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리도 못가 발병 난 베트남의 ‘도이 모이’
  • 워싱턴/변창섭 (cspyon@sisapress.com)
  • 승인 1996.11.2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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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방 10년 됐지만 ‘가장 위험한 투자국’ 오명 못 벗어
얼마전 베트남에서 한 노학자를 만났을 때, 그는 근심스런 표정을 지으며 자기가 풍부한 중국 문학의 보고에는 한없는 매력을 느끼지만 한때 베트남을 지배했기 때문에 중국 사람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60년대 베트남 정글에서 미군을 상대해 6년이나 투쟁했다는 또 다른 중년 학자는 전쟁의 기억을 지워버리고 싶어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그는 “우리는 미국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싶은데 도무지 미국의 마음을 알 수 없다”라고 말했다.

베트남 어디에 가도 내가 만난 지식인들은 2차대전 때 베트남을 점령했던 일본이 이번에는 베트남의 허약한 경제를 점령하는 것이 아닌가 걱정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또한 일본을 중국의 견제 세력이자 베트남의 경제 재건에 필요한 자금과 기술의 원천으로 간주했다.

외국 자금·기술 들어와 악영향 끼칠까 개방에 소극적

또 다른 베트남인들은 78년 베트남이 캄보디아를 침공한‘전력’ 때문에 동남아시아인들이 베트남에 대해 의구심을 품고 있는 사실을 잘 알았다. 그러면서도 동남아시아인들은 베트남의 급속한 경제 성장을 본받고 싶어한다고 말했다. 이들은 과거 베트남을 점령했던 프랑스인들을 혐오하면서도, 프랑스와 다른 유럽 나라들이 베트남에 대해 원조를 하고 투자도 할 수 있는 나라라고 간주했다.

요즘 베트남은 오랜 무력감에서 벗어나 아시아에서 새로운 외교 정책과 필요한 역할을 찾느라 분주하다. 그러나 아직 외교 정책의 목표나 방향이 모호하다. 그 때문에 외국인 투자에 대한 정책도 명확하지 않다. 베트남 정부는 한편으로는 외국의 자금·기술·경영 기법을 들여오기를 원하면서도 그에 따라 민주주의와 사기업 문화가 사회주의국인 베트남에 악영향을 끼치지 않을까 염려하고 있다.

옛 소련 정부가 91년 연방이 와해된 뒤 베트남에 대한 원조를 중단하자 베트남 정부는 모스크바와의 연대에서 벗어나 평화 공존 정책으로 전환하기 시작했다. 당시 베트남 공산당 응유엔 반 린 서기장은 “우리는 정치·사회 체제와 상관없이 모든 나라와 동등하고도 상호 호혜적인 협력을 지지한다”라고 선언했다. 그러나 공약을 실천하기란 말처럼 쉽지 않았다.
일본은 92년에 처음으로 베트남을 원조하기 시작했다. 그 해 베트남은 베트남전 때 미국의 동맹국이던 한국과 외교 관계를 맺었다. 79년 베트남을 공격했던 중국도 지난해 이붕 총리를 국빈 자격으로 베트남에 파견했다. 오랫동안 내전에 시달려온 캄보디아도 93년 휴전과 함께 총선거를 실시함으로써 베트남이 지난해 동남아시아국가연합에 가입할 수 있는 길을 터주었다. 미국은 94년 베트남에 대한 경제 제재를 푼 데 이어 지난해에는 외교 관계를 맺었다. 베트남은 95년에는 유럽연합과 경제 협정을 맺었다.

이처럼 활발히 대외 관계를 개선하면서도 베트남은 아직 자신감을 가지지 못하고 있다. 특히 중국에 대한 불신감은 근 2천 년간 중국의 지배를 받은 기억 때문에 더욱 깊다. 중국은 금세기 들어 베트남을 거듭 침공해 속국으로 만들려 했다. 베트남은 기본적으로 중국을 호전주의적이고 팽창주의적인 속성을 가진 나라로 파악하고 있다. 베트남은 현재 남중국해의 남사 군도 및 해상로 분쟁과 관련해 중국과 첨예하게 맞서 있다. 한 아시아 외교관은 베트남이 중국과 충돌하는 것을 피하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다고 지적했다.

베트남의 중국 정책은 엇갈려 있다. 베트남 군부 지도자들은 친중국 성향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경제 개혁을 외치는 인사들도 중국과 우호적인 관계를 원한다. 그러나 정치·사회적 변화를 두려워하는 베트남의 정보 기관들은 이미 개혁 및 개방을 도입한 중국의 입김을 되도록 받지 않으려 한다. 한 아시아 외교관은 “베트남인들은 중국 기업인들이 베트남에 사업을 하러 온 것이 아니라 스파이 활동과 사회 전복 음모를 꾸미러 온 것이 아닐까 염려한다”라고 말했다.

이런 구도에서 미묘한 요소로 떠오른 나라가 대만이다. 베트남은 대만과 정식 외교 관계가 없다. 그럼에도 대만은 베트남 수도인 하노이와 옛 수도인 호치민(예전의 사이공)에 경제 사무소와 문화 사무소를 두고 있다. 대만은 또한 베트남에 대한 주요 투자국이기도 하다.

문제는 미국과의 관계다. 미국 외교관들은 베트남과 관계를 개선하는 일이 미국과 중국의 관계에 어떤 영향도 미치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일부 미국 정치인들은 노골적으로 베트남과 관계를 증진하라고 주장한다.

과거 베트남전쟁 때 전범으로 7년 동안이나 잡혀 있다 풀려난 존 메케인 상원의원은 미국 정부에 공개적으로 베트남을 인정하라고 주장했다. 그에 따르면, 베트남이 경제적으로 부강해지면 중국에 효과적인 견제 세력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한 서방 외교관은 이렇게 말한다. “베트남은 미국 시장에 접근하기를 원한다. 또한 무역상의 최혜국대우(MFN)도 받기를 바라며, 미국의 기술과 투자를 원한다.”
관리들, 자리 보전과 권위 유지에만 연연

베트남이 바라지 않는 것은 미국이 베트남의 인권 상황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것이다. 그 때문에 베트남 정부는 미국 여권을 가진 미국 거주 베트남인을 자국민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베트남의 대외 관계에서 한 가지 당혹스런 부분은 외국인 투자 문제이다. 베트남이 이 문제로 고민하고 있다는 사실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75세 이상이 대부분인 이 나라 지도자들은 성년기의 대부분을 전쟁터에서 보낸 사람들이다. 75년 베트남전쟁에서 미국이 패한 뒤 베트남은 사회주의 이념에 투철한 나라를 건설하는 데 10여 년을 보냈다. 결과는 참담했다. 결국 86년 베트남 공산당은 도이 모이라는 개혁 프로그램을 마련했으며, 88년에야 베트남 내에 외국인 투자를 허용하기에 이르렀다.

외국인 투자가 허용된 지 2년 만에 베트남에는 2백30억달러 규모의 외자 유치 협상이 진행되었다. 외국인 투자자들은 7천3백만명이 사는 베트남의 값싼 노동력과 중계 무역의 이점 때문에 베트남에 몰려들고 있다. 대만은 40억달러를 투자한 상태이며, 일본·싱가포르·홍콩·한국도 20여억달러씩 투자한 것으로 나타났다. 반면에 지난해 정식 외교 관계를 맺은 미국은 약 13억달러를 투자한 것으로 추산된다.

베트남 투자 상담가인 존 파이크씨는 최근 이곳에서 열린 한 투자 세미나에서 외국인과 베트남인 간의 투자 제안 중 50%만이 성공한다는 사실을 밝혔다. 또 다른 투자 상담가인 리처먼드 메이요-스미스씨는 “솔직히 베트남은 대부분의 외국인 투자가들에게는 위험한 곳이다”라고 서슴없이 말한다. 미국의 기업환경위험평가연구원은 베트남의 투자 환경을 세계 50개국 중 40위에, 그리고 아시아에서는 가장 위험한 곳으로 지목했다.

베트남 당국은 올해 첫 9개월 동안 외국인 투자를 약 35억7천만달러 승인했는데, 이는 95년의 54억3천만달러에 비해 크게 떨어진 수준이다. 이같은 현상은 베트남에 외국인 투자가 허용된 후 처음 있는 일이다.

베트남 지도자들은 개방의 필요성은 느끼면서도 그 범위와 속도에 대해서는 의견이 엇갈린다. 도 무오이 총서기는 광범위한 변화에 반대하는 노년층을 대변한다. 장군 출신인 레 둑 안 대통령도 점진적인 개방을 선호하는 편이다. 남부 출신인 보 반 키에트 총리는 전면 개혁을 지지한다. 지난 6월의 제8차 공산당대회는 이런 이견을 해소할 것으로 기대되었으나 실제는 그렇지 못했다. 이런 불확실성 때문에 잠재적인 외국인 투자가들이 멈칫거리고 있다.

베트남 관리들은 자본주의 시장 경제의 기능에 대해 잘 알고 있다. 특히 매일 인·허가 업무에 관여하는 관리들은 경제 개발보다는 자신들의 일자리 보전과 권위 유지에만 신경쓴다는 비난을 사고 있다. 사실 1천9백년에 걸친 중국인들의 통치와 80년 간의 프랑스 식민주의 경험, 그리고 반 세기에 걸친 무력 투쟁으로 인해 베트남인들은 법 개념이 별로 없다. 따라서 외국인 투자가들은 오늘 맺은 협정이 내일 또 다른 결정에 의해 무효화할지 모른다는 불안감을 갖고 있다.

최근 베트남 고위 관리들로부터 흘러나오는 발언들을 살펴보면, 당 차원에서 이같은 투자의 문제점들을 시정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지난 10월 보 반 키에트 총리는 국회에 출석해 부패 만연 풍조를 강력히 비난하고 외국인 투자 환경을 개선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러나 이같은 호소가 과연 말단 관리에게까지 먹혀들지 현재로서는 짐작하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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