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 만나주면 다쳐!” 일본 ‘스토킹’ 몸살
  • 도쿄/채명석 (cms@sisapress.com)
  • 승인 2000.06.08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일본, ‘악질 스토커’ 피해 늘어나 골치… 살인 사건 잇따르자 뒤늦게 방지법 제정
비틀스의 존 레넌이 광적인 팬이 쏜 흉탄에 쓰러진 지 20년이 지났다. 5년 전 미국을 떠들썩하게 했던 오 제이 심슨 사건도 이혼한 전처를 집요하게 쫓아다니던 와중에 일어난 사건이다. 일본에서도 짝사랑 대상을 미행하거나 무언 전화·편지 등의 방법으로 못살게 구는 ‘스토커 행위’의 피해자가 늘고 있다.

일본 경찰청이 최근 집계한 통계에 따르면, 지난 한 해 스토커 행위로 피해를 보았다고 경찰에 상담한 사람이 8천 명을 넘어섰다. 이는 재작년보다 30% 가량 늘어난 수치이다. 또 스토커 행위가 비교적 악질이었는데도 현행 법령으로는 처벌할 수 없었던 사건이 8백22건에 달했다.

일본에서는 경찰이 민사 사건에는 개입하지 않는다는 불문율이 있다. 따라서 스토커 피해자가 경찰에 상담하더라도 경찰이 개입을 꺼리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남녀 간의 애정 문제는 당사자끼리 해결하라는 것이 경찰의 기본 방침이다.

쓰레기 뒤지는 남자에겐 뭔가 있다?

대표적인 예가 올 봄 사이타마 현 오케가와 시에서 여대생이 살해된 사건이다. 살해된 여대생은 이전에 사귀었던 한 남성으로부터 집요하게 다시 사귀자는 강요를 받고 있었다. 견디다 못한 그녀는 부모와 함께 경찰에 신고했다. 하지만 경찰은 민사 사건 불개입 원칙을 들어 당사자끼리 만나 원만히 해결하라고 권하면서 피해 신고 접수를 거부했다.

그런 뒤 여대생은 스토커 남성이 살인을 의뢰한 범인들에 의해 역 근처에서 칼로 난자당해 죽었다. 이런 사실이 언론을 통해 대대적으로 보도되자 경찰을 비난하는 여론이 높아졌다. 경찰이 스토커 피해 신고를 받고 즉각 수사했다면 여대생 살해 사건은 미연에 방지할 수 있었다는 아쉬움 때문이다.

악질적인 스토커 행위를 방치한 경찰에 대한 비난이 거세지자 자민·공명·보수 등 연립 여당 3당은 스토커 행위를 처벌할 ‘스토커 방지법’을 제정하기에 이르렀다.

최근 국회를 통과한 스토커방지법은 특정한 사람에 대한 연애·호의 감정이나 그로 인해 파생하는 원한 감정을 충족시킬 목적으로 미행·잠복·감시하는 행위, 행동을 감시하고 있다는 것을 통보하는 행위, 면회나 교제를 요구하는 행위, 무언 전화를 거는 행위 등 여덟 가지 행위를 스토커 전 단계 행동으로 규정했다. 이같은 행위를 되풀이하게 되면 정식 ‘스토커 행위’에 해당한다.방지법에 따르면, 스토커 피해자가 경찰에 피해를 신고하면 경찰서장이 스토커에게 1차 경고를 발령하게 된다. 스토커가 이 경고를 무시하면 이번에는 각 지방 공안위원회가 금지 명령을 발령한다. 그래도 스토커 행위를 계속할 경우에는 1년 이하 징역이나 백만 엔 이하 벌금에 처하게 된다.

일본에서 ‘스토커’라는 말이 공공연히 쓰이게 된 것은 수년 전 일이다. 1990년대 중반 미국의 각주에서 스토킹(stalking) 방지법이 차례로 제정되던 무렵이다. 하지만 불과 몇년 사이에 스토커 범죄를 법으로 규제해야 할 만큼 일본의 스토커 행위는 날로 과격해지고 있는 추세이다.

앞서의 경찰청 발표에 따르면, 악질적인 스토커 행위 8백22건 중 미행·감시·잠복 행위가 으뜸이며, 그 다음이 면회·편지·전화 등을 통한 교제 요구이다. 무언 전화로 장기간 괴롭힘을 당했다는 사람도 2백50여 명에 달했다.

최근 일본 경찰은 20대 여성 미용원에게 2백 차례나 외설스런 협박 전화를 걸어 괴롭힌 30대 남성을 체포했다. 이 남성은 길에서 우연히 만난 여성 미용원에게 호감을 갖게 되어 교제를 요구하다 거절당하자 화풀이로 2백 차례나 협박 전화를 건 것이다.

스토커 행위가 살인을 부르는 사례도 급격히 늘고 있다. 얼마 전 시즈오카 현 누마스 시 역 앞에서 아침 일찍 여고 3년생이 몸에 서른네 군데나 칼에 찔린 채 쓰러져 있는 것이 발견되었다. 범인은 27세 남성으로 밝혀졌다.

남성과 여고생은 1년 전부터 사귀어 온 사이였다. 올 3월께 여고생이 헤어지자고 요구하자 남성은 스토커로 돌변했다. 매일 여고생이 수업을 마치기를 기다렸다가 교제를 강요했다. 여고생의 휴대 전화에는 ‘헤어지면 죽여 버리겠다’는 협박 전화가 끊이지 않았다. 여고생이 끝내 관계 복원을 거절하자 아침에 등교하는 그녀를 식칼로 무려 서른네 군데나 난자한 것이다.

20대 직장인 여성이 불륜 관계이던 남성의 가족에게 휘발유를 뿌려 태워 죽인 사건도 일어났다. 같은 직장에 근무하던 이 여성과 남성이 불륜 관계에 빠진 것은 5년 전. 이 남성은 가정이 있는 유부남이었다. 그러나 여성이 가정을 버리고 자신과 결혼하자고 윽박지르자 피해자는 그 여성을 멀리하게 되었다. 여성은 매일처럼 피해자 집에 전화를 걸고 관계 회복을 애원했다. 피해 남성의 부인에게도 두 사람의 관계를 폭로하고 이혼을 강요했다.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여성은 심야에 피해자 집에 가솔린을 뿌려 방화했다. 결국 피해자의 아이 둘이 희생되는 참극을 낳았다.

홋카이도에서는 30대 여성 아나운서가 18세 소년에게 살해된 사건이 일어났다. 소년은 텔레비전에 비친 여성 아나운서를 보고 첫눈에 반했다. 소년은 전화번호부를 뒤져 그녀의 전화번호를 알아낸 뒤 집요하게 교제를 요구했다. 그때마다 여성은 소년을 점잖게 타일렀다. 소년은 여성의 부드러운 태도가 자신에게 호감을 갖고 있는 증거라고 착각했다. 그러던 중 그녀가 아예 전화를 받지 않자 자신을 배반했다고 격분해 귀가하던 그녀를 식칼로 살해한 것이다.

전문가들에 따르면, 스토커들의 강력한 무기는 피해자가 버린 쓰레기이다. 스토커들이 상대방의 일상 생활을 감시하기 위해 사용하는 상투 수단이 쓰레기를 면밀히 분석하는 것이다.

도쿄의 흥신소 오하라 조사 사무소가 인터넷에 띄운 피해 사례를 들어 보자. 서른다섯 살인 주부 기무라 씨에게 지난해 10월께부터 무언 전화가 걸려오기 시작했다. 남편에게 상담했으나, 출장으로 집을 비우는 경우가 많아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 스토커의 전화는 점점 노골화했다. 어제는 생리일이었는데 몸 컨디션은 어떠냐, 어제 먹은 냉동 식품은 몸에 좋지 않다는 등 자신의 일상 생활을 훤히 꿰뚫고 있었다.

결국 견디다 못해 흥신소에 조사를 의뢰했다. 흥신소 직원이 집 근처를 감시하다 쓰레기통을 뒤지는 한 남자를 발견했다. 스토커는 일류 회사에 근무하는 20대 후반 남성이었다. 우연히 여성의 집 근처를 지나다 첫눈에 반해 스토커 행위를 시작하게 되었다고 고백했다. 그의 최대 정보원은 여성이 버리는 쓰레기였다. 짝사랑 주부의 사생활을 쓰레기를 통해 감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최근에는 ‘생면부지형’ 스토커 급증

남의 쓰레기를 주워 가는 것 자체는 위법이 아니다. 그러나 스토커들이 쓰레기를 분석해 사생활을 폭로한다면 협박죄에 해당한다. 전문가들은 스토커를 퇴치하기 위해서는 쓰레기를 버리는 데도 세심한 주의가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쓰레기는 청소차가 오기 직전에 내놓는 것이 좋으며, 여성의 생리용품이나 팬티는 가위나 가정용 절단기로 잘게 썰어서 버리는 것이 좋다고 충고한다. 스토커들이 가장 흥분하는 것은 상대방이 일상 생활에 사용했던 물건을 보거나 주웠을 때라는 것이다.

스토커 행위는 강간 사건처럼 피해자와 가해자 간에 면식이 있는 경우가 많다. 예컨대 스토커 행위는 이혼한 부부, 연인, 직장 동료 등 서로 얼굴을 아는 사이에서 발생하기 쉽다.

그러나 피해 여성들이 조직한 일본의 ‘스토커 대책실’에 따르면, 최근에는 피해자와 가해자 간에 면식이 전혀 없는 경우가 늘고 있다고 한다. 대책실 관계자는 생면부지의 스토커를 퇴치할 대책으로 다음 다섯 가지를 들었다. △전화번호를 바꾸지 말라 △혼자서는 만나지 말라 △설득하지 말라 △화내지 말라 △선물은 돌려주지 말라. 스토커를 섣불리 자극하면 할수록 손해라는 얘기이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