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델라 대통령이 콘돔 홍보 나선 까닭
  • 崔寧宰 기자 ()
  • 승인 1998.12.2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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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 14% HIV에 감염… 만델라, 콘돔 사용 적극 권장
“에이즈가 우리 삶 한가운데로 파고든 지 이미 15년 이상 지났다. 그런데도 우리는 이 병의 존재를 애써 외면해 왔다. 이 문제를 다른 사람 일처럼 여긴 것이다.”

남아프리카 공화국(남아공) 넬슨 만델라 대통령이 최근 발언한 내용이다. 그는 심지어 공개 석상에서 남아공 국민들에게 콘돔을 사용하라고 권장하고 나섰다. 최고 통치자인 대통령이 이렇게 나온 데는 이유가 있다. 걷잡을 수 없이 번지는 에이즈가 남아공의 경제 개발을 가로막고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남아공은 남부 아프리카의 중심 국가이자 경제 개발 모델이 되는 나라이기 때문에 문제가 더욱 심각하다.

남아공 인구 3천2백만 가운데 에이즈를 일으키는 ‘면역 결핍 바이러스’(HIV)에 감염된 사람은 모두 14%이다. 또 남아공 정부 통계에 따르면 매일 새로 1천5백명 이상이 면역 결핍 바이러스 양성 반응자로 진단되고 있다. 에이즈 전파 속도가 어찌나 빠른지 유엔은 이같은 추세가 수그러들지 않는다면 남아공 평균 수명이 10년 안에 68세에서 48세로 짧아질 것이라고 내다본다.

남아공의 에이즈 문제가 이처럼 심각한 양상으로 발전한 것은, 과거 인종 분리 정책 때문에 오랫동안 국제 사회의 따돌림을 받은 탓이다. 에이즈를 치료하고 예방하는 연구는 대부분 서방 선진국에서 이루어졌는데 남아공은 그 혜택을 전혀 받지 못했다. 정부는 공중 보건 캠페인을 실시하지 않았고, 국민들도 콘돔을 기피하는 경향이 강했기 때문에 에이즈가 더 빨리 퍼졌다. 백인 정부의 흑인 박해도 한 몫을 했다. 소외받는 흑인들이 정부의 차별을 피해 인근 국가로 빠져나갔던 것이다.
예방비·치료비 때문에 경제 파탄 위기

그 바람에 남아공의 에이즈가 인근 국가로 퍼져 아프리카 남부 지역을 전세계 에이즈의 중심 지역으로 만들었다. 통계를 보더라도 에이즈가 가장 창궐하는 나라는 보츠와나·나미비아·짐바브웨·스와질랜드 같은 아프리카 남부 국가들이다. 짐바브웨의 경우 국민의 26%가, 보츠와나는 25%, 나미비아·스와질랜드·잠비아는 18∼20% 정도가 면역 결핍 바이러스에 감염되었거나 에이즈를 앓고 있다. 이같은 사실은 80년에 처음으로 에이즈 환자가 사망한 이래, 에이즈 사망자의 83%가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지역에서 나온 것을 보더라도 알 수 있다. 올해에도 전세계에서 새로 감염된 사람의 70%가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지역에서 나왔다.

그런데 문제는 앞으로 이 지역의 에이즈 상황이 더 악화할 것이라는 점이다. ‘유엔 에이즈 기구’(UNAIDS) 관계자들은 인류가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한 최악의 재난이 남부 아프리카를 덮칠 것이라고 경고한다.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국가들에서는 성인의 5분의 1이나 4분의 1이 면역 결핍 바이러스 양성 반응자이다.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이 나라들은 앞으로 10년 안에 성인 인구의 5분의 1 이상을 잃게 될 것이다. 짐바브웨의 경우 에이즈 때문에 인구 성장이 2002년에 멈출 것으로 예상되기도 한다. 보츠와나의 평균 수명은 90년 61세에서 2000년에는 41세로 낮아질 전망이다.

인류 역사상 질병 때문에 이러한 규모의 인구가 사라지는 것은, 16세기 아메리카 대륙의 인디언 공동체에 천연두가 번져 수많은 사람이 죽어간 사례나, 14세기에 흑사병이 유럽 인구 3분의 1을 몰살한 경우에서나 찾아볼 수 있다.

남부 아프리카의 에이즈 위기는 세계 인구 통계에도 아주 비극적인 영향을 미쳤다. 지난 10월28일 2년마다 한번씩 발표되는 유엔 인구 통계가 나왔을 때 세계는 깜짝 놀랐다. 치솟기만 하던 인구 증가율이 한풀 꺾인 것이다. 에이즈 때문이었다. 출생률이 떨어진 것이 아니라 에이즈로 인한 사망률이 올라간 것이다.

성인들이 에이즈로 사망하는 것보다 더 심각한 경우가 있다. 바로 모자(母子) 감염이다. 남부 아프리카에서 새로 태어나는 어린이의 30%가 면역 결핍 바이러스에 감염된 채 태어난다. 현재 전세계에서 모자 감염으로 감염된 어린이 가운데 85% 이상이 남부 아프리카에 살고 있다. 이들의 평균 수명은 2년 정도이다.

남부 아프리카의 비극은 ‘에이즈 고아’라는 새로운 인구 유형까지 만들어냈다.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에서는 이런 에이즈 고아가 7백80만명이나 된다. 이 고아들은 점점 늘어나고 있다.

만델라 대통령이 지적한 것처럼 에이즈는 이 지역의 경제 파탄까지 부르고 있다. 이 질병을 예방하고 치료하는 데 들어가는 사적·공적 비용이 경제 성장률을 갉아먹기 때문이다. 유엔 통계에 따르면 2005년에 남아공의 전체 노동자들은 월급 봉투에서 19% 정도를 에이즈 관련 비용으로 공제해야 할 판국이다. 95년에는 공제 규모가 7%였다. 남아공의 대통령과 관리들이 앞다투어 에이즈 관련 발언을 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에이즈 ‘천적’은 콘돔

에이즈가 젊은 직업군에서 많이 발병하는 것도 문제이다. 이들은 국가의 경제 개발을 이끌 주역이다. 경제 성장 지표와도 같은 평균 수명 하락과 젊은이 감염은, 수십년간 이룩한 한 나라의 경제 성장을 하루아침에 날려 버릴 수 있다.

국제 사회는 에이즈로부터 몇 가지 교훈을 얻었다. 먼저 통제 불능 상황으로 빠지기 전에 에이즈를 국가적인 재난으로 인식해야 한다는 것이다. 현재 많은 국가의 에이즈 감염률은 정부 차원의 대책 덕분에 주춤하고 있다. 몇년 전 미국은 한 해에 출현하는 새로운 감염자가 10만명이나 되었으나 최근에는 4만명 수준으로 줄었다. 대표적인 에이즈 창궐 국가인 태국·우간다도 면역 결핍 바이러스 전파 속도를 늦추는 데 성공했다. 이 두 나라는 모두 에이즈를 국가의 긴급 재난으로 다루고, 국민에게 무료로 콘돔을 나누어 주는 등 집중적인 교육·홍보 활동을 폈다.

여러 나라 사례를 보면 면역 결핍 바이러스 전파를 막는 데 가장 효과가 큰 정책은 콘돔 무료 배포이다. 에이즈 증가 속도가 한풀 꺾인 태국에서는 90년 콘돔 1천5백만개가 배분되었고, 92년에는 8천8백만개가 풀려 나갔다. 3년 사이에 거의 6배가 증가한 것이다. 아프리카의 에티오피아도 87년 2만개 나갔던 것이 93년에는 2천6백만개로 늘어났다. 그래서 공개적으로 콘돔 사용을 홍보하고 나선 남아공 만델라 대통령의 에이즈 퇴치 운동이 성공할지 여부는 현재 국제 사회의 관심거리가 되었다.

남부 아프리카 에이즈 문제는 이 지역만의 문제가 아니다. 자칫하면 이 질병이 2차 세계대전 때보다 더 많은 인명을 앗아갈 위험이 있다. 이런 비극을 막기 위해 유엔 등 국제 기구들은 현재 선진국의 기금을 받아 아프리카 등 제3 세계의 에이즈 퇴치 운동을 돕고 있다. 이 노력들은 선진국의 도움 없이는 실현이 불가능하다.

그러나 선진국들은 최근 이러한 기금 출연을 중단하고 있다. <워싱턴 포스트>에 따르면 미국 의회는 10월28일 유엔의 인구 통계가 나오기 얼마 전, 99년 예산에 책정될 예정이던 유엔인구계획 지원 기금을 삭감했다. 이 기금은 에이즈 퇴치 운동에 지원되는 기금이었다. 그래서 전문가들은 국제 사회가 에이즈 문제를 국제적인 재난으로 선포하고 공동으로 대처하는 노력이 절실하다고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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