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는 지금 검은빛에 젖어…
  • 스트라스부르·류재화 통신원 ()
  • 승인 2004.02.0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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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젊은층에 고딕풍 패션·음악 ‘열풍’
프랑스의 올해 유행색은 단연 ‘누아르’이다. 프랑스인이 검정색을 좋아하는 것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지만 최근 이른바 ‘고딕 모드’가 인기를 끌면서 다시 ‘검정’ 돌풍이 일고 있는 것이다. ‘고딕’하면 화려하고 드높은 중세풍 교회의 첨탑을 먼저 떠올리지만, 요즘 프랑스인은 검은색 패션을 먼저 떠올린다. 위아래 모두 검은색으로 갖추어 입을 뿐만 아니라, 일부 여성들은 브래지어나 코르셋 등 속옷도 검정색을 즐긴다. 음울한 성적 매력을 풍기는 짙고 검은 아이섀도 화장법이나, 고딕풍 장식 문양의 어깨 문신도 유행한다.

고딕 모드의 원조는 사탄주의 취향을 즐기는 ‘고딕파’이다. 그 중 열혈 추종자들은 수년 전 이미 각종 희귀한 스타일을 창조해 개발한 바 있다. 가장 얌전한 축에 드는 ‘로맨틱 고딕’은 그레고리언 스타일의 하얀 블라우스를 받쳐 입는다. ‘밀리터리 고딕’은 배트맨처럼 날개 달린 시커먼 외투에 검은 군화를 신거나 전투복을 응용하는가 하면, 정통 중세풍의 ‘흡혈귀’ 패션도 즐긴다. 물론 평상복은 아니고 파티용이다.
사실 ‘고딕풍’ 패션이라는 말에는 ‘튀기 좋아하는 날라리 청소년들의 전위적인 멋내기’라는 멸시적인 뉘앙스가 스며들어 있다. ‘고딕’은 사탄주의가 아니라 ‘비극미’에 대한 심취라고 주장하는 정통 고딕파도 있지만, 보통은 우울하고 음침하며 괴기한 취향을 즐기는 정신적 문화적 경향을 두루 가리킨다. 패션뿐 아니라 음악·미술·문학 등 전방위적인 개념인 것이다.

고딕파는 그들만의 독특한 파티를 열며, 마릴린 맨슨 식의 ‘고딕 록’에 심취한다. 프랑스 파리에만 ‘뱀파이어들의 무도회’ 식의 간판을 단 나이트클럽이 3백여 개나 될 정도다. 고딕파 젊은이들의 회합 장소도 튄다. 고딕 열혈 추종자들의 가장 유명한 집결 장소는 파리 페르 라세즈 공동 묘지이다.

고딕 문화에 심취한 일부 청소년은 인터넷상에 ‘난 고딕이야’ ‘난 고딕이 된 지 5년째야’ ‘난 100% 고딕인데, 너는 60%?’ 등의 유별난 대화법을 쏟아놓기도 한다. 100% 정통 고딕파는 화장이나 복장 파티 등 유행만 따르는 ‘사이비 고딕’을 비난한다. 또한 마릴린 맨슨 식의 음악을 무조건 ‘고딕’이라고 정의하는 사람들을 폄하한다.

‘진지한 고딕파’는 문학 회화 예술 역사 철학 전반에 제대로 관심을 가질 것을 당부한다. 진정한 고딕은 고통과 음울함, 비극의 본질 따위에 다가서기 위해 ‘보들레르’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고딕’은 무엇인가. ‘고딕(gothic·gothique)’의 어원은 고대 로마 제국을 침략했던 ‘고트족(Gothes)’에서 유래했다. 고딕 하면, 중세의 카톨릭적 이미지를 먼저 떠올리지만 원조는 ‘이방의 야만족’ 문화이다. 그래서 유럽인들에게는 ‘몰지각’ ‘야만’ 등 부정적인 뜻으로 쓰이다가 18세기 계몽주의 시대에 접어들어서야 실질적인 명사로 확립되었다. 중세의 어둡고 야만적인 이미지를 싫어했던 18세기 유럽인들이 ‘중세 예술’이라는 말 대신 경멸조로 ‘고딕 예술’이라는 말을 붙인 것이다.

그러나 19세기 낭만주의 시대에 들어와 고딕 예술은 새롭게 조명되었다. 고딕 예술의 대표 격인 파리 노트르담 사원을 배경으로 한 빅토르 위고의 작품 <노트르담 드 파리>도 그 중 한 예다. ‘중세’라는 단어가 불러일으킨 부정 이미지가 긍정 이미지로 바뀌기 시작한 것은 19세기 말 인상주의파와 20세기초 상징주의 시인들에 의해서였다. 그러나 중세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가 시작된 것은 2차 세계대전 이후 프랑스 역사학자 마르크 블로흐·조르주 뒤비 등을 통해서다. 중세 역시 다른 시대와 마찬가지로 빛과 어둠, 성공과 실패, 행복과 불행이 공존했던 생명력 넘치는 시대로 새롭게 정의되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 프랑스 청소년이 차용한 고딕 이미지는 어둡고 음습한 중세적 이미지다. ‘왜 검은색을 입고, 무섭고 괴기스러운 분위기를 즐기는가’라는 질문에, 고딕파는 ‘사회가 쿨하지 않으니까’라고 답한다. 최근 영화 <반지의 제왕>이나 <해리 포터>가 대인기를 누리고 있는 것도 이같은 흐름과 무관치 않다. 흔히 중세 문학은 기적과 신비주의, 환상, 상상 동물, 요정, 영혼 등이 총동원되어 기괴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묘지, 거센 바람이 부는 언덕, 안개로 뒤덮인 계곡과 거대한 성, 미로와 같은 음습하고 좁은 길, 거대한 성곽 건물의 마룻바닥 삐걱대는 소리 등이 중세 판타지 문학의 단골 메뉴다.

중세에 대한 관심은 최근 프랑스 학계에서도 일고 있다. 프랑스의 대중적인 역사 전문 잡지 <이스투아르(Historie)>는 2004년 신년호에서 ‘아름다운 중세’를 특집으로 실었다. 또한 프랑스 독일의 문화 교양 채널 <아르테(Arte)>는 ‘중세의 삶’이라는 다큐멘터리 대작을 지난 1월 11일과 18일에 10여 시간에 걸쳐 방송했다.
학계의 관심은 유럽 대륙의 정체성 찾기에서 촉발된 것으로 보인다. 2004년 5월이면 헝가리 폴란드 체코 등 옛 공산권 나라 10개국이 새로 유럽연합에 가입한다. 총 25개국 4억5천만 인구를 거느린 거대 유럽이 경제 사회 문화 공동체로서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 중세를 돌아보는 유럽 지식인의 고민은 바로 여기에서 시작되는 것이다.

역사학자들은 특히 12~13세기 중세를 주목한다. 이 시기는 도시 및 상업 발달, 고딕 예술의 절정, 대학 탄생 및 지식 산업의 성장 등으로 르네상스의 태동을 예고한 생명력 넘치는 시대였다. <아르테>는 중세를 대표하는 수도사·음유 시인·성당 건축사 등을 통해 중세의 삶을 재조명하기도 했다. 특히 중세 수도사들을 카톨릭 문화의 주인공이라기보다 수학·자연 과학 등 학문 발달의 중심 세력으로 새롭게 부각한 점이 두드러졌다. ‘신앙’과 ‘과학 세계’의 경계에서 고군분투한 중세 수도사들에게서 호기심 강한 르네상스적 인간, 근대 지식인의 초상화를 미리 찾아볼 수 있다는 해석이다. 연구자들은 중세는 ‘어둠’이 아니라 오히려 ‘빛’이었다고 강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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