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패의 여인’ 부토 “2전3기 기대하라”
  • 朴在權 기자 ()
  • 승인 1996.11.2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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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키스탄 정계는 ‘썩은 복마전’… 재집권 얼마든지 가능
“이게 마지막 면회인가?”

“그렇다.”

“(사형)시간은 정해졌는가?”

“교도소 규정대로 새벽 5시다.”

79년 4월3일 파키스탄의 라왈피니 교도소. 죄수가 간수에게 몇 가지를 물어 보더니 면회온 아내와 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는 자기가 죽거든 외국에 나가 편히 지내라고 유언처럼 말했다. 아내와 딸이 절대 떠나지 않겠다고 대답하자, 그는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이튿날 예정대로 교수형이 집행되었다. 죄수의 시신은 매장되었다. 참관하지 못한 가족한테는 뒤늦게 와이셔츠와 유류품 몇 가지가 전달되었다. 그때 스물여섯 살이던 딸은 샬리마 향수 냄새가 밴 아버지의 하얀 와이셔츠를 끌어안고 반드시 복수하겠다고 다짐했다. 2년 전 쿠데타를 일으켜 아버지 줄피카르 알리 부토를 총리 직에서 축출하고, 끝내 교수형에 처한 지아 울 하크 군부에 대한 분노였다.

그로부터 9년 뒤, 지아 울 하크는 원인 모를 비행기 폭발 사고로 사망했다. 곧바로 치러진 총선에서 복수를 맹세했던 딸은 회교권 나라에서 최초로 여성 총리가 되었다. 그가 바로 11월5일 파키스탄 총리 직에서 해임된 베나지르 부토(43)이다.

미국의 케네디가에 비견될 정도로 재력과 정치적 영향력이 큰 부토가의 맏딸 베나지르 부토. 어린 시절 유난히 얼굴이 붉어 ‘핑키’라고 불렸던 그는, 열여섯 살 때 하버드 대학에 입학했다. 온실의 화초처럼 자란 탓에 아무것도 할 줄 모르던 그는, 1년이 지나면서 미국 생활에 적응해 갔다.
남편 자르다니 별명 ‘미스터 10%’

비교정부론을 전공으로 택한 그는, 71년 파키스탄이 동부 벵갈(후에 방글라데시)을 공격해 수십만 명을 학살할 때에는 파키스탄 입장을 변호하기에 바빴고, 베트남전 반대 데모에서는 누구 못지않게 과격한 학생이었다. 회교권 여성이라고는 믿기 힘들 정도로 개방적이고 활달했던 그는, ‘회교 분리주의와 파키스탄의 기원’이라는 논문을 쓰고 우등 졸업했다. 그후 4년간 영국 옥스퍼드 대학원에서 정치학과 경제학을 공부한 뒤, 외교관이 되겠다는 생각을 굳혔다.

77년 6월 그가 옥스퍼드에서 돌아온 지 2주일 뒤에 그의 운명은 전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바뀌었다. 군부의 쿠데타로 총리였던 아버지가 교수형을 당한 것이다. 그 뒤 부토는 교도소 독방에 갇혔다 풀렸다 하는 일을 5년간 되풀이했다.

84년 1월 그는 영국으로 건너갔다. 그곳에서 파키스탄의 정치범 석방을 위해 도와달라고 국제 사회에 호소했다. 국내외에서 비난 여론이 들끓자 지아 정권은 85년 12월 계엄령을 해제했다. 이듬해 4월 부토는 귀국했다.

귀국한 지 얼마 안되어 부토는 자르다니와 결혼하여 또 한번 전환기를 맞았다. 부토는 서구식 교육을 받은 인텔리에다 지아 정권과의 투쟁을 통해 이미 정치 거물로 떠올라 있었지만, 결혼만은 전통적 풍습에 따라 중매 결혼을 했다. 자르다니는 막대한 토지를 갖고 있는 부유한 집안의 아들로 폴로 경기를 즐기는 인물이었다. 87년 12월18일 부토의 집에서 양가 가족이 모인 가운데 조촐하게 결혼식을 치른 후, 그들은 대운동장에 지지자 20만명을 모아놓고 초대형 결혼식을 다시 치렀다.

이듬해 지아가 비행기 폭발 사고로 사망한 뒤 실시된 총선에서 부토가 이끄는 파키스탄인민당이 승리를 거두자, 부토는 35세에 여성 총리가 되었다. 하지만 그는 부패 혐의로 20개월 만에 도중 하차했고, 그 뒤 다시 93년 총선에서 승리해 총리가 되었다. 그런데 이번에 또다시 부패·무능 혐의를 받고 해임된 것이다.

이번에 그를 해임한 파루크 레가리 대통령(56)은 부토가의 오랜 후원자였다는 점에서 눈길을 끈다. 그는 내년 2월3일에 총선을 실시한다고 못박고, 전 국회의장 메라즈 할리드를 임시 총리로 임명했다. 할리드 총리는 부토 세력의 부패를 대대적으로 파헤칠 예정이다. 이에 맞서 부토는 대법원에 해임 무효 소송을 제기해 놓은 상태이다.

레가리 대통령이 밝힌 부토 해임 사유는 부패와 경제 실정(失政)이다. 특히 지난 7월 말 투자장관에 임명되었던 부토의 남편 아시프 알리 자르다니(43)는 정부가 발주하는 사업마다 사례금을 챙겨 ‘미스터 10%’라는 오명을 얻을 정도로 야당과 국민들 사이에서 원성이 자자했다. 지난 한 달 전국에서는 부토 정권의 부패를 규탄하고 퇴진을 요구하는 대규모 집회가 수없이 열렸지만, 부토는 터무니없는 모함이라며 방관해 왔다. 자르다니는 부토가 90년에 실각할 때에도 부패 혐의로 조사를 받았다.

93년 이후 나빠진 경기 상황도 부토가 해임되는 데 한몫 했다. 파키스탄은 한반도의 3.6배나 되는 면적에 1억4천만 명이 살고 있는 대국이지만 경제적으로는 후진 상태를 면치 못하고 있다. 지난해 이 나라의 1인당 국내총생산(GDP)은 4백61달러밖에 안된다. 부토 정부는 경제난을 타개하기 위해 국제통화기금(IMF)으로부터 차관을 빌리려고 했지만, 국내 경제 여건이 갖춰지지 않았다는 이유로 번번이 거절당했다. 루피화를 평가 절하한 것도 인플레이션을 부채질했고, 세금 인상은 국민들의 광범위한 저항을 불러일으켰다. 외채가 급증하고 국고가 바닥날 위기에 처했다.

지난해 파키스탄 남부 카라치에서 최소한 2천 1백명이 살해된 사건의 책임 소재도 분명히 밝혀지지 않고 있다. 카라치는 인구 1천6백만명에 파키스탄 세수(稅收)의 60%를 차지하는 상업·공업 중심지이다. 그런데 지난 47년 인도에서 파키스탄이 분리될 때 인도에서 난민이 대거 넘어오면서 이들을 대표하는 야당 모하지르 카우미 운동(MQM)의 활동이 활발해졌다. 그러자 정부군이 제재를 가했고 그 충돌로 최소한 2천1백명이 살해된 것이다.

게다가 지난 9월 부토의 남동생이자 정적(政敵)인 무르타자 부토(42)가 카라치에서 살해되었다. 무르타자는 81년 파키스탄 항공기를 납치한 죄로 기소되어 있었는데, 88년 총리가 된 누나가 자기를 귀국시키기 위해 아무런 도움도 주지 않자 분개해 했다.

지난 93년 11월 그는 16년 간의 망명 생활을 청산하고 귀국하자마자 경찰에 체포되었다. 지아 정권 시절에 불법 행동을 했기 때문이다. 이듬해 보석으로 풀려난 그는 어머니의 지원을 받아가며 누나에게 도전해 왔다. 그 때문에 무르타자 암살 배후에 자형인 자르다니가 개입되어 있다는 설이 파다하다.
당장 재기할 가능성 희박

현재 부토는 야당뿐 아니라, 집안에서도 고립되어 있다. 과연 그가 두 번째 재기에 성공할 수 있을까. 1차로 그것은 내년 총선에 그가 출마할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 이미 자르다니는 조사를 받고 있는 상태이고, 부토에 대한 조사도 곧 이루어질 전망이다. 그 결과에 따라 부토의 정치적 운명이 결정된다.

하지만 그가 무혐의 처리된다고 하더라도 내년 총선에서 그가 이끄는 파키스탄인민당(PPP)이 전과 같은 지지를 획득하기는 힘들 것으로 보인다. ‘민주 투사’ 이미지만 가지고는 국민을 설득할 수 없기 때문이다. 국민은 부토 시절의 부패와 인플레이션, 높은 세금과 실업에 진저리를 치고 있다. 따라서 당장 재기할 가능성은 희박해 보인다.

그러나 멀리 보면 낙관적이다. 파키스탄에서 부패는 정치인뿐만 아니라 관료 사회 전반에 퍼져 있는 고질이다. 지금 부토를 궁지로 몰아넣고 있는 제1 야당 파키스탄회교연맹(PML)의 나와즈 샤리프 당수도, 93년 부패 때문에 총리 직에서 쫓겨난 인물이다. 따라서 부토의 부패 혐의가 사실로 판명난다 하더라도 그가 다시 권력을 잡을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

부토와 자르다니는 한 달 뒤면 결혼 9주년을 맞는다. 이들은 자녀를 셋 두었다. 이들의 결혼 9주년은 우울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이들이 삼기(三起)에 성공할 수 있을지는 두고보아야 알겠지만 부패라는 단어를 빼고 설명할 수 없는 파키스탄의 정치 현실은 쉽게 바뀔 것 같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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