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BC ‘도덕재무장’ 선언은 술책인가
  • 런던·韓准曄 편집위원 ()
  • 승인 1996.12.1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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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립 60돌 맞아 ‘시청자 헌장’ 공포…고품질 방송 약속 언론·학자·정치인은 “시청료 인상용 空約” 일제히 비난
지난 11월2일 영국 BBC 방송은 첫 전파를 쏘아올린 지 60번째 되는 생일을 맞았다. 22년 첫 라디오 방송에 이어 14년 만에 지구촌에 텔레비전 시대의 막을 연 BBC는 대영제국의 전통과 권위의 살아 있는 계승자이자 세계 공영 방송의 효시로, 또 공정 보도의 대명사로 전세계에서 공인받고 있다.

텔레비전을 통해 지구촌의 다양한 소식을 안방에 끌어들임으로써 인류의 생활 전반에 일대 변혁을 몰고온 BBC는, 지난날의 명성과 업적을 자랑스레 되새길 수 있는 회갑연을 자축하기에 앞서 21세기의 새로운 미디어 환경에서 살아 남기 위한 자구책을 마련하느라 바쁘다.

BBC가 지난 2년 동안 50만파운드(약 6억8천만원)를 들여 시청자를 상대로 해온 광범위한 여론조사와 전문가의 조언, 그리고 자체 연구기관의 종합 분석을 거쳐 지난 11월5일 발표한 ‘시청자를 향한 공약’은, 일련의 자구책 가운데 가장 심혈을 기울여 내놓은 노력의 산물이다.

‘품위·공정성’ 2대 강령에 2백50 항목 개혁 약속

전세계 텔레비전 방송사 가운데 처음으로 공식 문서화한 ‘시청자 헌장’을 제정·공포했다고 자부하는 BBC는 이 공약에서 무려 2백50개 항목에 이르는 갖가지 약속을 시청자에게 엄숙히 선언했다. 50쪽에 이르는 이 공약 문서는, 공익 실현을 위해 설립된 BBC라는 공익 법인이 수혜자인 시청자를 향해 ‘품위’와 ‘공정성 유지’를 2대 강령으로 내세우면서 2백50가지 세부 약속을 제시했다.

이 가운데 영국 언론들이 크게 부각하고 있는 공약의 핵심은, 먼저 청소년들을 폭력과 무절제한 성의 범람으로부터 차단하고 건전한 언어 생활을 유도하기 위해서, 청소년들의 텔레비전 시청 불가 시간대인 밤 9시 이전에는 폭력과 남녀의 성적 유희를 담은 프로그램을 결코 방영하지 않겠다고 약속한 것이다.

또 여야 정치인의 권위와 사생활을 존중한다는 차원에서 기자와 대담 프로의 사회자가 인신 공격적인 인터뷰를 지양하고, 각종 프로에서 폭력 행위와 욕설 및 음란성 대화를 추방할 것도 다짐했다.

미국의 값싸고 질 낮은 폭력 영화나 저질 쇼 프로그램의 침투를 막기 위해 국내 제작물 방영 비율을 80% 이상으로 늘리고, 소수 유색 인종을 위한 프로그램을 확대하며, 황금 시간대에 다큐멘터리나 시사·보도 방영률을 더욱 높이겠다고 밝혔다. 특히 BBC는 시청자들의 불만 처리를 최대한 20일 이내에 끝내기로 의무화했다.

그러나 이 시청자 헌장은 즉각 경쟁 방송사들의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상업 방송 1TV와 채널 4는 이 문서가 BBC의 실체를 왜곡한 거짓 문서라고 주장하며, 허위 공약을 즉각 철회하라고 촉구하고 나섰다.

또 일부 언론학자와 노동당 좌파 정치인들은 BBC의 공약이 시청료 인상을 겨냥한 사전 정지작업일 뿐, 구체적인 실행 방안이 결여된 허황한 공약(空約)이라고 비난했다.

언론들 역시 BBC의 헌장 발표가 지난 8월부터 시작한 시청료 인상 운동의 막바지 작업이라고 평가한다. 특히 시청료 인상률이 최종 결정되는 정부의 각료 회의에 앞서 의사 결정의 주요 관건이 될 국민의 지지를 얻으려고 BBC측이 총력을 쏟았다고 보도하고 있다.
이같은 언론의 분석은 BBC의 최고 의사 결정 기관인 경영위원회 위원장 겸 BBC 회장인 크리스토퍼 블란드 경의 발언에서도 간접으로 뒷받침되고 있다. 지난 4월 회장에 취임한 블란드 경은 시청자 헌장 공포에 즈음해 발표한 성명에서 시청자들이 부담하는 시청료가 바로 BBC 재정의 원천임을 애써 강조했다. 동시에 그는 BBC의 실질적 주인인 시청자들은 BBC가 시청료를 효과적으로 사용하는지 여부와 시청자들의 의견을 어떻게 수렴해 반영하는지도 수시로 점검하고 파악할 권리가 있다고 주장했다.

프로그램 제작 및 방송 운영 전반에 필요한 재원을 전적으로 시청료에 의존하는 BBC는 27년 이후 시청료 액수 결정을 정부측에 맡겨 왔다. 현재의 시청료는 지난 4월 조정된 것으로 컬러 텔레비전이 연간 89.50파운드(약 12만원), 흑백 텔레비전이 30파운드(약 4만원)이다. BBC측은 제작비와 인건비 상승 요인을 감안해 98년 내에 적어도 백파운드(약 14만원) 선까지 시청료가 인상되어야 한다는 입장이다.

95~96 회계 연도의 경우, 전국의 시청료 징수 대상 텔레비전 수상기는 모두 2천1백72만8천대로, 징수 경비를 제외한 연간 시청료 순수입은 17억2천4백70만파운드(약 2조4천억원)를 기록했다. BBC의 시청료 수입은, BBC 오픈 유니버시티 등 방송 대학 운영에 따른 수입과 BBC 월드서비스를 주축으로 한 상업 활동으로 벌어들이는 수입을 포함한 전체 총수입의 약 80%를 차지하고 있다.

위의 수치가 말해주듯 BBC는 최근 늘어나고 있는 상업 분야 활동에도 불구하고 아직 대부분의 재정을 시청료 수입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실정이다. 따라서 환갑을 맞은 BBC의 앞날은 90년대 초 이래로 단행한 조직 개편 및 축소와 경영 혁신 작업을 계속하면서 늘어나는 제작 및 운영 경비를 충당하기 위해 시청료 수입 이외에 제2의 수입원을 발굴해야 할 처지이다.

이를 위해 BBC의 내부 문서는 5년 동안 경영 및 제작 혁신의 일환으로 채택한 프로듀서 초이스, 즉 프로듀서 독립 채산제를 시행한 결과, 무려 5억파운드(약 7천억원)의 비용을 절약했다고 밝히고 있다.

존 버트 총국장이 지휘해온 조직 개편 및 프로듀서 초이스를 통해 91~95년에 6천여 명이 감축되었다. 버트 총국장의 이같은 노력은 위성 및 케이블 TV를 비롯한 각종 상업 텔레비전 다중 채널의 출현으로 갈수록 치열해지는 시장 경쟁 환경에서 BBC가 살아 남기 위한 고육지책으로 평가된다. 그러나 문제는 대부분의 BBC 기자와 프로듀서 노조들이 버트의 과격한 혁신 및 기업식 경영에 강한 불만을 갖고 있다는 점이다.

연말에 불어닥친 청교도적인 도덕재무장 바람으로 앞으로 각종 드라마나 수사물의 대본을 수정해야 하는 유명 프로듀서들은 벌써부터 제작 위축을 염려하고 있다.

이같은 제작진의 불만에는 아랑곳없이 보수당 메이저 정부가 BBC의 시청자 헌장 공포와 때를 같이해 벌이고 있는 텔레비전 폭력 및 성적 유희물을 막기 위한 캠페인은 앞으로 총선거가 가까워 올수록 강도가 높아질 조짐이다.
‘60년 전통’만으로는 상업 방송 못당해

60년이 흐르는 동안 영국 도덕의 수호자로 자처해온 BBC의 순수한 전통은 더 이상 이윤 추구를 앞세운 상업주의 방송의 경쟁과 도전에 맞설 수 있는 무기가 아니다. 이같은 사실은 새해부터 전파를 타는 디지털 텔레비전과 새 상업 방송인 채널 5가 등장함으로써 확실하게 입증된 상태다.

이미 BBC의 시청률은 89년의 50% 선에서 95년에는 43%로 떨어졌다. 또 96년 4월 현재 다섯 집 가운데 한 집이 위성 및 케이블 TV를 보유해 그 시청률이 10%에 육박하고 있다.

BBC는 아직까지는 가장 오랜 역사와 전통에 훌륭한 인적 자원, 이들이 제작해 내는 질 높은 프로그램과 국제적인 명성 등으로 1TV를 비롯한 국내 상업 텔레비전을 인기 면에서 앞지르고 있다. 특히 2003년까지 보장되어 있는 시청료 확보 등으로 비록 내년 총선거에서 보수당이 패하고 노동당이 집권한다 해도 BBC의 공사(公社) 성격에는 변동이 없을 것이 확실하다.

그러나 기존 이점을 유지하기 위해 BBC는 이미 BBC의 영역을 침범하면서 텔레비전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하고 있는 위성 방송 ‘BSkyB’의 소유주인 언론 황제 루퍼트 머독의 다국적 미디어 그룹처럼 사업적 수완을 시급히 발휘해야 할 것으로 지적되고 있다.

BBC가 시장 경쟁 원리를 도외시한 채 국민의 세금에 의한 수입에만 의존할 경우 60년 세월의 타성과 무기력 때문에 자칫 화석처럼 굳어 버리는 과거의 유물로 전락할 수 있다는 경고도 나오고 있는 실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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