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 통신]60년 만에 약속 지킨 또 하나의 조국
  • 고종석 편집위원 ()
  • 승인 1996.11.2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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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전쟁이 60년대 세계 양심의 시험장이었다면, 스페인 내전은 30년대 세계 양심의 시험장이었다. 베트남에서와 달리 스페인에서 그 양심은 현실 정치와 군국주의 앞에서 처절하게 패했다. 36년 7월17일 프랑코 장군이 모로코에 주둔한 스페인군을 이끌고 본국의 인민전선 정부에 반란을 일으키며 시작된 스페인 내전은, 독일·이탈리아 등 파시즘 국가들이 노골적으로 반란군을 지원한 데다가 영국·프랑스 등 민주주의 국가들이 내정 불간섭 정책을 고수한 시대 분위기와 맞물려, 3년 간의 포연과 살육 끝에 반란군의 승리로 막을 내렸다.

합법적으로 선출된 민주주의 정부에 대해 파쇼 군부가 거둔 최초의 불법적 승리로 기록될 이 내전은, 75년 프랑코가 죽을 때까지 계속된 파쇼 체제를 스페인에 확립시켰을 뿐만 아니라, 히틀러와 무솔리니에게 자신감을 불어넣어 인류를 2차 세계대전의 참화로 몰아갔다.

스페인 내전이 세계 양심의 시험장이었다면, 그 양심을 상징했던 것은 국제 여단일 것이다. 앙드레 말로나 시몬 베유 같은 지식인을 상당수 포함하고 있었던 국제 여단은, 프랑코군의 반란에 맞서 인민전선 정부를 지원하기 위해 조국과 가족과 일터를 떠나 세계 각처에서 스페인으로 달려간 외국인 의용병들이다.

프랑스 지식인 사회 뒤흔든 스페인 내전

국제 여단에 지식인이 많이 끼어 있었다는 것은 스페인 내전이 지식인의 사회 참여라는 개념을 바꾸었다는 뜻이다. 토론과 집필과 서명을 통해서만 사회에 참여하던 지식인들은 스페인 내전을 통해 자신들의 참여가 직접적인 전투 행위를 통해 이루어질 수도 있음을 선언했다. 말로의 <희망>이나 헤밍웨이의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같은 소설은 그 내전이 단지 스페인 사람만의 전쟁이 아니라 그 시대를 사는 인류 전체의 전쟁이었음을 내보인다.

스페인의 바로 이웃 나라인 프랑스에서 특히 그 내전은 지식인 사회에 격렬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카톨릭 교회와 우익은 일반적으로 프랑코의 반란을 지지하고 있었지만, 폴 클로델이나 조르주 베르나노스 같은 대표적 카톨릭 작가들은 반란군의 학살 행위와 이를 묵인하는 스페인 카톨릭 교회를 격렬히 비난했다. 좌익은 일반적으로 반 프랑코 쪽에 서 있었지만, 평화주의·트로츠키주의 등 여러 가지 이념 때문에 대뜸 인민전선 정부를 지원할 분위기가 아니었다.

국제 여단은 그런 난관을 뚫고 조직되었다. 프랑스인 만여 명을 비롯해 4만여 명에 이르렀던 국제 여단 전사들 가운데 4분의 1 이상이 그 전장에서 목숨을 잃었다. 전운이 이미 기울어가던 38년 10월 어느날, 인민전선 정부 총리 후안 네그린은 외국에서 온 이 자유의 투사들에 대한 감사 표시로 전쟁이 끝나면 국제 여단 생존자 모두에게 스페인 국적을 부여하겠다고 약속했다.

내전이 프랑코 반란군의 승리로 끝났으므로 스페인이 했던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국제 여단 생존자들은 패전의 불명예를 안고 눈물을 삼키며 다시 세계 각지로 흩어져야 했다.

지난 10월9일은 국제 여단의 첫 선발대가 내전의 현지에 도착한 지 꼭 60년이 되는 날이었다. 수도 마드리드를 포함해 스페인 전역에서 기념 행사가 펼쳐졌다. 그 행사의 주역은, 뉴욕과 파리와 아바나와 또 다른 지구 구석구석의 병원과 양로원과 외딴집에서 늙고 병든 몸을 이끌고 스페인으로 날아온 4백여 국제 여단 생존자들이었다.

백발이 성성한 그들의 손에는 스페인 여권이 자랑스레 들려 있었다. 바르셀로나에서 열린 합동 기념식에서 스페인 정부가 그들에게 즉석에서 훈장과 함께 스페인 국적을 부여한 것이다. 여권을 주는 자나 받는 자나 감격의 눈물을 억제할 수 없었다. 이들에 대한 스페인 여권 발급은 지난해 의회의 결의에 따른 것이다. 이 결의에 따라 스페인 정부는 올해의 행사에 국제 여단 생존자 전원을 초청해 58년 전의 약속을 지키기로 했다.

이들 자유의 전사들은 자신들이 젊은 시절 목숨을 걸고 사랑했던 나라로부터 마침내 보상을 받았다. 그리고 그 나라 국민이 되었다. 그들에게 수여된 영예는 그 내전에서 자유의 편에 섰던 모든 전사들의 영예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스페인 내전에서 양심은 마침내 승리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국제 여단 병사들은 이제 패잔병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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