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북자 김용화씨, 북한 주민 증거 없어 추방 위기
  • 성기영 기자 (sisa@sisapress.com)
  • 승인 1996.07.1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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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동대문구 휘경동에 있는 법무부 서울외국인보호소. 밀입국한 조선족과 방글라데시·필리핀·파키스탄 등 아시아 각국에서 불법 입국한 외국인들이 강제 퇴거 명령을 기다리는 곳이다. 지금 이 외국인보호소에 북한을 탈출한 귀순자 한 사람이 불법 체류 외국인으로 분류되어 1년째 오도가도 못하고 있다.

김용화씨(43). 수감 번호 232번이 적힌 푸른 수의를 입고 있는 그가 중국에서 두 번에 걸쳐 밀항을 기도한 끝에 입국에 성공한 것은 지난해 6월 말이었다. 0.5t짜리 쪽배로 산동성 해양현을 출발해, 70시간 만에 충남 태안 앞바다에 도착했다. 1차 밀항 기도가 선박 고장으로 실패한 뒤 한 달쯤 지나서였다. 88년 압록강을 넘어 북한땅을 탈출한 지 7년 만에 이룬 한국행이었다.

위조한 신분증 때문에 중국인으로 취급

그동안 김씨는 중국에 머무르며 한국에 오기 위해 국내 언론 기관 등에 여러 차례 편지를 보냈다. 또 중국과 베트남의 한국대사관을 통해 망명을 신청하기도 했지만 번번이 거부되었다.

그 뒤 ‘밀항’이라는 최후의 방법으로 한국행에 성공한 지 꼭 1년이 지난 지금 그는 꿈꾸었던 ‘자유’의 품에 안기기는커녕 ‘불법 체류 외국인’이라는 낙인이 찍힌 채 보호소에서 한숨 어린 나날을 보내고 있다. 말이 ‘보호’일 뿐 외부와의 접촉도 극히 선별적으로만 허용되고 있어, 그의 표현대로라면 감옥이나 다름없다고 한다.

김씨는 밀항에 성공한 후 국군 정보사에서 일반 귀순자들처럼 모든 조사를 다 받았다. 조사를 마치면 주민등록 신청 등 귀순에 따르는 절차를 밟으리라고 생각했던 그는 북한 주민임을 입증할 서류가 없어 법무부 서울출입국관리사무소로 넘겨졌다. 입국한 지 석 달쯤 지난 지난해 9월에는 다시 서울외국인보호소로 넘겨졌다. 그 때부터 지금까지 김씨는 아직도 그가 그렸던 ‘이남 땅’을 밟지 못하고 있다.

 
법무부 당국으로부터 강제 퇴거 명령을 받았던 김씨는 지금 법정대리인 안상운 변호사를 통해 서울외국인보호소장을 상대로 ‘강제퇴거명령 무효확인 등 청구 소송’을 내고 7월11일의 첫 공판을 기다리고 있다. 김씨가 국적 문제 때문에 귀순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은, 그가 북한 주민임을 입증할 서류를 아무 것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김씨는 탈북 당시 신분증을 지니고 있지 않았던 데다가 밀항할 때 중국 공안국이 발행한 신분증 사본을 갖고 있었다. 따라서 법무부로서는 김씨가 중국 국적을 가졌다고 판단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김씨의 주장에 따르면, 이 신분증은 93년 중국 화룡현 무순에 거주할 때 만원을 주고 위조한 것이다. 현재 그가 북한 주민이라는 사실을 공식으로 증명할 수 있는 ‘물증’은 그가 인민군에 복무할 당시 찍은 빛바랜 흑백 사진 한 장이 전부이다. 그러나 그가 중국 국적을 취득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밝혀지지 않는 한 그에게 붙은 불법 체류 ‘외국인’이라는 딱지는 떨어질 수 없다.

법무부나 서울외국인보호소 관계자들은 위조든 아니든 명백하게 중국 당국이 발행한 신분증을 갖고 있는 불법 체류 외국인이므로 강제 퇴거 명령을 내릴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게다가 중국대사관을 통한 여권 발급 신청이나 주중 한국대사관을 통한 국적 조회 작업에 별 진전이 없어, 현재로서는 재판부가 그의 신분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예측하기 어려운 실정이다.

 
김용화씨의 고향은 평안남도 순안군 오금리(현재 평양시 형제산구역)이다. 중학교를 졸업한 뒤 농업기술전문학교와 단천 마그네샤 공장 기능공학교에서 기술을 배웠다. 김씨가 조선인민군에 입대한 것은 열일곱 살 때인 70년. 인민군 892부대 운전병으로 시작해 79년에는 인민군 소위로 임관해 82년까지 장교로 복무했다.

철도부 함흥철도국 단천기관차대 승무지도원으로 근무하다가 88년 북한을 탈출한 것은 다소 우연한 계기에서였다. 김씨의 주장에 따르면, 출신 지역 등을 둘러싸고 누적되었던 내부 갈등에다 그가 책임졌던 열차가 정지 사고를 내 당 정치부장·동료들과 갈등이 생겼다. 단순 사고인데도 처가 식구들의 사상성까지 들먹이면서 비판서를 강요 당하자 정치부장과 싸움을 벌인 끝에 밤새 고민하다가 자살을 결심했다. 단천역에서 ‘차라리 먼 곳으로 떠나 자살하자’고 결심한 그는 충동적으로 혜산행 열차에 올라탔다. 열차가 압록강변 도시인 혜산에 도착하자 ‘죽을 바에는 중국으로 탈출하자’는 생각이 들어 압록강을 건넜다.

감시와 도피가 계속되는 중국 생활에서 그를 안정시킨 사람은 89년 초에 만난 조선족 교포 장춘선씨(43)였다. 장씨는 김씨와 힘을 합쳐 식당을 꾸리면서 지난해 6월 중국을 떠나기 직전까지 7년 넘게 사실상 결혼 생활을 해 왔다. 결혼 생활 내내 장씨는 김씨의 중국 생활을 헌신적으로 뒷받침했다 (78쪽 인터뷰 참조). 장춘선씨는 김씨를 대신해 고생을 떠맡기도 했다. 95년 김씨의 불법 체류 사실을 안 중국 공안요원들과 북한 정치보위부 요원이 김씨의 집을 급습했다. 김씨가 집을 비운 사이 장씨가 대신 연행되어 고초를 겪은 이 사건은 그가 탈출 경로를 베트남으로 변경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베트남에서도 사정은 나아지지 않았다. 오히려 탈북 사실이 밝혀져 하이퐁 시 감옥에 수용됐고 북한으로 송환되기 직전에야 경비가 허술한 틈을 타 겨우 감옥을 빠져 나올 수 있었다.

김씨의 기구한 사연은 지난 5월 장춘선씨가 서울의 안상운 변호사에게 편지를 써서 김씨 문제를 해결해 달라고 호소하면서 주변에 조금씩 알려지기 시작했다. 안변호사는 94년 조선족 교포 이영순씨의 주민등록취소 무효 청구 소송을 승리로 이끈 적이 있어 조선족 사이에서는 어느 정도 이름이 알려져 있다. 장씨는 이 편지에서 ‘용화씨가 한국으로 떠난 뒤 소식을 알지 못하다가 외국인보호소에서 함께 생활했던 조선족 동포를 통해 그곳에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한국에 도착해 지금까지 그런 생활을 하고 있을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라고 하소연했다.

“그 사람은 북한 사람이 틀림없다”

김씨의 사연이 알려지자 귀순자 단체인 숭의동지회(회장 오손석)와 이북5도민회 관계자들도 나서기 시작했다. 숭의동지회 회원들은 지난 6월14일 경찰청이 주최한 안보 현장 견학 행사에서 1백20여 명이 서명해 김씨 사건 담당 재판부에 탄원서를 제출하고, ‘김씨가 법적으로 보호 받을 수 있는 기회를 달라’고 호소했다.

김씨가 중학을 졸업하면서부터 거주했던 함경남도 단천에 고향을 둔 실향민들도 김씨를 위해 발벗고 나서기 시작했다(82년 작고한 그의 부친 김석갑씨의 고향도 단천이다). 지난 7월2일 김씨를 접견한 단천군민회장 심재륜씨는 이야기를 나눠 보니 단천 사람이 틀림없다면서, 김씨를 선처해 달라고 호소했다. 귀순한 후 정보사에서 김씨와 함께 거주하며 조사를 받았던 오명선씨(32·95년 귀순)도 단천에서 83~87년 군 생활을 해 지역 사정에 밝은 편이다. 그 역시 “김씨가 북한 사람인 것은 분명하다. 필요하다면 내가 보증설 수 있다”라고 말했다.

이러한 주변의 증언과 정황을 종합해 볼 때 김용화씨가 북한 출신인 것은 분명해 보인다. 그러나 그가 법적으로 대한민국 국민의 자격을 획득하기 위해서는, 입국했을 때 갖고 있던 거민 신분증이 위조한 것이며 그가 중국 국적을 획득하지 않았다는 증명이 필요하다. 법무부 유병랑 출입국관리국장은 “위조 여권으로 입국한 일부 조선족 중에는 여권을 위조한 장소를 허위로 진술해 중국 공안 당국의 확인 작업에 혼선을 주는 사례도 있는 만큼 김씨의 진술을 그대로 믿을 수 없다”라고 밝혔다(80쪽 인터뷰 참조).

더구나 주한 중국대사관과 주중 한국대사관을 통해 의뢰한 김씨의 여권 발급이나 국적 확인 작업은 1년이 다 되도록 아무런 소식이 없다. 법무부 당국자는 독촉하는 것말고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다고 말한다. 현재 법무부 서울외국인보호소측은 김용화씨에 대한 일반인의 접견을 ‘민감한 문제’라는 이유를 들어 제한하고 있다.

김씨는 취재진이 자신에 대해 접견을 신청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시사저널> 편집국으로 여러 차례 전화를 걸어 왔다(외국인 보호소 수용자들이 외부로 전화를 거는 것은 허용되어 있다).

“차라리 북한으로 돌려보내 달라”

국적 문제 때문에 1년 넘게 귀순이 허용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는 김씨는, 자기가 북한 주민이 아니라면 그동안 한국의 정보기관이 조사한 건 다 허위란 말이냐고 항변했다. 또한 그는 변호사가 찾아 오기 전까지 6개월 동안은 전화와 면회도 금지 당했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서울외국인보호소측은 “외부인이 이들을 면회하고 나면 당사자들이 동요하기 때문에 접견을 일부 제한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현행 출입국관리법은 ‘외국인’에 한해 1차 연장을 포함해 최대 20일 동안 보호 명령을 내릴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다. 더구나 이 보호나 강제 퇴거 명령은 법관이 아닌 출입국관리소장 등이 하게 되어 있어 법조계 일각에서는 위헌 소지가 있다는 말도 나오고 있다. 북한을 탈출해 졸지에 ‘외국인’이 되어 버린 김씨는 현재 외국인보호소에 7개월 가까이 수용되어 있다.

94년의 이영순씨 사건에서 보듯이 해외 교포들이 국적 문제로 인해 한국 정착에 어려움을 겪은 예는 이전에도 몇 차례 있었다. 그러나 김씨처럼 탈북자가 1년 넘게 정착은커녕 귀순마저 허용되지 않는 경우는 이번이 처음이다.

‘법대로’를 외치는 완강한 당국 앞에서 ‘이럴 바에야 차차리 북한으로 돌려보내 달라’는 김씨의 외침은 외국인보호소 담 안에서만 맴돌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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