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림의 석양 바라보며 눈물 짓는 ‘늙은 사자’
  • 파리·고종석 편집위원 ()
  • 승인 1996.12.1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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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아프리카서 영향력 쇠퇴… 미국이 ‘빈 자리’ 차지
특히 이들 나라의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은 프랑스에 대해 매우 적대적이다. 그래서 아프리카는 사하라 사막을 중심으로 이북의 아랍권과 이남의 ‘블랙 아프리카’로 확연히 구분된다. 또 프랑스는 옛 제국주의 국가들 가운데 예전의 식민지들과 가장 굳게 연대를 유지하고 있는 나라다. 적어도 2년에 한 번씩 프랑스-아프리카 정상회담이 열리는 것이 그 증거다.

프랑스는 아직도 아프리카의 가장 중요한 투자국이고, 프랑스인이 15만명이나 아프리카에 산다. 시라크는 지난해 5월 대통령에 취임한 이래 네 번이나 아프리카를 방문했다. 이들 나라와 프랑스 사이에는 정서적인 유대도 강하다. 그 유대의 가장 커다란 고리는 말할 나위 없이 이들 나라의 공용어인 프랑스어다. 콩고의 수도 브라자빌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프랑스 본토가 독일에 점령되어 있을 때 드골이 이끈 자유 프랑스의 수도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제는 프랑스가 아프리카의 유일한 후원자이던 시절은 지났다. 우선 국내의 경제난도 해결하지 못하는 처지인 프랑스가 아프리카에 경제 지원을 할 수 없다는 점이 가장 큰 이유다. 거기다가 군사적·정치적 이유도 있다. 르완다·자이르·부룬디·소말리아를 포함해 많은 나라에서 종족 분쟁이나 정치 분쟁이 일어나 사람들이 죽어가는데도 프랑스는 여기에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프랑스 문화의 영향력은 건재

불완전한 상태로나마 민주주의가 정착되어 가는 이 나라들은, 이제 프랑스 대신에 미국을 경제·정치·군사 분야의 중요 파트너로 삼으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자이르에서 머지 않아 모부투 독재 정권이 종식을 고하고 정치가 안정을 찾게 되면, 각종 광물이 무진장 매장된 이 나라가 사하라 사막 이남에서 경제 중심지가 될 가능성이 크다. 프랑스 정부가 최근 자이르 쪽에 각별히 신경을 쓰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정치 분야에서 아직까지 프랑스는 이 나라들에 상대적으로 영향력이 있다고 할 수 있다. 냉전이 끝난 뒤, 동서 두 진영으로부터 동시에 버림받은 이 나라들을 국제 무대에서 줄기차게 변호하는 나라가 프랑스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번 정상회담에서도 시라크는 민주주의를 정착시키는 것이 아프리카가 국제 무대에서 발언권을 키울 수 있는 가장 중요한 힘이라고 강조했다. 물론 그 모든 것이 이 지역에서 패권을 유지하려는 프랑스의 국가 이성에 근거하고 있음은 말할 나위가 없다.

그러나 프랑스가 시도하는 그런 주도권 행사는 경제적·군사적 뒷받침을 받지 못하고 있다. 아직도 프랑스는 국민총생산의 0.64%를 아프리카 원조에 쓰고 있어서 세계 어느 나라보다 아프리카 국가에 돈을 많이 투자하고 있다. 그러나 예전에 프랑스의 이름으로 전해지던 이런 원조가 이제는 다른 유럽 국가들과 한묶음이 되어 유럽연합(EU)의 이름으로 행해지고 있어서 생색을 내기가 힘들다. 대체로 유엔의 깃발 아래 이루어지는 군사 개입도 마찬가지다.

물론 아직까지는 사하라 사막 이남의 아프리카에서 프랑스가 경제적 주도권을 쥐고 있다. 올해 이 나라들은 8백억 프랑(약 13조원)어치의 소비재와 생산재를 외국에서 수입했는데, 프랑스의 시장점유율이 21%로 미국·일본·독일을 앞지르고 여전히 수위를 지켰다. 프랑스 기업 1백89개가 사하라 사막 이남에 들어가 있다. 그러나 프랑스에서 새로운 투자자들이 더 나타나지 않는 데 견주어, 미국은 투자를 확대하며 아프리카 시장을 점점 잠식하고 있다.

보스니아에서 비행기 사고로 죽은 미국의 전 상무장관 론 브라운은 95년에 이미 아프리카 시장이 10년 전의 라틴 아메리카 시장이나 15년 전의 아시아 시장과 맞먹는 잠재력을 지니고 있다고 평가하며, 아프리카 시장에 대한 미국의 관심을 확인한 바 있다. 미국은 프랑스가 따라잡을 수 없는 원거리 통신 기술을 이들 나라에 부분적으로 이전하며 주로 산유국들을 파고들고 있다.

콩고에서 독점적 지위를 지녔던 프랑스 석유화학회사 엘프는 이제 미국 기업들과 시장을 반분하고 있고, 가봉과 앙골라에서도 미국의 기세가 프랑스를 위협하고 있다. 거기에다가 만델라 집권 이후에 국제 무대에 새로 등장한 남아프리카가 말리·코트디부아르·시에라리온·앙골라 등의 광산업에 끼여들고 있다.

96년 12월 현재 프랑스는 사하라 사막 이남에 군 병력 8천30명을 주둔시키고 있다. 나라 별로 보면 지부티에 3천2백명, 중앙아프리카에 1천5백명, 세네갈에 1천3백명, 차드에 8백40명, 가봉에 6백명, 코트디부아르에 5백30명, 카메룬에 60명이다.

이들 가운데 몇몇 나라에서는 아직도 프랑스군이 정국 안정에 안전판 구실을 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예컨대 중앙아프리카에 주둔하고 있는 프랑스군은 올해만 해도 세 차례나 출동해 93년 10월에 선출된 앙주 파라세 대통령을 쿠데타군으로부터 지켜냈다.

아프리카 국가들이 한편으로는 군사 분야의 독립을 갈망하면서도 프랑스군의 우산 아래서 정국 안정을 꾀하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아프리카에 대한 미국의 관심이 커지면서, 이제는 더 이상 프랑스군이 아프리카에 주둔하는 유일한 외국 군대는 아니게 되었다. 지난해 9월 세네갈군이 자기 나라에 주둔한 프랑스군을 제치고 미국과만 합동 훈련을 했을 때 프랑스는 세네갈에 불쾌감을 표시했지만, 그렇다고 무슨 압력을 가할 수단도 없었다. 시대가 바뀐 것이다.

문화는 아직도 프랑스가 아프리카에서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분야다. 만약에 술 문화도 문화라고 인정한다면 더욱 그렇다. 매년 가을 프랑스에서 새 보졸레 포도주가 출하되자마자 아프리카의 모든 수도에서도 동시에 보졸레 시연회가 열린다.
미국과 영어, 모든 대륙에서 패권 잡는가

더구나 프랑스어는 대부분의 아프리카 나라에서 공용어이거나 교육 언어다. 프랑스 교육부의 교육 프로그램 그대로 교과 과정을 짜고 있는 중고등학교도 백 군데가 넘는다. 그 가운데는 사립학교 마흔한 군데도 포함되어 있다. 적어도 5만명이 넘는 학생이 프랑스 교육부의 프로그램에 따른 교과 과정을 밟고 있는 것이다. 프랑스어 교육을 중심으로 한 아프리카의 교육 문화 분야에 프랑스가 쏟고 있는 돈은 한 해에 19억 프랑(약 3천1백억원)이 넘는다.

그러나 이 분야에서마저 프랑스의 쇠퇴는 이제 거스를 수 없는 대세인 것 같다. 88년에만도 프랑스가 아프리카에 파견한 교사가 만명에 이르렀으나 지금 그 숫자는 1천7백 명에 지나지 않는다. 아프리카 학생들에 대한 프랑스 정부 장학금이 점차 주는 반면에 그를 미국 정부와 각종 재단의 장학금이 대치하고 있다. 이 학생들이 미래의 아프리카를 짊어진다고 생각하면, 미국의 힘이 미래의 아프리카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되리라는 것은 불을 보듯 환한 일이다. 이들은 곧 프랑스어를 포기하고 영어를 자기 언어로 선택할 것이고, 미국의 가치를 내면화하게 될 것이다.

모든 분야, 모든 대륙에서 앞으로 미국과 영어가 패권을 잡으리라는 사실은 돌이킬 수 없이 되어 버린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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