부모도 자신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밀지 않고 있다는 절망감에서였다. 그러다가 야쿠자 두목을 만나 결혼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녀는 호스테스 시절 부친의 친구(현재의 양부)를 우연히 만나 갱생의 길을 걷기로 결심했다. 호스테스를 그만둔 그녀는 각종 자격 시험에 도전했는데, 가장 어렵다는 사법시험에도 단 한 번에 합격했다.

“총 대신 식칼을 들었다는 차이밖에 없다.” 이것은 일본의 청소년 범죄를 미국과 비교하면서 한 전문가가 내뱉은 말이다.

청소년 흉악 범죄가 잇달아 발생하자 자민당은 소년법을 개정해 형벌을 강화하려고 검토하고 있다. 형벌 대상 연령을 16세에서 14세로 끌어내려 흉악 범죄를 일으킨 청소년에 대해서는 성인과 똑같은 가혹한 형벌을 부과하자는 것이다.

그러나 형벌을 강화한다고 해서 청소년 범죄가 줄어든다는 보장은 없다. 모리 총리의 자문기관인 ‘교육개혁 긴급회의’는 사건후 청소년들이 자신의 고민을 상담할 수 있는 사회 환경을 정비하는 일이 시급하다는 호소문을 발표했다. 청소년 범죄 증가는 가정과 학교와 사회의 공동 책임이라는 지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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