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엿보기’에 빠진 프랑스 방송
  • 스트라스부르·류재화 통신원 ()
  • 승인 2004.02.1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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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 아카데미> 등 ‘리얼리티 쇼’ 인기…“약자 짓밟기” 반대 소리도 높아
청춘 남녀 10여 명이 한 밀폐된 공간에 들어간다. 이들은 같이 먹고, 자고, 대화하고, 논다. 얼마 후,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을 한 명씩 지명한다. 표가 가장 많이 나온 두 사람을 놓고 이젠 대중(시청자)이 한 명을 지목해 쫓아낸다. 최후의 1인이 남을 때까지 서바이벌 게임은 계속된다. 최종 승자는 상금을 거머쥐고 스타가 된다.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 미국 등 전세계를 강타하고 있는 ‘리얼리티 쇼’의 기본 공식이다. 21세기 텔레비전 오락 프로그램의 혁신이라 할 ‘리얼리티쇼’가 토크 쇼를 밀어낸 지 이미 오래다. ‘리얼리티의 강도를 더욱 높일 것’ ‘아울러 민주주의를 부활시킬 것’. 리얼리티 쇼가 내건 슬로건이다. 이미 떠 있는 ‘별’은 더 이상 재미가 없으므로 내가 직접 ‘별’을 만들어 즐기는 진정한 민주주의 시대를 이루자는 것이다. 방송사-참가자-시청자 3자 공모 체제, 이것이 리얼리티 쇼의 엔진이다.

프랑스에서는 현재 15개 이상의 리얼리티 쇼가 성황리에 방송되고 있다. 리얼리티 쇼라는 말 대신 프랑스에서는 ‘텔레-레알리테(tele-realite)’라는 말을 쓴다. 텔레와 레알리테 사이에 그어진 하이픈은 두 낱말 조합의 모순을 내포한다. 일단 카메라로 찍히는 것을 의식하고 행동하는 이상, 그것이 진짜 실제일까. 그러나 사전에 이 단어가 오를 날도 멀지 않았다.

<스타 아카데미> 관련 음반·의류 ‘대박’

황금알을 낳는 거위가 된 이 프로그램들에 각 방송사가 쏟는 애정은 각별하다. 프랑스 최대 민영 공중파 TF1이 3년째 내보내고 있는 <스타 아카데미>는 이제 보통 명사가 되었다. TF1은 <스타 아카데미>가 개시되는 9월이 되면 화면에 ‘카운트다운’을 띄울 정도로 속내를 드러낸다. 지난해 말 불황에 허덕이던 크리스마스 선물 시장에서 그나마 재미를 본 것은 <스타 아카데미> 관련 상품들이었다. 어른들은 상술을 경계하면서도 어린 자식들의 등쌀을 견뎌내지 못한다. 어린 마니아들은 똑같은 상품이더라도 <스타 아카데미> 라벨이 붙은 것을 고집한다. 음반은 물론 옷·노래방 기기·장난감·과자·콘프레이크에 이르기까지 종류도 다양하다.

<스타 아카데미>는 스타 가수를 만들어내는 프로다. 젊은 가수 지망생 16명이 4개월 동안 ‘성’에 들어가 동고동락한다. 곳곳에 배치된 카메라가 이들의 모든 생활을 포착한다. 노래·춤·연기·체육 등 수업 과정은 물론 연애사·잠자리·양치질·키스·설거지·옷 갈아입기까지 모두 보여준다. 보기 좋은 화면을 위한 적당한 시나리오가 기꺼이 개입된다. 재미 없는 장면은 과감히 삭제된다. 이들은 24시간 내내 소형 마이크를 착용하고 있어야 한다. 숨소리까지 잡히는 이들의 일거수 일투족이 4개월간 매일 방송을 타면서 이들은 모두 ‘친구’가 되고, ‘스타’가 된다.

갇히기, 경계, 보상. 일찍이 조지 오웰이 <1984>에서 예감한 이 ‘갇힌 자들’을 위해 제작자들은 심리 치료사도 대기시켜 놓았지만, 이들은 별로 할일이 없다. 성공을 바라는 젊은 야망들은 카메라를 두려워하지 않는 외향적 성격의 소유자들이다. 이들의 경쟁과 스트레스가 시청자들을 흡인하는 주요 요소다.

각 과목 담당 강사들은 시험을 통해 실력이 가장 떨어지는 3인을 지명하고, 시청자들은 전화 투표를 통해 한 명씩 몰아낸다. 매주 토요일 저녁은 ‘학예회’가 있는 날이다. 이 날 생방송 쇼에는 프랑스의 정상급 가수들, 국제적 스타들이 총출동해 이 아마추어들과 함께 열창한다. 머라이어 캐리·엘튼 존·필 콜린스·셀린 디옹이 이미 이 프로에 얼굴을 내밀었다.

TF1과의 사전 공모로 어부지리를 얻는 것은 프랑스 최대 음반사 유니버셜이다. 방송사와 음반사의 합작품으로 태어난 스타는 다시 음반 시장을 점령한다. 이미 하이틴 스타로 자리를 굳힌 1대 우승자 제니퍼에 이어 2대 우승자 놀웬은 조니 할리데이·장-자크 골드만·르노 등 프랑스의 일류 가수들에 이어 올해 가수 최고 소득자 5위에 올랐다.

군소 독립 음반사들은 프랑스 최대 방송사와 최대 음반사의 결탁을 성토하고 있다. 불황을 겪고 있는 프랑스 연극계 ‘임시직’ 예술가들은 생방송 도중 <스타 아카데미> 촬영장에 무단 침입해 ‘지금 당신의 TV를 꺼라!’고 적힌 현수막을 펼쳐들고 시위까지 벌였다. 방송 사고로 생방송은 잠시 중단되었지만, TF1은 전열을 가다듬어 12시부터 새벽 3시까지 다시 생방송을 강행했다.
M6는 2001년부터 <로프트 스토리>로 프랑스에 텔레-레알리테 선풍을 일으킨 바 있다. 하지만 관음주의와 성적 선정성, 실제를 가장한 거짓 등 숱한 논란과 저항에 부딪혀 앞으로의 성공을 점치기 어렵다. 대신 ‘하렘’을 재현한 <바슐러>를 내보내고 있으나 이 또한 약세다. 잘생긴 귀공자 하나가 여러 여자와 동시에 데이트를 즐기며 한 여자를 최종 선택한다. 후보 여자들 사이에서는 질투와 동병상련의 자매애가 싹튼다. 현대판 하렘과 다름없는 이런 황당한 도식은 역겹다는 평가를 받았다.

‘보이코티(boycottyes. com)’를 비롯한 텔레-레알리테 안티 사이트들도 왕성하게 활동 중이다. 이미 수많은 인쇄 매체들이 텔레-레알리테의 위해성과 상업성을 지적했다. ‘속물적 취미’와 ‘무지’를 조장하는 이 프로들을 보이콧하자는 고등학생 전문 잡지도 많다. 사회심리학자들은 이런 프로들이 현대적 ‘악의 꽃’을 확대 재생산하고 있다고 우려한다. 관음증과 자폐증 조장은 물론, 한 집단이 공조해 약한 개인을 ‘제거’하는 집단주의적 횡포를 당연하게 받아들이게 만든다는 것이다.

그러나 텔레-레알리테의 인기는 더 높아지고 있다. 방송사들은 새로운 변종 형식을 개발하기에 여념이 없다. TF1은 최근 <스타 아카데미>의 여세를 몰아 <36시간>이라는 제목의 새로운 텔레-레알리테를 선보이겠다고 나섰다. 이번에는 참가자가 정치인이다. ‘정치-레알리테(Politique-Realite)’라는 새로운 신조어를 만들어보겠다는 포부다. 유명세가 덜한, 수면에 가려진 한 정치인의 일상 생활을 공개함으로써 새로운 정치 스타를 발굴하겠다는 의지다. 기획진들은 정치인과 기자 간의 결탁 관계를 끊어버리고, 시민과 정치인 사이에 직접 다리를 놓는 ‘시민 프로그램’이 될 수 있다고 자부한다. 그러나 프랑스의 한 인터넷 여론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70%가 정치-레알리테가 정치를 희화화할 것이라며 반감을 표했다. 라파엘 총리도 그 프로에 웬만하면 나가지 말라고 장관들을 설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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