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노동당 ‘진보+보수’ 칵테일로 승리 축배
  • 런던·韓准曄 편집위원 ()
  • 승인 1997.05.1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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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노동당, 우익 옷 입고 총선 압승…유럽통합 문제 등이 새 政敵
중단 없는 안정 속 성장이냐, 아니면 모험 속의 새로운 변화 추구냐. 79년 철의 여인 대처 총리가 등장한 이후 보수당에 무려 18년이나 장기 집권 기회를 준 영국 국민들은 결국 새로운 변화를 선택했다.

영국의 4천4백만 유권자는 하원의원 6백59명을 뽑는 이번 총선에서 야당인 노동당에 전체 유효 투표의 44%라는 압도적인 지지를 보냈다. 대처 이후 네 번이나 총선에서 승리하고 5기 연속 23년 집권을 노리던 보수당의 꿈은 막바지에 깨어졌다. 전통 보수 노선을 견지해 왔던 <선데이 타임스>조차도 선거 2주 전 당의 진로 설정과 새 시대에 맞는 새로운 지도자 탄생을 위해서는 보수당이 이번 선거를 계기로 새로 태어나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지난 18년 동안 계속된 보수당 장기 집권이 자칫 일당 독재의 비정상적인 정치 행태로 굳어질 것을 우려한 데서 나온 것이다. 영국 언론들은 어쨌든 이번 총선에서 노동당이 승리함으로써 이제 양당 체제 또는 건전한 3당 체제를 이루어 정상을 되찾게 되었다고 보고 있다.

토니 블레어는 94년 존 스미스 당수가 갑작스레 죽음으로써 벌어진 당권 경쟁에서 승리한 이후 한때 ‘스탈린’또는 ‘김일성식 독재’라는 비아냥에도 불구하고 사회주의의 금과옥조인 생산 수단 공유 조항, 즉 당헌 4조를 철폐하고 노조의 영향력 약화를 골자로 하는 노동당 개혁을 이끌어 이번 총선에서 승리했다.

토니 블레어 신임 총리는 6일 다우닝가 10번지에서 만 44세 생일을 맞았다. 블레어 총리는 총선 승리가 확정된 직후 환호하는 지지자들 앞에서 성명을 통해 노동당의 승리가 영국과 영국민에게 새 시대를 향해 가는 아침을 열어주었다고 말하고 ‘국민들의 신뢰와 지지를 저버리지 않기 위해 사명과 책임을 다하겠다’고 다짐했다. 블레어 총리는 그동안 의회 내에서 집권 보수당에 맞서 비판과 반대의 목소리를 높여온 당내 ‘그림자 내각’ 가운데 존 프레스콧 의원을 부총리에, 고든 브라운을 신임 재무장관에 임명하는 등 집권 1기를 이끌어갈 각료 인선을 끝내고 노동당 정부를 공식 출범시켰다.

18년 만에 이루어진 역사적인 정권 교체가 시사하듯 이번 총선은 각종 기록과 함께 이변과 화제를 낳고 있다. 먼저 위치가 뒤바뀐 여야 간의 의석 수와 그 격차에서부터 영국 총선 사상 신기록을 세우고 있다. 제1야당으로 신세가 바뀐 보수당은 득표율 31.4%로 전체 의석 6백59석 가운데 3분의 1 선에도 미치지 못하는 1백65석에 머물러, 1906년 이후 가장 약체인 제1 소수 야당으로 전락했다. 이에 반해 23년 전의 총선 승리 후 처음으로 노동당은 유효 투표의 44.5%를 획득해 전체 의석의 과반 선인 3백30석보다 무려 89석이 많은 4백19석을 차지해 집권당이 되었다. 이 4백19석은 보수당과 자민당 등 야당의 총의석 2백40석보다 무려 1백79석이 많아, 45년 이래 여야 간의 의석 격차가 가장 많은 것이다.

극좌 이미지 벗어 중산층·젊은층에 호응

이와 함께 이번 선거에서는 보수당의 참패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제3 당인 자유민주당이 크게 약진해 영국의 전통적인 양대 정당 구조가 3당 체제로 변화했다. 전체 유효 투표의 17.1%를 획득해 92년의 18석보다 무려 28석이 많은 46석을 확보한 자민당은 29년 이후 가장 많은 의석을 보유하게 되었다. 이것은 의회 내에서 제3 당으로서 큰 목소리를 내게 된 자민당이 앞으로 제1 야당인 보수당과 때때로 집권 노동당을 견제하기 위해 공동 노선을 취할 가능성이 있음을 시사한다. 이 과정에서 특히 비례대표제 도입을 선거 공약으로 주장해온 자유민주당이 선거법 개정을 요구하고 나설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92년 총선 당시 여론조사에서 패배하리라는 전망을 뒤엎고 기적적인 역전승을 거두었던 메이저의 3연속 집권의 꿈이 이번 총선에서 무참히 깨진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무엇보다 보수당의 장기 집권에 대한 국민들의 염증에서 찾아볼 수 있다. 3%선 미만으로 인플레를 잡고 90년 이후 가장 낮은 실업률로 경제를 안정시키는 한편 유럽연합(EU) 내에서 가장 부러워하는 경기 호황을 구가하고 있는 보수당 정부의 업적은 인정하지만, 2000년대를 향한 길목에서 새로운 변화와 젊은 활력소가 어느 때보다 필요하다는 국민들의 욕구와 갈망이 컸기 때문이다.
또 한 가지 이유는 만년 야당의 신세로 전락해 가던 노동당의 급격한 변모에서 찾아볼 수 있다. 71년 대처 총리에게 정권을 빼앗겼던 과거의 노동당은 ‘노조에 의한, 노조를 위한, 노조의 당’이라는 극좌 정당 이미지와 함께 그동안 ‘고세금 고지출’정당으로 낙인찍혀 왔다. 그러나 94년 정권 교체뿐만 아니라 당내 세대 교체를 내세우면서 등장한 토니 블레어는 노동당을 노조로부터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는 새로운 노동당으로 변화시켜, 과거의 적대 세력인 중산층과 젊은 세대까지 끌어들이는 데 성공했다.

이밖에 집권 6년반 동안 메이저를 줄곧 괴롭혀 온 것은 소속 의원·각료 들의 성추문과 뇌물 수수였다. 각료 2명이 그동안 성추문으로 여론의 압력에 밀려 사임했는가 하면, 런던 최대의 백화점 해롯측으로부터 뇌물을 받는 등 무려 20여 명의 소속 의원들이 뇌물 사건에 연루된 것은 18년 장기 집권으로 쌓여온 집권당의 부패와 도덕성 상실을 국민 앞에 여실히 드러낸 사건이었다. 게다가 소속 의원 2명이 야당 진영에 투항하는 사태까지 벌어져, 메이저는 당내 지도력 약화는 물론 당권을 장악하는 과정에서 적지 않은 흠집을 입기도 했다.

그러나 메이저의 총리직 3차 연임과 역사적인 보수당 제5기 집권의 꿈을 가로막은 근본적인 장애물은 그가 대처로부터 당권을 넘겨 받기 전부터 당내에 잠복해 있었다. 즉 하나의 유럽을 향한 유럽 통합이라는 이슈를 놓고 빚어진 유럽 통합 찬성파와 반대파 간의 분열은 메이저 총리 집권과 동시에 표면화한 이래 이번 선거 때까지 계속 당의 단합을 방해하면서 메이저를 괴롭혀 왔다. 영국의 언론들도 이번에 보수당이 패한 가장 큰 원인을 메이저가 유럽 통합 문제를 선거 막바지에 섣불리 건드렸기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유럽 통합 찬성 당론 수정 불가피할 듯

토니 블레어 신임 노동당 총리는 앞으로 1년 동안 유럽 단일 통화, 광우병 파동으로 빚어진 영국산 쇠고기 수출 문제 등을 놓고 유럽연합 국가들과 씨름할 것으로 보인다. 당장 6월 암스테르담 유럽연합 정상 회담에서부터 유럽연합 창설의 주요 국가인 독일·프랑스·벨기에 등으로부터 유럽 통합 가속화 압력에 직면하게 될 것으로 예상된다.

유럽 통합과 관련한 의제 가운데 특히 노동당이 야당 시절 가입을 공약한 사회 복지 헌장과 주 48시간 최대 노동 시간 준수 계약 등이 새 의회에서 여야의 유럽 통합 반대 세력에게 정치 공세의 결정적 실마리를 제공할 가능성도 있다. 영국내 유럽 통합 반대 세력은, 신임 블레어 총리가 국가간 이익이 첨예하게 상충하는 유럽연합의 외교 무대에서 영국의 주권과 고유 이익을 독일과 벨기에 등 유럽 연방주의 세력 국가들로부터 지켜낼 수 있을지 심각히 우려하고 있다.

유럽 통합 찬성을 당의 공식 노선으로 천명해 온 노동당은 99년 출범 예정인 유럽 단일 통화에 영국이 가입하는 문제는 역시 보수당처럼 시간을 두고 사전에 국민투표에 부치겠다고 올해 초 약속한 바 있다.

이번 선거 기간에 유럽 통합에 강력히 반대한다는 것이 국민의 지배적인 정서라는 사실을 절감한 만큼 앞으로 유럽 통합 찬성이라는 기존 노선은 수정이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 이에 따라 블레어는 집권 초 1∼2년 사이에 있을 국민투표에서 지지를 끌어내지 못할 경우, 유럽 통합 문제로 집권 기간 내내 국내는 물론 유럽연합 외교 무대에서 발목을 잡힐 것이 분명하다. 이밖에 새 총리 토니 블레어의 국내 정책은 국영 기업의 민영화 추진 약속, 자본주의 시장 경제 정책의 과감한 포용 등에서 나타나고 있듯이 메이저 내각의 기존 보수당 경제 정책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을 것이 확실하다. 그러나 그동안 집권을 위해 숨을 죽여왔던 당내의 극좌 강경파와 노동당의 개혁에 따라 지난날의 기득권을 대부분 상실한 노조 세력이 다시 목소리를 높일 것으로 예상되어 블레어의 앞길이 평탄하지만은 않을 전망이다.

국내 정책에서 큰 변화가 예상되는 것은 귀족원을 비롯한 의회 개혁 등 헌정 분야이다. 스코틀랜드와 웨일스가 영연방 아래서 독립 의회를 갖도록 하겠다는 노동당의 선거 공약을 저지해줄 보수당이 이번 선거에서 웨일스와 스코틀랜드에서 전멸했기 때문에 노동당 정부에 대한 민족주의 정당들의 공약 준수 압력이 더욱 거세질 것이 확실하다.

토니 블레어는 또 새 노동당 출범과 함께 현대적 우파를 표방하고 있기 때문에 선거 유세 중 도움을 받았던 좌파 언론으로부터 집권 초기 집중적인 공격을 받을 가능성도 있다. 사실 그는 정통 극좌 사회주의 노선을 걸어온 기존 노동당보다 오히려 보수당에 가까운 인물이라는 점에서 대처의 후계자였던 메이저보다 더 대처리즘의 적자로 평가되기도 했다. 블레어의 총선 승리와 관련한 논평에서 대처 전 총리는 이례적으로 그의 선거 전략과 유세에 찬사를 보내기도 했다. 그래서 이번 영국 총선의 진정한 승리자는 메이어와 블레어 두 주자의 공동 대모 격인 대처라는 아이러니컬한 결론이 나온다. 따라서 대륙의 연방주의 세력을 언제나 견제하면서 영국의 전통과 정체성을 고수하는 대처리즘의 유산이 섬나라 영국 땅에서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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