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보수당 시대 “날 저물었다”
  • 런던·韓准燁 편집위원 ()
  • 승인 1997.01.3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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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야당 노동당 올봄 총선에서 승리 유력…흠집내기 폭로전 가열
‘97년 5월2일 아침, 영국의 내로라 하는 정치 평론가들과 선거 관측통들은 자살하거나 수도원으로 은둔한다. MORI·NOP·ICM은 물론 미국의 갤럽 등 국내외의 주요 여론조사 기관들은 자진 폐업을 선언한다’.

아직 확정되지는 않았지만 총선일로 가장 유력해 보이는 5월1일 다음날 아침, 패색이 짙던 메이저 총리가 극적으로 승리해 재집권에 성공했다는 뉴스를 접하게 될 경우를 가정한 주간 <이코노미스트>의 최근 예측 기사이다.

그러나 권위를 자랑하는 영국의 정치 관측통들과 여론조사 기관 관계자들은 <이코노미스트>가 상정한 이같은 ‘작문 기사’를 믿지 않는다. 토니 블레어 노동당 당수가 갑작스레 죽거나 북아일랜드 사태가 극적으로 타결되어 메이저 총리가 분쟁의 땅 북아일랜드에 영구적인 평화를 정착시킬 경우와 같은 이변이 생기지 않는 한 메이저가 승리할 가능성은 거의 없기 때문이다.

대다수 언론 ‘노동당 정부 출범’ 기정사실화

60년 전통을 자랑하는 이들 여론조사 기관들과 대부분의 언론은 새해 들어 ‘보수당의 총선 패배, 노동당의 승리’로 97년 상반기 정국을 전망하면서, 노동당 정부 출범과 이에 따른 정치·경제·사회 각 분야의 변화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선> 등 친보수당계 신문까지 포함된 대부분의 언론이 92년 총선거 때 겪은 여론조사 기관의 부정확한 예측 소동에도 불구하고 현재 나타난 여론조사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 이번에는 아예 ‘노동당 정부 출범’을 기정사실화하고 있다.

1월8일 유력 일간지 <가디언>과 여론조사 기관인 ICM이 합동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보수당이 남은 선거 기간에 야당인 노동당을 추격하기는 난망하다. 비록 96년 12월보다 노동당의 인기가 2% 정도 떨어지기는 했지만, 아직도 국민의 거의 반수에 이르는 48%가 노동당에 지지를 보내고 있다. 반면 지난해 가을 이후 각종 선거 공약에도 불구하고 보수당 지지도는 거의 변화가 없는 31%에 머물렀다. 92년 총선거에서는 선거 4개월 전인 91년 크리스마스를 전후해 양당 인기 지지율이 노동당 44%, 보수당 38%를 보였었다.

영국 언론들이 보수당의 실패를 점치는 또 한 가지 이유는 메이저 총리 개인의 인기 하락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보수당 인기보다 자신의 인기 덕택에 92년 총선 막바지에 노동당의 위세를 꺾고 승리했던 메이저는 지난 5년 동안 인기가 계속 떨어지고 있다.

돌이켜보면 90년 11월 역시 유럽 통합 문제를 둘러싼 당 내분으로 하야한 대처 총리의 후광을 업고 당권 경쟁에서 어렵사리 이긴 메이저 총리는 첫 1년4개월을 총리직 수습 기간으로 보냈다. 이어서 92년 4월 총선에서 메이저는 노장인 닐 킨녹 노동당 당수의 도전에 맞서 실질적인 집권을 향한 첫 선거전을 치렀다. 다행히 메이저는 52% 지지율을 확보해 당시 노동당의 정권 탈환을 점쳤던 여론조사 기관들의 예상을 뒤엎고 승리했다. 79년 하원에 진출한 메이저는 자신의 18년 정치 역정에 영욕의 갈림길이 될 97년 총선거에서 92년 역전승을 재현하고자 하지만 현재로서는 난망한 듯하다.

한 가닥 희망이 있다면 <가디언> 여론조사 결과 ‘어느 당이 더 바람직한 경제 정책을 제시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에 보수당이 지난 한 달 사이에 4%나 상승세를 보여 29%의 지지를 받고 있다는 점이다. 연말 연초의 활발한 국내 시장 경기가 말해주듯 영국은 유럽연합 국가 가운데 가장 안정적인 경제성장을 기록하고 있다. 게다가 낮은 인플레와 해외로부터의 투자 증가, 국내 실업률 감소 등에 힘입어 처음으로 경제 분야에서 보수당에 대한 평가가 크게 호전되고 있는 반면, 노동당은 2% 하락세를 보여 32%를 기록하고 있다.

흥미로운 점은, 이번 영국의 총선거전에 사상 처음으로 미국이나 한국에서 그동안 판쳤던 ‘네거티브 선거전’양상이 펼쳐질 조짐을 나타나고 있다는 사실이다. 즉 상대방에 대한 인신 공격이 고개를 들면서 상대 당 의원들의 섹스 추문과 사생활의 치부를 까발리는, 정책 대결이 아닌 상대방 흠집 내기 폭로전이 차츰 가열되고 있는 것이다.이런 가운데 양당은 유명인의 추문과 비리를 이 잡듯이 잡아내어 타블로이드 언론에 팔아넘기는 정보사냥꾼들까지 동원하고 있다. 양당의 당수는 새해 들어 한 차례씩 공식 기자회견을 통해 표면적으로는 건전한 정책 대결 모습을 유권자들 앞에 보였다.

현재 처진 인기를 만회하기 위해 메이저 총리는 △자신의 재임중 이룩한 경제성장과 안정의 성과를 크게 부각하고 △앞으로 보수당의 연속 집권으로 더 많은 일자리를 창출할 것이며 △더 많은 복지 지원과 함께 법과 질서를 엄격히 수호하겠다고 다짐했다.

토니 블레어 노동당 당수도 1월8일 기자회견에서 메이저 총리의 아킬레스건인 지도력 부족과 당내 분열을 거론하면서 자신의 강한 리더십을 크게 부각했다. 블레어 당수는 특히 보수당의 약점인 학교 교육 실패, 법과 질서 문란, 도덕 타락 등을 이번 선거의 최우선 쟁점으로 끌어내는 데 일단 성공했다.

한편 양당의 새해 첫 예비선거 전초전은 요란한 선거 포스터와 선거 방송 대결로 치닫고 있다. 보수당은 노동당의 집권이 곧바로 증세와 주택마련 융자금의 이자 부담 증가, 그리고 일자리 감소 사태를 의미하는 것이라며 반노동당 기치를 높이 들고 있다.

이에 맞서 노동당측은 ‘장기 집권 신물난다’ ‘믿지 못할 보수당, 선거 후엔 높은 세금’이라는 구호로 맞서며 장기 집권 후유증을 부각하고 과거 공약 파기 기록까지 상기시키고 있다. 이같은 양대 정당의 전통적인 선거 홍보전에 뒤질세라 영국의 텔레비전 방송사들은 미국식 텔레비전 토론 실현을 구체화하고 있다.

미국의 예에서 보듯이 텔레비전 토론은 건전한 정강 정책이나 후보자의 인격과 진실의 대결이 아닌 스타일과 이미지의 대결, 내실보다는 겉모양의 경쟁으로 치달아 인신 공격 위주의 네거티브 선거전을 조장하는 측면이 있다. 특히 2천만 시청자가 지켜볼 영국 정치 사상 첫 후보자간 텔레비전 대결은 3월 초 있을 위잘·사우스 선거구의 보궐선거 결과에 따라 총선 날짜가 3월20일, 4월10일, 5월1일 중의 하나로 결정되는 대로 두세 차례 치러질 전망이다.

이미 의사당의 하원 총회에서 총리를 향한 질문 시간에 메이저와 블레어의 직접 대결이 텔레비전을 통해 생중계되고 있으나, 사상 최초로 시도되는 텔레비전 토론 결과에 따라 중산층의 부동표가 적지 않은 영향을 받을 것으로 전망된다.

노동당의 유럽 통합 찬성, 변수로 작용할 수도

극좌 및 골수 노조 세력, 그리고 사회주의를 고수하려는 노장파들로부터 ‘전제주의적 스탈린식 지도자’라는 강한 비판까지 받고 있는 블레어 노동당 당수는 상대적으로 유연하고 민주적인 통치 스타일을 지니고 있다는 메이저에 비해 텔레비전 토론에서 열세라는 지적도 있다.

특히 미남형의 깔끔한 외모에도 불구하고 여성 유권자들은 블레어의 정직성과 성실성이 메이저에 비해 낮다고 평가한다. 블레어는 이같은 약점을 텔레비전 토론 전까지 떨쳐버리기 위해 유연한 이미지 제고와 함께 새로움과 젊음, 변화를 추구하는 젊은 유권자들의 심리를 최대한 북돋우고 이를 선거 당일까지 유지해 나가는 전략을 구사할 것으로 보인다.

이에 맞서 메이저 총리는 유럽 통합에 관한 청사진을 구체적으로 제시하지 않고 있는 노동당의 기회주의적인 약점을 집중 공격해 나갈 것으로 보인다. 특히 선거 때까지 유럽 단일 통화 채택 문제에 대한 정부의 입장을 분명히함으로써 독일·벨기에·프랑스 등 유럽통합 연방주의 세력에 대항해 영국의 주권과 국익을 최대한 지켜냈다는 긍정적인 평가를 유권자들로부터 끌어낼 것이 확실하다.

현재 유권자의 30% 이상이 당장 유럽연합을 탈퇴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고, 3분의 2 이상이 유럽 단일 통화에 반대하고 있다는 점에서, 메이저의 선거 전략이 유권자에게 먹힐 경우 유럽 통합 찬성을 당론으로 천명한 노동당은 적지 않은 타격을 입게 된다. 그럼에도 오는 상반기 중에 실시될 총선에서 만년 야당인 노동당이 보수당을 누르고 집권할 수 있을 것으로 대다수 전문가들은 내다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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