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출신 인권운동가 해리 우 인터뷰
  • 워싱턴/변창섭 (cspyon@sisapress.com)
  • 승인 1997.04.1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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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에 공산주 의 믿는 사람 하나도 없어”
해리 우씨는 중국 공안 당국이 지목한‘최대의 문제아’이다. 중국 인권에 관한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는 언제나 중국 정부의 신경을 곤두서게 만든다. 중국내 인권 상황의 진실을 누구보다 많이 아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가 19년 간의 혹독한 노동수용소 생활 체험을 바탕으로 집필한 <라오가이(勞改)-중국판 강제노동수용소>는 중국 전역에 퍼져있는 강제노동수용소의 실상을 생생히 고발한 기록물이다. 60년 북경 지질대학 학생 시절 소련의 헝가리 침공과 중국 공산당을 비판해 19년 동안 옥살이를 한 그는 79년 석방된 뒤 85년 교환 교수 자격으로 미국 캘리포니아 대학에 갔다가 그 길로 미국에 눌러앉았다. 그는 95년 여름, 중국 국경 지역에 갔다가 스파이 혐의로 체포되어 15년형을 선고받았으나 미국 등 국제 사회의 압력으로 66일 만에 풀려나기도 했다. <시사저널>은 3월27일 해리 우와 마주앉아 등소평 사후 사회주의 중국의 장래, 중국의 인권 상황을 들어보았다.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이슈 별로 구분해 그의 육성을 발췌해 엮는다. <편집자>

등소평: 그는 공산주의의 구세주였다

중국에는 공산주의가 2개 있다. 모택동주의와 등소평주의가 그것이다. 이 둘은 본질적으로는 다를 바 없다. 그러나 모택동이 추구한 공산주의에는 문제가 많았다. 그렇다면 둘 사이에 차이가 있는가? 물론 있다. 모는 자본주의를 허용하지 않았지만 등은 이를 허용했다. 왜 그랬을까? 등이 공산주의에 대한 자신의 소신을 바꾼 것일까? 천만에. 단 한 번도 그런 적이 없다. 그는 본질적으로 공산주의자였다.

공산주의란 무엇인가. 자본주의를 타도해 사적 소유권을 없애는 것 아닌가. 그렇다면 공산주의를 위해 싸운 등소평이 어째서 자본주의를 허용했는가? 달리 선택할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만일 그가 모택동이 추구한 공산주의를 답습했더라면 모든 것이 끝장났을 것이다.

모 사망 당시 중국에는 재원이 없는데다 생산 시설이 중단되어, 사람들이 마음 둘 곳을 찾지 못했다. 상황이 그런데 모택동주의를 신장하라고? 천만의 말씀! 등소평은 모택동주의를 신장하는 것이 현실과 동떨어진 일임을 깨달았다.

과거 소련의 고르바초프는 수구적인 공산주의자로서 개방 개혁을 실시했지만 자본주의는 도입하지 않았다. 그가 실패한 원인이 바로 여기에 있다. 그는 공산주의를 더 인간적으로, 더 민주적으로 만들 수 있다고 떠들었다. 그는 정치 개혁을 원했으나 실패했다.

그러나 등소평은‘우리는 다르게 할 수 있다’고 말했다. 즉 정치 체제는 유지하되 자본주의의 산물인 돈과 기술은 활용한다는 것이다. 90년대 초 러시아 사람들이 길거리로 나선 까닭은 빵과 버터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빵이었지 정치 개혁이 아니었다.

집단체제: 공산주의는 원래 1인 지배체제

흔히 들리는 얘기는, 강택민 집단지도체제가 안정되어 잘 가동되고 있으며, 그의 권력 기반도 등소평 생전에 마무리되어 문제가 없다는 것이다. 북경 당국은 그런 식으로 선전해 왔다. 여기서 두 가지 점을 지적하고자 한다.

첫째, 21년 중국 공산당 창당 이후 중국에서 단일지도체제가 아닌 복수체제가 들어선 일이 없다. 강택민 집단체제는 평화적인 과정을 통해 구축되었다고 한다. 나도 그렇게 믿고 싶고 또 그러기를 바란다. 이 체제가 잘 굴러갈까? 글쎄다. 공산주의 역사를 통해 그런 체제가 제대로 굴러간 사례를 본 적이 없는 나로서는 회의적이다.

둘째, 모든 제국주의 국가와 독재 국가는 예외 없이 1인의 지배를 받아 왔다. 등소평 말년에 그는 의식도 없는 상황에서 병석에 누워 있었다. 당시 중국의 최고는 누구였나? 강택민? 군사위 주석에 당총서기, 게다가 국가 주석까지 겸임한 그가 과연 최고였는가? 천만의 말씀이다. 말도 못하고 의식도 없는 등소평이 최고 실권자였다. 등의 후계자인 강택민의 운명은 어떻게 될지 모른다. 모택동이 후계자로 지명했는데 모 사망 2년 뒤 쫓겨난 화국봉을 보라. 공산주의:아무도 믿지 않는 농담

자본주의를 실험하고 있는 중국은 오늘날 본질적인 문제와 모순을 안고 있다. 우선 이념적 위기에 처해 있다. 일종의 공백 상태에 놓인 것이다. 49년 공산당이 정권을 잡았을 때 수뇌부는 유교를 포함한 모든 형태의 종교를 없앴다. 오로지 유일한 종교는 모택동주의였다. 당시 사람들은 그것을 무조건 믿고 따랐다. 그후 많은 사람이 숙청되고, 문화혁명을 통해 피를 흘렸다.

그로부터 30년이 지난 오늘 우리는 무엇을 얻었는가? 귀중한 교훈 하나를 얻어냈다. 그것이 오늘날 중국의 원동력이다. 우리가 흘린 피, 우리가 겪은 고통에서 배운 그 교훈이란, 공산주의란 고작 농담거리밖에 안된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오늘날 중국에서 공산주의를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상해에 가면 으리으리한 오성급 호텔도 들어섰고, 시원스런 고속도로도 새로 생겼다. 사람들은 생전 보지 못했던 맥도널드 햄버거를 먹는다. 이런 시대 흐름 속에서 중국인들이 터득한 가장 중요한 역사적인 변화가 뭔 줄 아는가. 더 이상 공산주의를 믿지 않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공산주의 이념은 끝났다. 등소평은 언젠가 이런 얘기를 한 적이 있다. 즉‘우리가 (공산주의라는) 강을 건널 수 있을지 잘 모르겠다. 우리는 다만 그 강물을 만져볼 수 있을 뿐이다’라고. 그도 공산주의의 미래에 대해 확신이 없었던 것이다.

경제:중국에는 파산이 존재하지 않는다

오늘날 중국에 가면 자본주의 흔적들을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은행·주식 제도가 그렇고, 서구식 카페테리아가 곳곳에 들어서 있다. 그러나 한 가지 중국 정부가 감히 엄두를 내지 못하는 정책이 있다. 바로 파산 정책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경쟁에서 낙오하는 기업은 파산하게 되어 있다. 경쟁을 통해 사회를 굴러가게 하는 것, 바로 이것이 자본주의의 요체다.

중국은 그렇지 않다. 중국에는 파산이라는 것이 없다. 만일 경쟁 제도를 허락할 경우 중국의 국유 기업은 끝장난다. 국유 기업이야말로 사회의 기반이다. 정부가 대외 무역이나 외국인의 국내 투자를 통해 벌어들이는 외화를 국유 기업을 살리는 데 쏟아붓고 있는 까닭도 이래서다. 국가 소유 제도를 유지하고 국유 기업을 유지해야 한다는 원칙이다. 국유 기업이 쓰러지면 통치 기반이 무너지기 때문이다.

전반적으로 중국의 경제 발전은 꽤 좋아 보인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문제투성이다. 대외 무역이 국민총생산의 47%를 차지하고 있고, 국내 투자의 30% 이상을 외국 자본에 의존하고 있다. 중국에 진출한 외국 기업과 합영 기업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은 1천7백만명에 이른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바로 이것이다. 서방이 중국을 필요로 하는 것보다 중국이 서방을 훨씬 더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서방은 중국에 지렛대를 확보하고 있는 셈이다. 중국의 경제는 서방과의 교역 및 투자에 아주 많이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인권:이름 없는 피해자에게도 관심을

서방 언론이 중국의 인권 문제를 논할 때 늘 일부 저명한 인권운동가들만 얘기한다. 위경생이나 왕단이 대표적이다. 이들이 하루빨리 자유의 몸이 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일은 물론 중요하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인권 문제와 관련해 두 가지를 말하고 싶다. 첫째, 인권 사범을 노동을 통해 교화한다는‘라오가이(勞改)’의 문제다. 과거 모택동과 등소평은 지주 계급 등을 반동이라고 몰아붙여 교화라는 명분으로 강제노동수용소에 보내 혹독한 고생을 시켰다. 오늘날도 마찬가지다. 둘째, 인권운동가들을 잡아넣는 감옥 제도이다. 감옥이 바로 공산주의 독트린을 떠받치는 제도라는 것을 아는가. 중국 정부는 감옥에 가둔 인권운동가들을 놓고 서방과 거래해 왔다. 즉 누군가를 풀어줄 때마다 그 대가를 얻어냈다. 이들을 협상 대상으로 삼고 있는 것이다.

강제노동수용소와 감옥이야말로 인권을 짓밟는 혹독한 두 가지 유형이다. 바로 이 두 곳에서 고통받는 모든 사람들은 위경생이나 왕단 못지 않게 중요한 사람들이다. 인간은 다 똑같다. 위경생을 얘기할 때 감옥이나 노동수용소에 갇힌 이름 없는 수백만 민초들을 기억해야 한다.

소수민족:분리 독립 투쟁은 중국 통치권과의 전면전

티베트와 신강 위구르 자치구에서는 끊임없이 독립 투쟁이 벌어지고 있다. 포기하지 않고 용감히 싸우고 있다. 북경을 포함해 중국 전체는 하나의 접시이다. 이 접시는 종이나 플라스틱이 아닌 도자기로 되어 있다. 조금이라도 일단 떼어내면 접시 전체가 깨지게 된다. 말하자면 공산주의라는 도자기는 조금만 깨져도 전체가 깨진다는 말이다. 티베트나 신강 지도자들이 독립 투쟁을 벌이는 것은 바로 중국 공산당의 통치권에 맞서 싸우는 것과 같다.

홍콩:1국2체제는 사실상 허구

오는 7월1일 홍콩이 중국에 넘어가면 홍콩은 더 이상 예전의 홍콩이 아닐 것이다. 당장 홍콩이 끝장난다는 것이 아니라 점차 그렇게 될 것이라는 말이다. 물론 중국에 반환된 뒤에도 앞으로 50년 동안 현재의 체제를 유지하겠다는 보장은 있다.

그것이 가능할까? 즉‘1국2체제’가 가능할까? 여기서 1국이란 무엇인가. 공산주의 독재 국가 아닌가. 홍콩처럼 조그만 섬나라가 중국이라는 공산국 아래에서 자본주의 체제를 유지하며 성공할 것이라고? 물론 홍콩의 법적 지위를 보장하는 문서가 있기는 하다. 그게 어쨌단 말인가. 구속력이 있을까? 글쎄. 중국에는 많은 법이 있다. 법이 있어도 그것을 시행하고 안하는 주체가 누군가? 당국이다. 그렇다면 당국을 믿을 수 있는가? 한번 반환된 홍콩은 종국적으로 변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대만이 중국의 1국2체제 논리에 속지 않는 것도 이런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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