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은 ‘기대’ 미국은 ‘뜨악’
  • 남문희 기자 (bulgot@sisapress.com)
  • 승인 2000.06.0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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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 정상회담 앞두고 대조적 반응…워싱턴 정가에는 음모설 떠돌아
미국과 일본은 복잡한 심경으로 남북 정상회담을 바라보고 있다. 공식으로는 적극 환영한다고 하지만, 내부적으로는 경계심까지 감추지 않는 것으로 알려졌다. 남북 관계가 급진전해 자신들의 대북 협상력이 약해질지 모른다는 걱정 때문이다.

미·일 양국이 이런 우려를 공통으로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이를 표출하는 양식은 매우 대조적이다. 한마디로 말해 일본은 정상회담의 성공적 진행을 위해 대단히 협조적인 데 비해 미국은 상당히 ‘삐딱한’ 것으로 비치고 있다.

남북 정상회담에 대한 일본의 태도를 점쳐 볼 수 있는 중요한 계기가 바로 모리 총리의 한국 방문이다. 이번 한·일 정상회담의 최대 현안은 남북 정상회담과 북·일 수교에서 양국간 협력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일본의 한반도 전문가들은 이와 관련해 ‘김대중 대통령이 일본에 협력을 당부할 경우 모리 총리 역시 이에 화답할 것’이라고 내다본다.

일본이 협조적이라는 것은 이미 여러 면에서 감지되어 왔다. 예를 들어 5월 말 베이징에서 열기로 한 북·일 수교 회담이 북한측 요청에 따라 미루어진 데 대해서도 일본은 큰 불만을 표하지 않았다. 일본의 내부 사정도 있었겠지만 한국보다 앞서가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다고 보고 이를 받아들였다는 것이다. 일본측은 이번 정상회담이 잘 진행될 경우 북·일 수교 회담에도 긍정적인 효과를 미칠 것으로 보고 나름으로 기대감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일본의 한반도 전문가는 “김대통령이 일본·북한 양측을 설득할 ‘울트라 C’(특단의 중재안)를 제시해 돌파구가 열릴 수 있다면 일본은 한국에 더욱 가깝게 다가갈 것이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한 외교 소식통은 “현재 한·일 관계가 그 어느 때보다 좋다는 점에 대해서는 양국의 당국자나 전문가 의견이 일치한다”라고 지적했다. 앞으로 남북 월드컵 분산 개최 문제가 탄력을 받게 될 가능성이 높아짐에 따라 이를 계기로 북한의 사회간접자본(SOC) 건설을 위한 한·일 협력 문제도 수면위로 떠오를 가능성이 높다.

미국이 회담 방해하면 한·미 관계 큰 상처

일본측 전문가는 한국과 일본이 전략적으로 협조할 필요성을 강조하기도 했다. 즉 북·일 수교 이전 단계에서 한국이 북한의 전력 문제 등 긴급한 사회간접자본 지원을 담당하고, 본격적인 건설은 북·일 수교 이후 일본 배상금이 들어갈 때 양국이 상호 협력해 추진하자는 내용이다.

미국이 최근 보이고 있는 태도는 일본과는 매우 대조적이다. 미국은 웬디 셔먼 국무부 자문관을 한국에 보내 ‘핵과 미사일 문제를 정상회담 의제에 넣으라’는 식의 압력을 행사한 데 이어, 구체적인 의제에 대해서도 간섭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대표적인 것이 북한에 대한 전력 지원 문제이다. 북한은 지난해 비가 오지 않아 현재 심각한 전력난을 겪고 있다. 이런 사정을 감안해 우리 정부는 이미 전력 지원을 이번 정상회담의 첫 번째 사업으로 생각하고 있다. 그런데 최근 한·미간 실무 협의에서 미국측이 ‘미국의 대북 중유 공급이나 에너지 정책과 연계되지 않는 단독 지원은 곤란하다’는 입장을 밝혀 우리측을 곤혹스럽게 하고 있다는 것이다.

미국은 한국뿐 아니라 북한에도 압력을 행사하고 있다는 인상을 주고 있다. 북한측은 북·일 수교 교섭과 마찬가지로 최근 로마에서 열린 미·북한 고위급 회담도 정상회담 이후로 미루어 달라고 요청했으나 미국측이 강하게 밀어붙여 마지못해 받아들인 것으로 알려졌다.

워싱턴의 한반도 소식통은 최근 ‘이번 정상회담은 미국의 한반도 전략 때문에 별 성과 없이 끝날 것이라는 얘기가 워싱턴 정가에 나돌고 있다’고 전했다. 이런 분위기를 반영하듯 최근 시중에는 ‘정상회담이 성과 없이 끝나면 그런대로 한국 경제가 버틸 수 있겠지만 만약 약간의 성과라도 있으면 매우 어려워질 것’이라는 얘기도 떠돌고 있다.

한국 사회의 많은 지식인들은 1990년대 초 남북 고위급 회담이 좌절된 배경에 핵문제를 앞세운 미국의 방해 공작이 크게 작용했다는 사실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분단 반 세기 만에 맞는 이번 정상회담조차 미국의 방해로 별 성과 없이 끝날 경우 한·미 관계는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입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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