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리 보고서의 앞날
  • 문정인 (연세대 교수·국제정치학) ()
  • 승인 1999.06.2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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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과 미국 의회 강경파 설득해야 실행 가능
지난 5월 윌리엄 페리 북한 정책 조정관의 북한 방문은 그동안 교착 상태에 빠져 있던 남북 및 미·북한 관계에 새로운 돌파구를 마련한 것으로 평가된다. 비록 김정일 국방위원장과의 면담은 성사되지 않았지만,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과 조명록·김영춘·이용철 등 북한 군부 실세와 만나 현안을 깊이 다루었다는 데 북한 방문의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페리 조정관이 밝혔듯이 그의 북한 방문은 협상을 위한 것이 아니다. 최종 보고서를 미국 의회에 제출하기 전에 북한의 의도를 타진하고, 실현 가능한 북한 정책을 보고서에 담기 위해 예비 탐색한 것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때문에 페리 방북을 한·미·일 3국의 확정된 정책을 북한에 통보하고 북한의 정책 변화를 유도하기 위한 외교 협상으로 간주할 수는 없다.‘페리 구상’은 북한이 거절할 수 없는 ‘당근’

그렇지만 북한에 전달된 페리 구상은 북한이 쉽게 거절할 수 없는 내용을 담고 있다. 금창리 의혹을 해소하고 미사일 시험 발사를 중지할 경우, 대북 경제 제재를 부분적으로 해소함은 물론이거니와, 미·북한 연락사무소와 경수로 본공사 착수를 즉각 이행할 뜻을 분명히했다. 그리고 미사일 수출 및 대량 살상 무기 개발을 중지하고 남북 관계 개선에 전향적 태도를 보일 경우 미·북한, 북·일 관계 정상화를 포함해 대폭적인 대북 경제 지원, 심지어는 국제 사회의 일원으로서 북한 체제를 보장하는 문제까지 암시한 것으로 알려진다.

페리 구상에 대한 북한의 명시적 반응은 없었다. 94년 제네바 합의 이후 미국의 이행 능력에 다소 회의를 품고 있는 북한으로서는 관망하는 자세를 보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페리 방북을 전후해 북측이 여러 경로를 통해 우회적으로나마 화답을 보내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페리가 방북했을 때 보여준 융숭한 환대, 미국의 금창리 조사단에 대한 적극 협조, 남북한 차관급 회담 재개 등은 바로 이같은 전환 국면을 암시하는 대목이라 하겠다.

그러나 문제는 북한측이 의구심을 가지고 있듯이, 포괄적 타결 방안을 주요 골자로 하는 페리 보고서가 의회에 제출된 후, 미국이 실현 가능하고도 일관성 있는 북한 정책으로 순조롭게 전환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이미 한·미·일 3국 간의 긴밀한 사전 협의가 이루어졌고, 중국과 러시아도 포용 정책과 페리 보고서에 긍정적 반응을 보이고 있다. 그리고 북한의 협조도 점차 모습을 드러낼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미국내 정치 구도와 일정으로 보아 페리 보고서를 이행하는 것이 그리 순탄하게 이루어질 것 같지 않다.

페리 보고서가 완성되면 이는 올브라이트 국무장관을 거쳐 클린턴 대통령과 국가안전보장회의(NSC)에 보고되어 최종 조율을 거친 뒤, 하원 외교위원회에 제출된다. 미국 행정부는 의회의 반응에 근거하여 북한 정책을 전반적으로 재조정한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페리 보고서가 담고 있는 정책 내용 대부분이 의회의 인준을 거쳐야 한다는 사실이다. 대북 경제 제재 완화, 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KEDO)를 통한 대북 중유 지원, 대북 경제 원조, 그리고 국교 정상화 등은 의회의 승인을 얻은 뒤에야 실행이 가능해 보수 강경 노선을 걷는 공화당이 다수를 차지한 미국 의회에서 이를 통과시키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북한 조정관제와 페리 보고서를 제안한 벤저민 길먼 하원 외교분과위원장과 콕스 보고서의 주역인 크리스토퍼 콕스 하원 의원 등 의회에서 영향력 있는 공화계 인사들이 강경 노선을 주도하는 현실을 감안할 때, 페리 보고서를 실현하는 데는 난관이 많다. 아미티지 보고서와 미국 입법조사국이 작성한 포용 정책 평가서 등은 미국 의회 내의 이러한 기류를 극명하게 반영하고 있다. 더구나 민주당 의원 중에 북한 포용 정책과 페리 보고서를 위해 ‘총대’를 멜 인사가 없는 것도 큰 악재이다. 토니 홀 하원 의원 등 일부 민주계 인사가 목청을 높이고 있으나 정치적 영향력은 미미하다. 의회, 특히 하원의 반발이 거셀 경우 페리 보고서의 기본 구상이 처음부터 좌초할 가능성도 있다.

공화당의 강경 입장은 2000년 11월로 예정되어 있는 대통령 선거와 깊숙이 맞물려 있다. 민주당은 96년 대통령 선거에서 94년의 미·북한 제네바 합의를 클린턴 행정부의 외교 치적으로 적극 활용해 포용 정책의 중요한 성과로 부각한 바 있다. 반면 공화당은 2000년 선거에서 이러한 민주당 정권의 외교 치적을 집중 공격할 예정이다. 외교 부문에서 주요 공격 대상은 △중국의 인권 문제 및 핵기술 유출 △코소보 사태에 대한 미국의 대응 △북한의 핵개발과 미사일 문제 등에 집중될 것으로 예상된다. 중국의 핵기술 절취 문제와 관련해 공화당은 이미 콕스 보고서 등을 통해 중국에 대한 강경 입장을 재확인하면서 민주당 정권의 중국 정책을 비판하고 있다.

현재 공화당 대통령 후보로 거론되는 인물은 조지 부시 2세, 엘리자베스 돌, 존 매케인 등 6∼7명이다. 이들은 선거 과정에서 민주당의 외교 정책을 집중 비판해 저마다 차별성을 드러낼 가능성이 크다. 특히 존 매케인 상원 의원의 경우 벌써부터 민주당의 북한 포용 정책에 대해 강한 반감을 표시하고 있으며, 94년 제네바 합의 무효화를 강력히 주장하고 있다. 이런 미국내 정치 구도와 관련해 대선 과정에서 페리 보고서에 기초한 북한 포용 정책은 집중 포화를 받게 될 가능성이 크다. 특히, 2000년 대선에서 공화당 후보가 당선될 경우, 민주당이 주도해 온 북한 포용 정책 기조가 전면 재검토될 수도 있다.
페리 보고서 이행되어야 한반도 평화 정착

더욱 우려되는 것은 페리 조정관 후임 선정 문제이다. 이미 페리는 보고서를 제출한 뒤 사임하겠다는 의사를 표명했고, 그 후임으로 올브라이트 국무장관 자문역인 웬디 셔먼이 강력히 천거되고 있다. 셔먼은 한반도나 핵 관련 전문가가 아닌데다 의회내 공화계 인사들에 대한 정치적 영향력도 미미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만일 셔먼이 페리 조정관 후임으로 선정될 경우, 페리 보고서를 이행하는 데 어려움을 자초할 수도 있다. 이와 관련해 로버트 갈루치 핵 대사가 국무부를 떠난 이후 94년 제네바 합의 이행이 지지부진해졌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포용 정책에 기반한 페리 보고서가 실현될 전망이 어두운 것만은 아니다. 미국 정부가 강조하는 전제 조건들, 즉 핵무기와 미사일 개발에 대해 북한이 구체적이고도 진지한 조처들을 취하고 이러한 사태 진전이 민주당 행정부의 외교 정책 성과물로 부각된다면 페리 보고서는 상당한 설득력을 확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남북한 차관급 회담이 총리급으로 승격되고 남북 경제협력이 활성화하면 의회의 강경 분위기가 많이 누그러질 가능성이 있으며, 그 결과 페리 보고서에 담긴 북한 정책들이 의외로 쉽게 의회에서 승인될 수도 있다.

결론적으로 페리 보고서 실행 여부는 가변적이다. 따라서 페리의 방북과 보고서 완료는 대북 현안 종결이 아니라 힘들고 험한 여정의 시작이라고 규정할 수 있다. 이렇게 불투명한 안팎의 상황을 극복하고 포용 정책을 기조로 한 한반도의 평화 공존과 통일 분위기를 성숙시키기 위해서 김대중 정부는 각별한 외교 노력을 전개해야 할 것이다. 특히 미국 행정부는 물론이고 의회의 공화당 강경파에 대해서도 지속적으로 설득 작업을 펼쳐야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페리 보고서 실현을 위해 설득해야 하는 대상은 바로 북한이라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미국의 북한 정책 방향은 궁극적으로 북한의 향후 행보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결국 김대중 정부는 포용 정책을 안착시키기 위해 미국 의회와 북한을 동시에 설득해야 하는 부담을 안고 있다. 이러한 작업의 성공 여부가 페리 보고서를 이행할 추진력을 확보하는 것은 물론이고 한반도의 평화 정착에 주요 관건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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