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 가득 찬 인종 차별
  • 워싱턴·卞昌燮 편집위원 ()
  • 승인 1997.11.2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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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언론, 아시아계 푸대접 여전…유럽계는 우대
92년 어느날 미국 샌디에이고 소재 일본정책연구소의 챌머 존슨 소장은 클린턴 정권인수팀으로부터 차기 주일 미국대사 후보감을 추천해 달라는 서한을 받았다. 고심 끝에 그가 추천한 사람은 국무부 정책기획국 부국장을 지낸 일본계 미국인 프랜시스 후쿠야마 박사였다. 며칠 뒤 인수팀으로부터 날아온 회신은 간단했다. ‘안됐지만, 일본인은 곤란함.’

지난 9월 초. 미국인권위원회 간부인 중국계 미국인 이본느 리 씨는 백악관을 방문하려다 경비실에서 출입을 제지당했다. 조사 결과 경비실 보안요원이 엄연히 미국 시민인 그의 신상을 일부러 ‘외국인’으로 조작해 전산 자료에 입력한 것이 탄로났다. 당시 미국 정가가 아시아계 미국인의 백악관 헌금 추문으로 시끌시끌하던 때였음을 감안하면 그 이유를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얼마전 중국 강택민 주석이 미국을 방문하는 동안 미국 주요 언론들은 미국이 ‘아시아·태평양 국가’임을 그 어느 때보다 요란스럽게 떠들어댔다. 클린턴 대통령도 이번뿐 아니라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회의(APEC) 같은 굵직굵직한 행사에 참석할 때마다 입이 닳도록 미국의 아시아 중시론을 강조해 왔다. 그러나 미국이 과연 국내에서도 이런 요란한 선전에 걸맞는 행동을 취하고 있을까.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은 앞의 두 실화에 비추어 부정적일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연방 정부 고위직 차지는 하늘의 별따기

가장 가까운 원인을 따져보면 벌써 1년이 다 되도록 연일 텔레비전과 신문에 화끈한 뉴스거리를 제공하고 있는 아시아계 미국인의 백악관 헌금 추문을 꼽을 수 있을 것 같다. 이 문제를 보도하는 미국의 많은 언론 매체는, 불법 선거 헌금을 캐내는 것 못지 않게 여기에 연루된 아시아계에 대한 부정적 여론을 조성하는 데도 앞장서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실제로 이본느 리 사건이 터졌을 때 미국 정부 산하 인권위원회는 27쪽짜리 보고서를 통해 ‘일반 정부 관리들과 민주당·공화당 인사들, 나아가 언론까지 합세해 노골적인 인종 차별 행위에 가담하고 있다’고 비판한 바 있다.

예를 들어 얼마 전 아시아계의 백악관 불법 헌금을 조사하기 위한 상원 청문회가 열렸을 때, 프레드 톰슨 의원은 ‘중국 정부가 미국의 중국 정책을 돈으로 매수하려 했다’고 발언해 물의를 빚기도 했다. 또 샘 브라운백 의원과 로버트 버넷 의원은 아시아계를 겨냥한 인종 편견적 발언을 했다가 뒤늦게 마지 못해 사과하는 촌극을 빚었다. 상원 청문회 자체가 아시아계를 표적으로 삼았다는 비판도 있다. 이를테면 지난 7월 토머스 크레이머라는 독일계 미국인이, 개인 헌금으로는 최고 액수인 32만3천달러를 민주당에 불법으로 기부했는데도 상원 청문회는 그를 조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지난해 11월 아시아계가 가장 많이 모여 사는 캘리포니아 주가 주민 발의를 통해 흑인과 아시아계 소수 민족에 특혜를 주기 위한 우대법(어퍼머티브 액션)을 폐지한 것도 이같은 흐름이 아니냐는 지적을 받는다. 캘리포니아 주립 대학 등 서부 지역 명문 대학을 지망하거나 다니고 있는 아시아계 학생들은 더 이상 예전처럼 특혜를 받을 수 없게 되었다.

연방 정부로 눈을 돌려 보면 아시아계에 대한 차별은 더욱 가관이다. 사실상 완전한 미국인이나 다름없는 아시아계 3, 4세라도 연방 정부의 고위직을 차지하기란 하늘의 별따기다. 특히 국익을 대변하는 외교직은 두말할 것도 없다. 최근의 <로스앤젤레스 타임스>에 따르면, 고위 외교관 6백71명 가운데 아시아계는 단 5명이었다. 이래 가지고야 어떻게 미국이 책임 있는 아시아 정책을 입안할 수 있느냐는 것이 이 신문의 지적이다.

유럽계는 어떨까. 백악관 안보보좌관을 지낸 헨리 키신저, 즈비그뉴 브레진스키나 현재 국무장관인 매들린 올브라이트. 세 사람의 공통점은 능력이 뛰어나다는 것말고도 순수 미국계가 아니라는 점이다. 똑같은 능력이라도 아시아계보다는 코카서스 인종이 ‘영원한 비교 우위’를 가질 수밖에 없는 것이 미국 사회이다. 똑같이 능력이 있어도 키신저 같은 이는 대접받는데 후쿠야마 같은 이는 푸대접을 받는 현실이 아시아·태평양 국가임을 자처하고 있는 미국의 모순된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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