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니 블레어여! 클린턴의 콩을 먹지 말라"
  • 런던·韓准燁 편집위원 ()
  • 승인 1999.03.1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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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민, 정부의 미국산 유전자 변형 식품 ‘개발 정책’에 분노
지난 2월18일, 런던 시내 중심부 관청가 큰 길에서 블레어 총리 집무실 겸 공관이 있는 다우닝가로 접어드는 길목. 차량 진입이 통제되자, 시위대가 몰고 온 덤프 트럭이 바리케이드 앞에서 멈추었다. 그 순간 이 날 시위의 하이라이트가 연출되었다. 차량 적재함이 하늘로 들리더니 무려 4t에 이르는 날콩이 와르르 쏟아졌다.

거리에 수북이 쌓인 콩은 국제 환경 보호단체 그린피스 회원들이 ‘프랑켄슈타인 식품’이라고 명명한 유전자 변형 콩이었다. 시위차 적재함에 붙은 문구 ‘토니(블레어)여! 빌(클린턴)의 종자(콩)를 먹지 말라’가 시위의 성격을 잘 나타낸다. 블레어 정부의 유전자 변형 식품(Genetically Modified Food:GM 식품) 관련 정책이 영국인의 건강과 생명을 위태롭게 하고 농촌의 자연 환경 보호를 도외시한 채 GM 식품 개발 업체에 막대한 이익을 안겨주려는 클린턴 미국 대통령에게 끌려가고 있다고 항의하는 글이다. “저개발국 국민은 미국의 실험 대상”

지난 2월22일 유엔이 콜롬보에서 연 세계 1백77개국 GM 식품 문제 국제회의에서, 미국은 유럽을 주축으로 하는 국제 사회로부터 거센 도전에 직면했다. 미국이 주도해 캐나다·호주·우루과이 등 7개국이 생명 및 유전 공학의 국제 기업화를 꾀하고 있으며, 식품이 부족한 아프리카 등 저개발·인구 밀집 지역을 GM 식품의 시험 재배지로 삼고 있다는 것이 이들의 지적이었다. GM 식품의 국제 시장 규모는 수백억 달러에 이를 것으로 추산된다.

영국은 물론이고 저개발 국가들도 클린턴 정부의 GM 식품 관련 정책을 비난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80년대 초부터 미국 정부가 생물 공학의 산업화를 적극 지원한 결과 미국이 90년대 초 콩·토마토·옥수수 등 GM 농작물 재배 실험을 끝내고, 96년부터 종자와 제초제를 독점 공급하는 등 GM 식품 수출을 주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은 국내 콩 생산량의 27%를 GM 재배법으로 생산하는 등 21세기 고부가가치 첨단 과학 산업인 유전자 및 생물 공학 분야에서 영국을 따돌리고 주도적인 위치를 유지해 갈 것이 확실하다.

이에 반해 영국에서는 GM 식품 시험 개발 및 대량 재배 여부를 둘러싸고 환경 단체의 항의 시위가 벌어지고 있다. 지난 수 년 동안 유기질 자연 농법을 강력히 주장해 온 찰스 왕세자의 말이 영국내 GM 식품 반대론자들의 견해를 대변한다. “자연계 식물의 유전자를 조작해 변형시킨다면 그것은 피조물인 인간이 신의 고유 영역인 창조 질서를 침범하는 것이다.”

왕세자를 앞세운 GM 식품 반대론자와 환경 단체들의 주장은, 정작 유전자 변형 농작물과 그것을 가공한 식품이 자연계는 물론 인체에 해롭다는 것을 증명할 증거를 확보하지 못해 그동안 일반 소비자에게 충분히 알려지지 못했다. GM 식품 반대론자들에게 결정적인 원호 사격을 한 사람은 지난해 8월 과학계에 큰 파문을 던진 헝가리 태생 유전공학자 아파드 프스즈타이 박사(68)다.

56년 영국에 귀화한 그는 에버딘 시에 있는 로웨트 농업기술연구소에서 95년부터 지난해 8월까지 3년 동안 유전자 변형 식품이 영양계와 자연 환경에 미치는 영향을 밝혀내는 실험 프로젝트를 진행해 왔다. 식물 흰자질 연구의 권위자이기도 한 그는 실험용 쥐에 GM 감자를 먹인 결과 뇌가 축소되고 몸무게가 현격히 줄어들면서 면역 체계에 손상을 입은 사실을 알아냈다. 그는 GM 식품이 인체에 미칠 영향까지 밝히려고 실험을 확대·연장하자고 건의했으나, 연구소측은 돌연 추가 자금 지원을 중단하겠다고 통보했다.

연구가 중단된 뒤 모금을 호소하기 위해 그는 지난해 1월과 8월 두 차례 텔레비전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에 출연해 “미국의 생명공학 관련 대기업체들에 의해 세계 곳곳의 저개발 국민이 유해 여부가 검증되지 않는 GM 식품을 테스트하는 실험 대상이 되고 있다”라고 주장했다. 그의 폭탄 선언은 환경론자들이 그동안 기다려 온 권위 있는 과학적 뒷받침이 되었다. 프스즈타이 박사는 텔레비전 회견 직후 연구 계약 위반으로 즉각 해고당했다.

그러나 그를 해고한 로웨트 연구소가 미국의 대표적 GM 식품 및 제초제 제조 다국적 회사인 몬산토로부터 97년 연구 지원 자금을 무려 17만 파운드나 기부받았음이 뒤늦게 밝혀졌다. 이에 따라 연구소가 미국의 대기업 몬산토측으로부터 압력을 받았으며, 생명 공학 산업화 정책에 큰 비중을 두고 있는 블레어 정부의 지시를 받아 GM 식품 개발에 걸림돌이 될 프스즈타이 박사를 제거했을 것이라는 주장도 나온다.

지난 2월12일 생물 및 유전 공학 관련 과학자 22명이 프스즈타이 박사를 해고한 것이 부당하다고 지적하는 연대 성명서를 발표하자 GM 식품 파동은 마침내 정치 쟁점이 되었다. 대부분의 영국 언론은 광우병 파동 때 국민에 대한 정보 전달이 미숙해 큰 희생을 치른 과오를 상기시키면서, 블레어 정부의 GM 식품 정책에 비난을 퍼붓고 있다. 특히 미국이 주도하는 GM 식품 개발은 대재벌의 이익을 위한 것이며, 영국내 주요 로비스트들이 노동당내 전·현직 관리들이거나 또는 이들과 유착하고 있다고 폭로했다. 국민 68% “유전자 변형 식품에 두려움 느낀다”

언론의 표적으로 등장한 인물은 GM 식품 정책 주무 부서인 과학부의 세인스베리 차관이다. 지난해 각료로 등용된 그는 영국 최대 슈퍼마켓 체인 세인스베리의 소유주인데, 그의 슈퍼마켓은 일찍부터 각종 GM 식품을 판매해 왔다. 야당과 언론은 그에게 즉각 사임하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노동당 정부는 세인스베리 경이 각료에 취임하면서 경영 일선에서 완전히 물러났고, GM 정책 관련 위원회에서도 의결권을 행사하지 않는 등 공정성 유지와 공익을 지켜 왔다고 맞서고 있다.

야당인 보수당은 정치 공세를 펴면서 GM 식물 재배 관련 규제 강화 법안을 의회에 제출했다. 즉, 인체에 대한 유·무해 여부를 밝히는 과학적 실험이 마무리될 때까지 GM 농작물 시험 재배 기간을 연장하고, 앞으로 3년 동안 상업화를 위한 대량 재배 생산 시기를 잠정 유예할 것을 골자로 하는 법안이 상원에 제출되었으나, 의회에서 법제화할 가능성은 거의 희박하다.

그럼에도 집권 2년째에 접어드는 블레어 노동당 내각이 ‘프랑켄슈타인 식품’ 파동으로 입은 정치적 타격은 상당히 심각하다. 지난 2월22일 실시된 <더 타임스>의 여론조사는 노동당 정부에 대한 국민의 지지가 1월보다 무려 5% 포인트나 하락해 97년 총선 후 가장 낮은 51% 지지도를 나타내고 있다. 반면 보수당은 1월에 비해 무려 6% 포인트나 뛰어올라 30% 지지도를 기록하고 있다. <인디펜던트>의 여론조사에서도 블레어 정부의 GM 식품 정책에 대한 국민의 불신이 여실히 반영되었다. 응답자 60% 이상이 블레어 내각의 GM 식품 관련 홍보와 각종 정책에 큰 불만을 나타냈고, 68%가 GM 식품이 식탁에 오르는 데 우려와 두려움을 표명했다.

이번 파동의 소용돌이 속에서 영국 국민은 내용물이 거의 명기되지 않은 GM 농작물이 함유된 식품을 자신들의 식생활에서 거의 60% 이상이나 접하고 있다는 놀라운 사실도 알게 되었다. 소비자·환경 단체의 조사에 따르면, 그동안 미국이 개발해 영국 시장에서 팔고 있는 GM 식품은 토마토 분말, 식물성 치즈, 콩, 옥수수 등이며, 이를 원료로 써서 가공한 식품은 토마토 케첩·마가린·치킨티카 등으로 밝혀졌다.

블레어 총리를 가장 곤혹스럽게 하는 것은 정부가 위촉한 과학자들이 작성한 비밀 평가 보고서이다. 지난 2월 말 영국 언론이 폭로한 내용에 따르면, GM 농작물 재배에까지 이른 지난 50년 간의 농업 혁명 결과 농촌에서는 야생 조류 및 동식물이 크게 감소하고 생명 주기가 단축되는 등 생태계의 불임화·황폐화 가능성이 예상된다는 것이다.

노동당 정부는 2002년까지 제한된 장소에서 GM 농작물 시험 재배를 잠정 허용하는 것으로 급한 불을 잠재웠다. 그러나 과거 광우병 파동의 경우가 시사하듯, 식품 보건 및 자연 보호 정책은 국민의 신뢰와 지지가 관건이라는 점에서, 국민의 지지가 하락세를 보이고 있는 노동당 정부에 프랑켄슈타인 식품 파동은 큰 정치적 부담으로 남을 것이 확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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