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북자 수용, 바늘귀만큼 좁다
  • 성기영 기자 (sisa@sisapress.com)
  • 승인 1996.07.1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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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인으로 분류돼 강제 퇴거 처분 받기 일쑤…“재외 국민 정책 대수술해야”
 
현재 중국에 있는 탈북자 숫자는 천 명이 훨씬 넘는다고 알려져 있다. 이들은 대부분 주중 한국대사관을 통해 귀순을 시도하거나, 이것이 불가능하면 태국이나 베트남 등 제3국을 거쳐 한국행을 시도한다. 그러나 이런 시도가 성공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대사관을 찾아갔을 때 당장 급한 생활비 몇 백달러라도 얻을 수 있다면 그나마 다행이라는 것이 밀항 등으로 한국행에 성공한 귀순자들의 증언을 통해 밝혀지고 있다.

이들이 우여곡절 끝에 입국에 성공한다면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가. 결코 그렇지 못하다. ‘국적’이라는 또 다른 족쇄가 이들의 발목을 붙잡고 있기 때문이다.

94년 이영순씨 사건이나 한영숙씨 사건이 이러한 현실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이영순씨는 당시 주중 북한대사관이 발급한 해외 공민증을 가지고 있어 북한 주민이라는 것은 입증되었으나, 중국 여권을 위조해 지니고 있었다는 이유로 중국인으로 분류되어 강제 퇴거 명령을 받았다. 이씨는 서울외국인보호소장과 서울출입국관리사무소장을 상대로 ‘강제퇴거처분 무효확인 소송’을 내 승소했다. 그러나 정부가 이에 불복해 대법원에 상고해, 현재 재판을 기다리고 있는 상황이다.

88년 입국한 한영숙씨는 적법 절차를 거쳐 가지고 있던 주민등록증이 직권 말소된 경우이다. 한씨도 행정 소송을 냈으나 대법원에서까지 패소해 주민등록증조차 가지고 있지 않다. 현재 한씨는 강제 출국 당하지는 않았으나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아무런 권리를 갖지 못해 법적인 미아로 전락했다. 한씨 사건을 담당했던 엄상익 변호사는 언론과 공무원의 편의주의와 이기심이 한 인간을 무국적자로 만들어 모든 권리를 박탈해 버렸다고 개탄했다. 한씨는 지금도 엄변호사 사무실을 수시로 드나들고 있지만 법적인 해결은 막막한 형편이다. 변호사 한 사람이 그를 ‘보호’하고 있고, 정부는 그를 ‘방치’하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김용화씨 같은 경우는 아니지만 서울외국인보호소에 김씨와 같이 있던 김광호씨나 김덕상씨도 북한 국적을 가진 채 중국에 살다가 귀순해 국적 문제로 고초를 겪은 경우이다. 김광호씨는 강제 퇴거 명령 집행정지로 지난 4월 외국인보호소를 나왔으나, 법무부를 통해 국적 조회가 이뤄지지 않아 현재 주민등록증 없이 생활하고 있는 상태이다. 또 그는 강제 퇴거 명령이 아직 취소되지 않아 이를 취소시키기 위해 여전히 법정 다툼을 벌이고 있는 실정이다.

“유일한 귀순 방법은 안기부 통하는 것”

김광호씨보다 넉 달 먼저 입국한 김덕상씨만 국적 조회에 ‘성공’해 현재 주민등록 신청 수속을 밟고 있다. 그러나 그의 국적 확인 작업에도 8개월 이상 걸렸다. 확인이 이뤄지기 전에는 그 역시 국적 없는 떠돌이 신세였다.

이들 북한 국적 중국 교포들은 중국 정부가 얼마 전부터 민족 문제에 대해 강경하게 돌아서 더욱 어려움을 겪고 있다.

법무부의 한 고위 당국자는 “현재 중국 정부의 분위기는 우리 정부 관계자와 조선족들이 접촉하는 것 자체를 극도로 꺼리는 분위기이다. 법무부 관계자들도 친척 방문 등을 가장하고 비공식으로 조선족을 만나는 형편이다”라고 중국 정부의 분위기를 전했다. 티베트 분리 독립 움직임 등으로 인해 민족 문제에 대해 중국 정부가 극도로 강경해져 가고 있다는 것이다.

이에 비하면 우리 정부의 재외 국민 정책은 중국에 관한 한 여전히 제자리 걸음이다. 94년 이영순씨 사건 이후 정부는 통일원·외무부 등이 참여하는 부처간 협의를 통해 중국 동포들의 영주 귀국을 허용한다는 방침을 밝힌 적이 있으나 달라진 것은 거의 없다. 탈북자 문제에 대한 정부 방침도 사회 분위기에 따라 전원 수용과 선별 수용 사이를 오락가락했다.

김용화씨의 ‘강제퇴거명령 무효확인 등 청구소송’을 고등법원에 제출한 안상운 변호사는 “현재 북한 주민이 귀순할 수 있는 방법은 안기부를 통하는 길밖에는 아무 것도 없다”라고 잘라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법규 문제가 아니라 정책 문제라며 재외 국민 정책을 전환하라고 촉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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