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통신]“노인 정치 신물난다 세대 교체 이루자”
  • 고종석 편집위원 ()
  • 승인 1996.12.1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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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혁명의 상징적 인물인 로베스피에르와 당통이 구체제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권력을 수립한 것은 서른을 조금 넘어섰을 때였다. 보나파르트 나폴레옹이 종신 집정관이 된 것은 서른세 살 때고, 황제가 된 것은 서른다섯 살 때다. 조카인 루이 나폴레옹은 마흔 살 때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시대를 훌쩍 뛰어넘어 74년 대통령 선거에서 지스카르 데스탱이 미테랑을 제치고 엘리제 궁의 새 주인이 되었을 때 그의 나이는 마흔여덟이었다. 우리에게 노정치가라는 이미지로만 남아 있는 샤를 드 골이나 프랑수아 미테랑 역시 정치 활동 자체는 젊은 날에 시작했다. 드 골이 막 해방된 프랑스에서 처음으로 정부 수반이 된 것은 오십대였고, 미테랑이 하원 의원에 당선되고 처음 장관을 맡은 것은 서른을 막 넘겼을 때였다.

국민 80%가 세대 교체 지지

최고 권력자의 나이가 젊다고 해서 정치권 전체의 평균 연령이 반드시 젊다는 법은 없지만, 젊은 정치 지도자가 이끄는 프랑스에 젊은 정치인이 많았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면 지금은? 전임자인 미테랑이 대통령 임기를 마친 것이 일흔아홉 살 때여서 예순네 살인 현직 대통령 시라크가 상대적으로 젊어 보이기는 하지만, 프랑스 정치권 전체의 고령화는 심각한 수준에 이르고 있다.

하원 의원 4분의 1 이상과 상원 의원 반 이상이 60세를 넘겼다. 하원 의원 5백76명의 평균 연령은 53세로 그리 많아 보이지 않지만, 그 가운데 65세를 넘은 사람이 87명이나 되고, 70세를 넘긴 사람도 26명에 이른다. 상원의 경우는 더욱 심해서 3백21명 가운데 70세 이상이 무려 70명이다. 그 가운데 5명은 80세를 넘겼다. 중국이나 예전의 몇몇 사회주의 국가에서와 같은 노인 정치가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여론조사 기관 소프레스와 시사 주간지 <피가로 마가진>이 얼마 전 함께 실시한 여론조사 결과에 따르면, 프랑스인의 80%가 상·하원 후보 자격을 일정 연령 이하로 제한하는 데 동의했다. 국민의 압도적 다수가 정치권의 세대 교체를 지지하고 있는 것이다. 집권 중도우파연합을 구성하고 있는 공화국연합과 프랑스민주동맹 지도부도 정치권의 세대 교체를 위해 의원 후보 자격에 연령 규정을 두어 노인 세대의 은퇴를 유도해야 한다는 데 원칙적으로 합의했다.

특히 공화국연합의 경우 법적 제한을 두는 것이 어렵다면 당헌이나 바람몰이를 통해서라도 98년 의회 선거에 75세 이상 후보자를 내지 않겠다는 방침을 지도부가 이미 정해 놓았다. 그리고 이런 방침은 당의 활동가들과 젊은 의원들로부터 폭넓은 지지를 받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원칙이 실행에 옮겨지게 될지는 알 수 없다. 고령 의원들이 격렬히 반발하고 있기 때문이다.고령 의원들 “세대 교체는 선거 통해서만 가능”

예컨대 올해 89세인 공화국연합 소속 자크 보멜 의원은 후보들의 나이 제한 여부를 최종 결정하는 것은 유권자이지 파리의 당 지도부가 아니라고 말한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세대 교체는 선거를 통해서만 이루어져야 한다는 주장이다. 우리나라 정치권에서 세대 교체의 표적이 되고 있는 정치인들이 내세우는 논거와 비슷하다.

역시 공화국연합 소속으로 올해 77세인 가브리엘 가스페레트 의원은 “20세 때 레지스탕스 활동으로 시작해 사생활을 포기하고 50여 년 동안 계속해 온 조국에 대한 헌신을 연령 제한이라는 강제적 방법으로 중단할 수는 없다”라고 반발한다. 프랑스민주동맹 소속으로 올해 85세인 샤를 에르만 의원 역시 자신의 은퇴를 강요하는 처사는 자기 선거구인 니스를 공산당에게 넘겨주자는 것과 마찬가지라며 당 지도부를 위협한다.

84년 알랭 페리, 르네 보몽 등 40대 의원들이 주동이 되어 의원 후보 자격을 65세 이하로 하자는 법안을 작성했을 때, 의회에서 이 법안이 토론되는 것 자체를 봉쇄한 것도 상·하원에 포진하고 있는 고령 의원들이었다.

알랭 페리 의원은 어차피 후보 자격 연령 제한이 입법되기는 무망하므로, 끊임없이 문제 제기를 해 여론을 환기하여 해당 정치가들과 당 지도부를 압박하는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정치권 개혁과 근대화는 젊은층과 여성에게 좀더 많은 자리를 허용함으로써만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이 이들 젊은 세대의 주장이다.

우리 정치권의 세대 논쟁과는 조금 다른 맥락에서 진행되고 있기는 하지만, 우리와 마찬가지로 노인 지배, 남성 지배가 관철되고 있는 프랑스 정치권에서 이 세대 전쟁이 어떤 양상으로 펼쳐질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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