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로인 양성화하자“ 호주의 마약 해법
  • 캔버라·남상민 통신원 ()
  • 승인 1999.03.1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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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주 복지 단체들 ‘합법 공급’ ‘안전 주사실 설치’ 주장… 연방 정부 ‘무관용 정책’ 일관
지난 2월 셋째 주 금요일, 호주 멜버른. 대부분의 일터에서 한 주의 일이 끝나는 5시를 조금 넘은 시각, 헤로인 과다 사용자가 쓰러져 있다는 신고가 마약 핫라인으로 들어왔다.

그날 저녁부터 다음날 새벽까지 전화를 받고 출동한 앰뷸런스는 길거리와 공중 화장실 등에서 실신해 있는 헤로인 사용자 13명의 생명을 구했고, 주검 둘을 싣고 돌아왔다.

이 정도면 주말 저녁을 조용히 보낸 편이었다. 하룻밤에 마약 과다 사용 사고가 많게는 50여 건 발생하기 때문이다. 호주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인 멜버른이 있는 빅토리아 주(인구 4백40만명)에서 지난해 헤로인으로 인한 사망자는 2백61명. 헤로인으로 인한 호주 전체 사망자 6백여명의 절반에 가깝다. 해마다 가파른 증가세를 보이고 있는 사망자 수는 올해 1∼2월에만 벌써 60여 명에 다다랐다. 이 정도 추세라면 올해의 헤로인 사망자는 지난해 수치를 훨씬 웃돌 것이다.

헤로인 등 마약 사용은 사회 문제로 그치지 않고, 엄청난 경제 손실도 초래한다. 마약 밀매 시장은 연 70억 호주 달러에 달해 호주의 가장 큰 산업 부문인 석유산업 규모에 버금가며, 지난 15년 동안 무려 8백50억 달러에 달하는 마약이 밀반입된 것으로 추산된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호주 정부는 15년간 2천억 달러를 쏟아부었다. 하지만 마약 사용과 이에 관련된 범죄가 줄어들기는커녕 오히려 급증하고 있다.

“헤로인 없애기보다 위험성 줄여야”

얼마전 존 하워드 총리가 이런 현상을 ‘국가적 비극’이라고 규정한 뒤로 ‘헤로인 위기’는 호주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정치·사회 논쟁거리가 되고 있다. 헤로인 논쟁에서 가장 중요한 주제는 과다 사용으로 인한 사망 문제이다.

최근 몇 년 사이 헤로인은 순도가 높아졌는데도, 값은 1회 주사 양이 최저 10달러로 싸져 청소년들도 마음만 먹으면 구할 수 있게 되었다. 멜버른의 경우 중심가 10여 곳에서 어렵지 않게 헤로인을 구할 수 있을 정도로 마약에 대한 사회적 접촉성이 높아졌다.

또한 헤로인 사용이 청소년층에서 유행처럼 번져가고 있다. 마약 사용자는 소외층이나 결손 가정 자녀뿐만 아니라 정상적인 중산 가정의 자녀에게까지 무차별적으로 확산되고 있다. 특히 마약 중독자 중에서 10대 소녀와 젊은 여성이 차지하는 비율이 급증하고 있다. 빅토리아 주의 경우 백 명을 훨씬 밑돌던 헤로인 사망자 숫자가 95년 중반 이후 급증하기 시작했고, 과다 사용으로 병원에서 치료받는 환자도 1년에 만명에 달하고 있다. 이런 현실에서 헤로인 위기를 해결하려는 사회적 논쟁은 헤로인 자체를 사회에서 완전히 없애는 것보다, 당장 과다 사용 등으로 나타나는 위험성을 줄이는 데 맞춰져 있다. 마약 중독자를 무조건 범법자로 몰 것이 아니라, 일단 사회가 수용한 뒤 문제를 해결할 계기를 마련하자는 새로운 정책이다. 헤로인 사용이 불법이지만 이미 보편화해 있는 현실을 인정하고, 마약 남용으로 인한 사망과 사회적 비용을 줄이는 데 초점을 맞추어야 실효성이 있다는 것이다. 이런 발상에서 나온 정책이 ‘헤로인 실험’과 ‘안전 주사실 설치’이다.

정부가 중독자들에게 일정한 기간 의학적으로 적절한 수준에서 헤로인을 싸게 공급하는 ‘헤로인 실험’은, 이미 97년에 수도 캔버라가 위치한 수도특별지역에서 시범적으로 실시될 뻔했다. 이 프로그램은 중독자에게 치료할 기회를 제공하고, 마약 사용에 따른 2차 범죄를 막을 수 있다는 측면에서 많은 전문가의 지지를 받았다. 하지만 다른 주 정부의 반대와 연방 정부의 소극적인 태도로 무산되고 말았다.

그러나 최근 마약 오·남용으로 인한 사망자가 급증해 심각한 사회 문제로 떠오르자, 마약 전문가·복지 단체 들이 이러한 정책의 필요성을 강력하게 제기해 점차 대중의 지지를 얻고 있다.

이 프로그램의 모델이 된 스위스의 경우, 지난 5년간 중독자 천여 명을 대상으로 이 정책을 시행해 중독자의 범죄율이 크게 떨어졌고, 이들의 사회 적응력과 건강도 훨씬 개선되었다.

언론도 ‘헤로인 합법화’ 주장

교회와 복지 단체 등은 헤로인 실험과 별도로 헤로인 사망자를 줄이기 위한 ‘안전 주사실’을 시급히 설치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중독자들이 안전하게 헤로인을 주사할 공간을 제공해 과용으로 인한 사망을 줄이고, 주사기를 여러 번 사용하는 데 따른 에이즈나 간염 확산을 막자는 것이다.

호주에서 가장 큰 복지 단체인 ‘열린 가정’은 이같은 정책만이 이미 전염병처럼 사람들의 생명을 앗아가고 있는 헤로인의 위해성을 줄일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론적 논쟁이 아닌 실질적이고 안전한 공간을 청소년에게 제공하는 것만이 헤로인 피해를 줄이고 마약 중독자 치료에도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입장은 네덜란드·스위스·독일 등의 성공 사례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독일 프랑크푸르트의 경우 96년에 안전 주사실이 네 곳 설치된 이후, 이 공간에서 헤로인 사용이 1백30만회나 이루어졌지만 과용으로 인한 사망이 한 건도 발생하지 않았다.

헤로인 사용자를 사회가 수용해 마약 문제를 해결하자는 제안은 민간 단체나 전문가뿐만 아니라 의료계·종교계·경찰 등도 지지하고 있다. 특히 지난 2월 뉴사우스웨일스 주의 검찰총장은 헤로인 판매자에게 면허를 주고 세금을 징수하자는 헤로인 양성화 방안을 내놓기도 했다.

호주의 대표적 일간 신문 가운데 하나인 <더 에이지>도 사설에서 마약을 합법화 또는 덜 범죄시하자고 주장했다. 마약을 공동체의 건강 문제가 아닌 범죄 문제로 취급하는 한 결코 문제가 해결될 수 없다는 점에서, 정부가 적절히 통제하여 마약을 공급하는 것이 마약 시장 음성화가 빚는 범죄를 해결하는 데도 효과적이라는 것이다. 특히 헤로인 실험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할 빅토리아 주의 케네트 제프 주 총리가 지난달 헤로인 실험과 안전 주사실 설치를 지지한다고 입장을 바꿈으로써 헤로인 실험 시행은 더욱 현실성을 얻어 가고 있다.

그러나 존 하워드 총리는 마약 사용에 강력하게 대처해야 한다는 ‘무관용 정책’을 여전히 고집한 채 헤로인에 대한 교육 및 홍보를 강화하겠다고 밝혔다. 하워드 총리, FBI에 협조 요청했지만…

이에 대해 새로운 정책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교육만으로 청소년들을 마약에서 벗어나게 한다는 것은 순진한 발상이라고 비판한다. 또한 경찰력에도 한계가 있으므로 강력 대응이 문제 해결에 실질적 효과를 거둘 수 없다는 입장이다.

하워드 총리는 이런 반론을 무마하고, 미국의 사례를 바탕으로 한 무관용 정책을 실시하는 데 도움을 받기 위해 지난 2월 말 미국 연방수사국(FBI) 프리히 국장을 만나 협조를 요청했다. 하지만 무관용 정책이 마약과 관련된 범죄를 감소시키는 데는 기여했지만, 마약 사용을 줄이지 못했다는 실망스런 답변을 들어야 했다.

사회적 논쟁의 결과와 무관하게 연방 정부의 보건부는 곧 ‘헤로인 과다 사용 방지안’을 새로 마련해 헤로인 과다 사용에 따른 피해를 줄일 정보를 제공할 예정이다. 이 캠페인은 특히 헤로인의 위험성을 최소화하는 사용 원칙과, 헤로인으로 의식을 잃은 사용자의 생명을 살릴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또한 헤로인 사용 후 독성을 제거할 수 있는 약품인 날트렉손을 3월부터 약국에서 판매하도록 허용했다.

호주에서는 지금 마약 공급자를 강력히 단속하되, 중독자에 대해서는 창조적이고 진취적 사고로 접근해야 한다는 새로운 마약 실험이 이루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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