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 밉보이면‘불량 국가’ ?
  • 워싱턴/변창섭 (cspyon@sisapress.com)
  • 승인 2000.06.1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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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중국 등 핵보유국 놔둔 채 북한 등 특정 국가에만 ‘족쇄’
북한·이란·이라크·리비아. 이들 네 나라 앞에 약방의 감초처럼 따라다니는 딱지가 하나 있다. 바로 ‘불량국(rogue state)’이다. ‘rogue’는 점잖게 표현하면 불량배, 좀 심하게 말하면 제멋대로 이유 없이 행패를 일삼는 ‘깡패’를 가리킨다. 요즘 웬만한 미국 언론 매체가 이런 나라들 앞에 습관적으로 붙이는 수식어가 바로 이 용어이다. 미국 정부 관리들도 마찬가지이다. 윌리엄 코언 국방장관이 국가미사일방어(NMD) 시스템 구축과 관련해 입버릇처럼 떠드는 것이 ‘불량국’의 미사일 위협이다. 과거 냉전 시절 미국의 봉쇄 전략이 소련을 겨냥했다면, 탈 냉전 시절 그 대상은 이들 불량국이다.

문제는 일단 이런 딱지가 붙은 나라가 요즘처럼 미국이 주도하는 국제 체제에서는 온전히 대외 활동을 할 수 없다는 점이다. 이를테면 핵과 미사일 문제로 오래 전부터 미국의 미움을 산 북한은 일부 완화 조처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광범위한 경제 제재를 받고 있다. 10년 전 쿠웨이트를 전격 침공한 죄로 미국은 물론 유엔의 혹독한 제재를 받고 있는 이라크는 말할 것도 없다.

“불량국 용어 자체에 어폐 있다” 비판

그런데 클린턴 행정부가 들어서면서부터 부쩍 사용 빈도가 높아진 ‘불량국’이라는 표현에 문제가 있다는 지적이 최근 소수이기는 하지만 일부 미국의 북한 전문가들 사이에 퍼져 관심을 끈다. 1980년대 후반에서 1990년대 중반까지 <뉴욕 타임스> 논설위원을 지내며 북한 핵 문제에 관해 사설 수십 편을 썼던 레온 시걸 박사는 두 가지 점에서 불량국이라는 개념에 문제가 있다고 지적한다. 우선 러시아·중국·인도·파키스탄·이스라엘은 미국이 정한 불량국 범주에 들지 않는다. 하지만 이들이 핵 확산 위험을 가진 나라라는 점에서 응당 그 범주에 포함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둘째로, 핵이나 미사일 확산 위험이 있는 나라를 악마화하고 불량국으로 몰아 미국이 제재에 나설 경우 오히려 해당국의 반발을 사 문제 해결을 어렵게 한다는 것이다.

백악관의 대외 정책을 사실상 주무르고 있는 국가안보회의(NSC)에서 한때 비확산 담당 책임자를 지냈던 로버트 리트웍 씨의 견해도 마찬가지다. 그는 지난 3월 펴낸 <불량국과 미국 외교 정책>이라는 저서에서 미국 외교관에게 필수불가결한 용어의 일부가 된 불량국이라는 표현에 문제가 있다고 지적했다. 문제의 핵심은 불량국 딱지를 단 나라들의 위협 여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런 딱지를 붙여 관련국들을 한데 묶어놓는 바람에 결과적으로 미국 외교 정책이 왜곡될 소지가 있다는 것이다.

가장 최근의 예가 미국과 러시아가 1년이 넘게 치열한 신경전을 벌이고 있는 미국의 국가미사일방어 시스템 구축안이다. 이와 관련해 <워싱턴 포스트>는 5월29일자 기사에서 전문가들의 말을 인용해, 미국이 국가미사일방어의 명분으로 삼고 있는 불량국의 미사일 위협이 과장되었다고 전하고, 이 용어에 대한 논란을 자세히 소개했다. 지금까지 미국은 미래 어느 시점에 북한과 이란 등 불량국이 장거리 탄도 미사일을 개발해 미국 본토를 공격할 수도 있다고 보고, 이에 대비하기 위해 국가미사일방어 시스템 구축이 필수라는 논리를 줄기차게 내세웠다. 그러나 클린턴 행정부의 북한 정책에 깊숙이 관여해온 한 고위 관리가 <워싱턴 포스트>에 털어놓은 내용은 불량국 문제에 관한 미국의 속내를 잘 보여준다. 이 관리는 ‘북한이 비이성적이기 때문에 국가미사일방어 시스템을 건설해야 한다는 주장은 한마디로 북한을 모르는 소리’라고 주장했다. 1994년 제네바 기본 합의문은 ‘비이성적’이며 ‘불량한’ 북한이 아니라 국익을 냉철히 계산할 줄 아는 ‘이성적’인 북한이 미국과 체결한 협상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리트웍 씨에 따르면, 과거 불량국이라는 말은 단순히 국제 규범을 지키지 않거나 폭압적인 국내 정책을 구사하는 나라를 일컫는 용어였다. 미국은 문제가 있는 제3 세계 나라에 대해서 1970∼1980년대까지는 ‘무법국(outlaw)’이라는 말을 즐겨 사용했다. 불량국이라는 용어가 제철을 만난 것은 1990년대 클린턴 행정부가 들어서면서부터였다. 탈 냉전기에 접어들면서 소련 대신에 북한·이란·이라크·리비아 등 일부 제3 세계 나라들이 대량 살상 무기 개발과 테러 행위 등으로 말썽을 일으키자, 미국이 이들 나라에 불량국이라는 딱지를 붙인 것이다. 올브라이트 국무장관은 1997년 9월 일련의 연설을 통해 전세계 나라들을 ‘국제 체제에 협조적인 나라’ ‘전환기의 나라’ ‘실패한 나라’ ‘불량국’ 등 4개 군으로 분류한 뒤, 앞서 언급한 북한 등 네 나라를 불량국으로 손꼽았다.

문제는 미국이 자국의 정치적 편의에 의해 사용하는 불량국이라는 말이 국제법에 아무런 근거가 없다는 점이다. 리트웍 씨에 따르면, 이 말은 기본적으로 국제 관계를 선과 악이라는 이중 잣대를 통해 들여다보려는 미국의 오랜 정치 문화에서 말미암았다. 더욱 심각한 것은 이런 잣대가 종종 일관성 없이 적용된다는 데 있다.

과거 이스라엘과 전쟁을 벌인 적이 있는 시리아의 경우를 보자. 미국은 시리아가 테러 행위를 조장했다는 이유로 과거에는 불량국 범주에 넣었다. 그러나 근래 시리아가 중동 평화 정착 과정에 깊숙이 관여하고 있다는 이유로 미국은 더 이상 이 나라를 불량국으로 보지 않는다. 1998년 5월 전격적으로 핵실험을 해 충격을 던졌던 파키스탄은 대량 살상 무기 저지를 최우선 외교 목표로 삼고 있는 미국 정부의 처지에서 보면 단연 불량국 범주에 들어야겠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이유는 단 하나, 파키스탄의 군사 정권이 예나 지금이나 친미적이기 때문이다.

가장 관심을 끄는 나라는 북한이다. 미국은 1990년대 들어 핵 개발 문제로 골치를 앓아온 북한을 대표적인 불량국으로 꼽았다. 이런 딱지는 북한이 1994년 제네바 기본 합의문 체결을 계기로 핵 계획을 포기한 뒤로도 계속 붙어다녔다. 지난 5월1일 미국 국무부가 연례 테러 지정국 명단을 발표할 때도 북한은 불량국이라는 꼬리표를 떼지 못했다. 최근 스탠리 로스 국무부 동아태담당 차관보가 공개석상 포럼에서 북한이 과거 고립주의 외교 행태에서 벗어나 개방 외교를 펼치고 있다며 긍정적인 평가를 내렸는데도 북한은 여전히 불량국 범주에 들어 있다. 지금 같아서는 북한은 앞으로도 계속 미국의 ‘국익’을 위해 불량국이라는 딱지를 붙이고 다녀야 할지 모른다. 미국이 일부 ‘불량국’의 장거리 미사일 위협을 이유로 국가미사일방어 시스템 구축을 추진하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 외교 정책 ‘자가당착’ 원인 되기도

그러나 문제는 이런 나라들을 불량국이라는 잣대로 묶어두다 보니 정작 이들 나라에 대한 외교 방향을 수정해야 할 때 종종 어려움을 겪는다는 점이다. 단적인 예가 이란과의 관계다. 얼마 전 이란 대통령 선거에서 온건파로 알려진 모하메드 하타미는 당선된 직후 미국에 관계 개선을 희망하는 신호를 보냈다. 그러나 클린턴 행정부는 뚜렷한 대응책을 찾지 못한 채 주춤거렸다. 이렇듯 특정국에 불량국 딱지를 붙여 그에 걸맞는 정책을 펼치다 보면, 이란처럼 관계를 개선할 기회를 맞아도 기존 정책을 대신할 새로운 대안을 찾기가 어렵다는 것이 리트웍 씨의 지적이다.

그렇다면 불량국에 대한 기존 봉쇄 전략을 대신할 새 대안이 있을까. 리트웍 씨는 미국이 불량국에 대해 일률적인 봉쇄 정책을 구사할 것이 아니라 각 불량국에 대해 차별적인 정책을 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란의 경우 분명 국내 정치적 사정 때문에 미국이 이란을 포용할 수 있는 계기로 활용해도 좋지만, 그런 징후가 전혀 보이지 않는 이라크의 경우는 다르다는 것이다. 또 특정국이 국제 규범에 어긋나는 행동을 취했을 경우 그에 걸맞는 해법을 미국이 제시하고 해결하려 해야지, 무조건 그 나라를 불량국으로 몬 뒤 다른 불량국들과 똑같은 제재 조처를 취하는 것은 문제 해결에 아무런 도움이 안된다는 것이다. 지금 미국에 필요한 것은 불량국에 대한 무차별적이고 일방적인 제재 조처가 아니라 선별적이고 차별화한 정책이라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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