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 게바라, ‘사후 30년 만의 7일장’ 참관기
  • 쿠바 /글·사진 김태영 (인디컴 대표) ()
  • 승인 1997.11.0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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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는 절대로 죽지 않는다. 쿠바와 아프리카, 제3 세계와 라틴 아메리카에서 우리 심장으로, 우리 땅의 아들로 영원히 남아 있을 것이다.” 65년 콩고 내전에 체 게바라와 같이 참여한, 티자라고 불렸던 병사의 말이다.

끝이 보이지 않았다. 10월12일 나는 쿠바 수도 아바나 한가운데 자리한 혁명 광장의 호세 마르티 기념관 지붕 위에서 체 게바라를 조문하는 행렬의 꼬리를 촬영하고 있었다. 체를 추모하는 행렬은 드넓은 광장 전체를 한바퀴 돌고도 계속 이어졌다. 체의 마지막 전쟁터 볼리비아에서 30년 만에 찾아낸 유해가 함께 처형된 6명의 시신과 함께 지난 7월12일 혁명의 고향 쿠바로 옮겨졌다. 유해는 3개월이 지난 10월11일부터 아바나의 쿠바 인민에게 공개되기 시작했다. 첫날인 10월11일에는 호세 마르티 기념관의 폐관 시간을 넘기고 밤 12시까지 8만 인파가 조문했다고 한다. 경비 지휘자는 오늘은 조문객이 10만을 넘을 것 같다고 예상했다.

혁명 광장은 카스트로가 참여하는 국가의 큰 행사가 열리는 곳이다. 정면에 백m가 넘는 혁명 기념탑이 우뚝 서 있고 그 앞으로 1895년 이후 스페인 통치로부터 쿠바 독립을 위해 싸웠던 호세 마르티의 동상이 기념관과 함께 자리하고 있다. 반대편에 있는 내무부의 한쪽 벽면에는 체 게바라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영원히 승리할 때까지’라는 표어와 함께.

끝없이 계속되는 조문 행렬의 구성원은 다양했다. 노인과 어린아이, 젊은 부부, 군복 차림을 한 사람들과 빨간 모자를 똑같이 쓴 건설대원, 체의 유니폼을 입고 8㎜카메라를 들고 들어가는 외국 관광객 등. 조문 행렬의 끝에서부터 유해가 안치된 기념관 안으로 들어가는 데까지 5시간이 걸렸다고 한다. 조문객들은 호세 마르티 기념관 왼쪽에 들고 온 꽃들을 던져 놓고 일렬로 들어가서 오른쪽으로 나오게 되어 있었다. 기념관 안에서 머무를 수 있는 시간은 겨우 5초 정도. 정면에는 볼리비아에서 체와 함께 투쟁한 부대원들의 사진이 걸려 있고, 7개의 관은 일렬로 안치되었다. 가운데가 체 게바라의 관이었다.

“자식들아, 그의 삶과 죽음을 잊지 말라”

조문객들은 관 앞에 잠시 머무르지도 못한 채 관 7개를 차례로 두드리며 체가 누워 있는 현재의 시간을 꿰뚫고 지나간다. 사람들은 30년 전 체의 모습, 목소리, 혹은 말로만 듣던 그의 이미지 등 한 조각 과거 모습을 부여안고 나오고 있었다. 아버지가 간직했던 빛 바랜 체의 사진을 들고 온 한 중년 남자는 “짧은 시간이었지만 나는 그를 잊지 않을 것이다. 나의 자식들에게도 체와 이 시간을 잊지 말라고 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한 번의 혁명 성공과 한 번의 실패. 체 게바라는 59년 카스트로를 도와 라틴 아메리카 최초로 쿠바에서 혁명을 성공시키고 미국의 지원을 받던 바티스타 독재 정권을 무너뜨렸다. 쿠바에서의 성공은 라틴 아메리카와 제3 세계의 많은 나라에서 또 다른 혁명의 불꽃을 일으켰다. 60년대의 이데올로기 대립과 냉전의 긴장 관계 속에서 라틴 민중은 굶주림과 억압과 독재의 그늘에서 신음하고 있었다. 혁명 대열에 섰던 체의 생각은 ‘사람은 자유롭게 생활할 권리를 가지며 사회는 평등하고 정의로워야 한다. 혁명은 인간의 혁명이며, 민중을 위한 혁명이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는 사상은 정치가의 몫이며 혁명가는 민중의 중심에서 직접 실천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65년 4월30일 미국 중앙정보국(CIA) 첩보망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그가 쿠바인 1백32명을 이끌고 아프리카 콩고에 극비리에 침투해 이끌었던 콩고 혁명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최초의 실패였다. 콩고 정부에 대항해 일으킨 반란은 반군 내부에서 다시 쿠데타가 일어나 체의 부대가 누구를 도와야 할지 모르는 상황에 빠졌고, 결국 콩고 반군이 스스로 돌아가 달라고 하여 8개월 만에 철수하게 되었던 것이다.

첫 실패를 겪고 난 1년 뒤인 66년 11월3일, 그는 라틴 아메리카에 혁명의 불씨를 뿌리고자 대륙의 중심에 자리한 볼리비아로 숨어 들어갔다. 가족에게도 알리지 않았다. 비장한 마음으로 바리엔토스 독재 정권 아래 있던 볼리비아의 혁명 전선에 섰으나, 끝내 혁명을 보지 못한 채 67년 10월8일 부상해 체포되었고 다음날 처형되었다.

체 게바라는 제국주의에 맞서 당당히 투쟁함으로써 인류의 평등한 미래를 제시한 영원한 혁명가의 모습으로, 제3 세계와 라틴 아메리카의 상징적 기수로 역사에 남았다. 붉은 별이 달린 베레, 구레나룻과 입에 문 시가, 맑은 눈빛의 이미지로 라틴 아메리카 구석구석의 민중에게 30년 동안 도덕적 인간의 전형으로 기억되던 그가 쿠바에서 되살아나 물결치고 있었다.

아바나에서 유해가 공개된 지 4일째 되는 10월14일 유해는 3백㎞ 떨어진 산타클라라로 이동했다. 길 양옆으로 늘어선 조문객들은 고개를 숙이거나 눈물을 흘리며 체 게바라의 사진과 쿠바 국기를 흔들어 경의를 나타냈다. 다음날인 15일부터 산타클라라 주민의 조문이 시작되었다. 도서관 정문 앞에 마련된 임시 프레스센터에서 체와 같이 콩고 혁명, 시에라마에스트라 투쟁에 참가했던 노병 4명이 외국 언론과 인터뷰했고 2층에서는 <인간, 생명, 마지막 투쟁>이라는 체의 CD 롬이 기자들을 위해 상영되었다.

그 뒤 기자들은 광장에서 10여 분 거리에 있는 산타클라라의 최대 승리지였던 철로로 안내되었다. 선로를 어지럽게 벗어난 기차와 함께 당시의 전과를 알리는 기념비가 서 있었다. 이곳에서 쿠바 혁명의 결정적 계기가 된 전쟁이 벌어졌었다. 체 게바라가 지휘하는 부대원 18명은 바티스타 군대 4백8명이 타고 오는 기차를 습격해 패퇴시켰다. 결국 쿠바 제2의 수도인 산티아고 데 쿠바로 이동하지 못한 바티스타 군대는 패배로 치달았고, 독재자 바티스타는 즉시 도미니카로 도망갔다.

나는 16일 오후 체의 가족을 만났다. 아르헨티나에서 라울 카스트로(카스트로의 동생)의 초청을 받고 온 체 게바라의 누나 셀리아, 형 로베르토, 동생 마르틴이 그들이었다. 잠시 후 체의 딸인 알레이다 게바라가 나타났다. 의사인 알레이다는 가족을 대표해 쿠바에서 모든 일을 대변한다. 체의 아들 카밀로는 변호사 공부를 마쳤으나 쿠바 수산부 양식업 연구 부서에서 근무하고 있다.
50만 추도객 <체 게바라의 노래> 합창

장례 행사의 마지막 날인 17일. 산타클라라 승리가 있은 지 30년 만인 89년 12월28일 준공된 광장에는 군복을 입고 기관총을 든 체 게바라 모습의 대형 기념탑이 있었다. 사열대를 빼놓고는 완전히 사람으로 덮여 있었다. 산타클라라 전체 주민이 15만명 정도인데, 이 날 이 곳에는 50만명 정도 모인 것으로 추정되었다.

통제는 아주 엄격했다. 정확히 9시에 카스트로가 도착하자 체 게바라의 장례가 시작되었다. 연단 왼쪽에는 라울 카스트로, 후안 알메이다, 리카르도 알라르콩 등 쿠바 공산당 정치국원 24명 전원이 앉았고, 오른쪽에는 유가족이 자리했다. 외국 귀빈들도 끼어 있었다.

이윽고 <체 게바라의 노래>가 울려 퍼지고 50만명이 따라 부르는 노래 소리는 광장과 체 게바라 동상과 7개의 관을 완전히 뒤덮었다. 실비오 로드리게스가 기타를 들고 나와 <시대는 심장을 낳고 있다>를 낭송했다. 체 게바라의 사진과 국기들, 깍지 끼어 높이 쳐든 쿠바인들의 손 물결은 느리고도 엄숙했다. 마지막으로 카스트로는 “체 게바라는 그의 이야기, 삶, 본보기로써 유례 없는 정신적 승리를 거두고 있다. 이제 그가 꿈꾸어왔고, 살아온, 또 그를 위한 널찍한 공간이 있는 온 세상이 그를 받아들일 것이다”라고 추도했다. 추도사가 끝나자 유해를 실은 군용 지프가 군중과 사열대를 향해 마지막 인사를 한 뒤 연단 뒤쪽 매장지로 서서히 빠져 나갔다. 체 게바라는 30년 만에 고향으로 돌아와 영원히 잠을 자게 된 것이다.

20세기와 함께 기록될 혁명가 중 한 사람인 체 게바라의 7일 장례가 막을 내릴 즈음, 볼리비아 혁명의 마지막 병사 7명 가운데 한 사람의 유가족이 “우리 아버지들이 산타클라라에 묻히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우리들은 체 게바라와 동료들에 대한 경의가 7일에 그치지 않고 7세기 이상 지속될 것이라고 생각한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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