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공개 실상 증언 및 성금 계좌 안내
  • 정리·김 당 기자 (sisa@sisapress.com)
  • 승인 1997.05.29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朝中 접경 지역서 확인한 ‘북한 기근 실상 ®’/“길 가던 사람들 픽픽 쓰러져 숨져”
<시사저널>은 지난주에 예고한 대로 ‘통일 강냉이 모임’의 현장(중국 동북 3성 및 조·중 접경지대) 상근자들이 기록한 ‘북한 기근 정보 ⑤’에 이어 ‘기근 정보 ⑥’(4∼5월 초 상황)을 입수해 이를 요약 소개한다. 이 모임은 북한 동포 돕기 성금 모금 및 식량 전달 그리고 ‘현장 정보 수집 및 전파’라는 특수한 임무를 수행하고 있는 젊은 기독교인 중심의 단체이다. 이 모임은 약 2주 단위로 북한 식량 사정에 관한 정확한 정보를 수집해 ‘북한 기근 정보’라는 형식의 보고서를 작성해 왔다.

이와 관련해 이 모임의 관계자는 “앞으로도 대략 2주 단위로 새로운 보고서를 계속 작성할 것이다. 그러나 북한 기근 관련 정보는 사실상 이미 모든 내용을 다 수집한 상태나 마찬가지이다. 다만 ‘애써 인정하고 싶어하지 않는 사람들’까지 인정할 수밖에 없는 직접 증거, 예를 들어 비디오나 사진 증거를 확보하는 것만 남아 있을 뿐이다”라고 밝혔다. <시사저널>도 ‘북한 기근 정보’ 소개를 이번주로 마감하고 직접 증거를 확보하는 데 노력할 것이다.

이번 기근 정보는 4월 중순∼5월 초 중국 길림성(吉林省)의 연길(延吉)·용정(龍井)·도문(圖們)·화룡(和龍) 및 조·중 접경 마을에서 만난 탈북 식량 난민 5명, 탈북 난민을 보호 중인 조선족 2명, 북한을 방문하고 온 조선족 1명 등을 인터뷰한 내용과 두만강변의 조선족 접경 마을 방문기를 토대로 한 것이다. 한편 지난주에 소개한 내용 중에서 강원도 무역국장이 소금을 구하러 중국에 왔으나 석 달째 구하지 못하고 있어 ‘통일 강냉이 모임’에서 소금 천t을 건네기로 한 부분은 사실과 다른 것으로 확인되었다. <편집자>

4월18일 오전 중국 연변 자치주 용정 시 조양천 부근의 한 과수원에 딸린 오막살이 흙집에 숨어 있는 탈북 식량 난민 모자(母子)를 만났다. 흙벽은 밖으로 구멍이 뻥 뚫려 있었고, 바닥에는 온몸에 땀을 비오듯 흘리고 있는 아들(29·철도전문학교 졸업)과 온몸이 퉁퉁 부어 신음하는 홀어머니(63)가 두려움과 불안에 떨고 있었다. 이들이 이곳에 도착한 지는 10일째. 그동안 아들은 어머니에게 죽을 쑤어 먹이면서 틈틈이 과수원의 빈 땅을 뒤집어 감자와 옥수수를 파종해 놓고 있었다. 그러나 중병에 걸려 있는 어머니는 아들의 등에 업혀 차가운 겨울 바람을 쐬며 두만강을 건넌 탓인지 아들의 간병에도 불구하고 병세가 악화해 생명이 위독해 보였다.

우리는 좀더 좋은 장소로 옮기라고 권유해, 새 장소에서 이 모자와 10일간 숙식을 함께하며 병 치료를 해주고 북한 소식을 들었다. 북한에서 약을 전혀 써보지 못한 탓인지 금방이라도 숨을 거둘 것 같았던 이 홀어머니의 병세는 약을 쓴 지 사흘 만에 걸을 수 있을 만큼 호전되었다. 우리는 모자에게 지고 갈 만큼 길양식을 주었고, 이들은 고난받는 조국에 돌아갈 날을 기약하며 우선 내몽골로 간다고 길을 떠났다. 다음은 아들의 증언이다.
훔쳐 먹을 수 있으면 맞아 죽어도 행복

“3년 전에 군대 생활 10년을 마치고 제대했다. 군에 있을 때는 밖의 식량 사정이 이렇게까지 어려운 줄 몰랐다. 우리 가정은 아버지(작고)의 성분이 좋았던 덕분에 비교적 좋은 생활 수준을 유지했지만, 그래도 하루 세 끼를 제대로 먹을 수 없었다. 게다가 작년부터는 사정이 급격히 나빠져 이대로 눌러앉아 있다가는 굶어 죽을 수밖에 없다는 확신이 생겼다. 어머니와 의논한 끝에 유일한 재산인 집을 지난해 말에 조선돈 만원에 팔아 그 돈으로 피난 보따리를 만들고, 쌀을 사서 밥을 양껏 먹었다.

청진시에는 우리처럼 집을 팔고 거리와 역전 주변을 떠도는 사람이 헤아릴 수 없이 많다. 95년에는 한가족 모두가 자살한 사건이 있었다. 더 살 길이 없다고 생각한 부부가 ‘죽더라도 밥이나 한번 실컷 먹어 보고 죽자’며 집을 팔아 쌀을 사서 쥐약을 탄 밥을 양껏 해놓고 아이들과 둘러앉아 실컷 먹고 죽었다. 청진시에는 95년부터 전염병(장티푸스와 파라티푸스)이 돌아 내가 청진을 떠날 때까지 수천 명이 죽었다. 병에 걸려도 약이 없어 그대로 죽어갔다.

청진에서 회령까지 기차를 타고 왔는데, 기차는 언제 출발하고 언제 도착하는지 시간이 정해져 있지 않았다. 전력 사정이 나쁜 데다 잦은 고장 때문에 청진역 기차 시간 안내판에는 분필로 ‘도착 시간 12시간 지연’이라고 썼다가 잠시 후 다시 ‘도착 시간 미정’으로 고칠 만큼 전구간에서 열차 사정이 이런 식이었다. 그렇다 보니 열차가 오면 서로들 먼저 타려고 밀치는 바람에 문보다 창문으로 타는 사람이 더 많았다. 회령까지(서울서 평택 정도의 거리·편집자 주) 타고 온 기차는 유리창이 한 장도 없고 내부는 의자도 없이 맨바닥이었는데, 밤낮으로 서로 살을 맞대고 앉아 있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고, 매일 아침마다 쪼그리고 앉은 채 굶어 죽은 사람들이 3명씩은 나왔다.

회령에 도착해 장마당에 갔는데 청진처럼 꽃잽이(집과 옷 등속을 모두 팔아먹고 떠도는 걸인. 어원이 꽃제비라는 설도 있음·편집자 주)들이 많이 있었다. 이들은 대개 남의 가게나 식당 등 아무 곳에서나 먹을 것이 있으면 잽싸게 훔쳐서 목구멍으로 넘기기만 하면 맞아 죽어도 행복해 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시장에서는 몇푼어치 안되는 먹을 것을 팔아도 모두 그물을 쳐 놓고 판다. 그래서 요즘 꽃잽이들은 시장에서 사람들이 음식을 입에 넣는 순간을 기다렸다가 잽싸게 가로채서 얼른 제 입에 넣는 형태로 기술이 발전했는데, 나도 회령 시장에서 그 광경을 직접 목격했다.

창피해서 말 안하려고 했는데 실은 진흙 떡을 먹은 적도 있다. 군대에 있을 때 도로 공사를 하는데 부드러운 진흙이 나왔다. 하도 배가 고파서 남이 보지 않을 때 몰래 진흙을 한움큼 퍼서 먹었는데, 굶주린 위가 가득 차는 느낌이 들어 기분은 좋았다.”
두만강 접경 마을인 개산둔(開山屯)에서 회령서 온 한 소녀(16)를 만났다. 이 소녀는 2월26일 두번째로 월경했는데 “식량이 하도 바빠서” 그랬다고 말했다. 소녀가 밝힌 양식 배급은 김정일 생일날에 네 식구 몫으로 받은 1.1kg이 전부였다. 중학생은 5백g, 소학생은 4백g, 일이 없는 사람은 3백g씩 받았다고 했다. 소녀는 “3년 전에는 이밥(쌀밥)은 못먹어도 옥수수밥은 먹었는데 지금은 낟알을 통 구경할 수가 없다”라고 했다. 그래서 먹지 못해 굶어 죽는 사람이 많은데, 자기 친할머니도 잡숫지 못해 돌아가셨다고 했다.

북한과 변경 무역을 하는 한 조선족 교포는 지금까지 탈북 난민 15명쯤을 숨겨주고 먹을 것을 대 주었다. 그러나 중국 정부가 양식 구하러 넘어오는 북한 사람을 돕는 조선족들에게 벌금을 물리는 바람에 이들을 돕는 것도 점점 어렵게 되었다고 하면서 이렇게 증언했다.

“처음 건너온 탈북자들은 온몸에 이가 가득하다. 또 음식을 주면 몸이 음식을 받지 못해 설사를 한다. 옷에다 그냥 다 싸버린다. 그래도 처음에는 눈에 불을 켜고 허겁지겁 많이 먹는데 며칠 지나면 잘 먹지 못한다. 몸이 갑작스런 변화를 흡수하지 못하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이 고비를 넘기면 좋아진다. 이들한테는 먹는 일말고는 다른 소망이 없다. 그래서 취직을 시켜 주면 이들을 부리는 중국인들이 때리고 천한 일만 시킨다. 밥만 먹여주고 한푼도 안주는 식이다. 그래도 하소연할 길이 없다.”

“대변 보다가 허기에 지쳐 죽는 사람도”

무역 거래 때문에 어떤 때는 하루에도 몇번씩 북한을 다녀온다는 이 조선족 교포는 “북한의 기아 상황은 말로 듣는 것보다 직접 보는 것이 더 심각하다. 정말 풀과 나무만 먹고 산다”라고 단언하면서 이렇게 증언했다.
“회령역에 기차가 도착한 것을 보면, 객차 위에까지 사람이 새까맣게 올라 있는 것은 보통이고, 한 번에 보통 굶어 죽은 시체가 8구씩 나온다. 또 지난 2월 황해도 사리원에서 온 김 아무개씨(여)를 보살폈는데, 이 여자는 ‘사리원에서 길을 가다 보면 비틀거리던 사람들이 갑자기 픽픽 쓰러져 죽는다. 그러면 안전부원들이 트럭을 몰고 다니며 널부러진 시체를 수거해 집단 매장한다’고 들려줬다. 나는 작년에 삼봉(함북 온성군의 접경 마을)의 한 공중변소에 갔다가, 대변을 보다 허기에 지쳐 죽는 사람을 직접 보았다.”

북한 기근 정보를 취합하다 보면 빠지지 않는 것이 인육 매매에 관한 증언이다. 식량을 전달하러 북한을 방문하고 4월18일 돌아온 조선족 정 아무개씨도 인육 사건을 증언했다.

“내 전보를 받고 북청(함경남도)에서 온 친척을 회령에서 만났다. 그곳 형편을 묻자 다른 말은 안하고 ‘그동안 강냉이 속대를 갈아서 끓인 죽을 먹었다. 곡식을 구경한 지 너무 오래라 곡식을 받으면 몸의 감각이 어떨는지’하며 울먹일 뿐이었다. 준비해 간 찹쌀떡을 주었더니 ‘이제는 청진까지 걸어갈 수도 있겠다’고 기뻐하며 떠났다. 회령에서 하룻밤을 자고 다음날 연길로 돌아오는 길에 회령 사람들이 한 부부의 화형식 집행을 보기 위해 강변 시장에 가득 모인 것을 보았다. 그곳에서 들은 내용은 너무 끔찍한 것이었다. …(내용 생략)… 이 사건은 전 회령 시내에 알려졌기에 사실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4월 말의 한 주간에 화룡현 숭선(崇善)-남평(南坪) 지역의 조선족 변경 마을을 탐방 조사했다. 조사 결과 이곳에는 매일 밤마다 ‘밤손님’(양식 구걸하러 오는 북한 사람)들이 찾아드는 것이 보편적인 현상으로 자리잡고 있었다. 주로 마을 외곽 지역의 집에 많이 드는데, 국경을 수비하는 북한 병사들도 자주 온다. 한 집이 인심이 좋다고 소문이 나면 북한 사람들에게도 소문이 퍼져 계속 그 집에만 ‘손님’이 많아진다. ‘단골 손님’이 많다는 한 조선족 집을 찾아가 보니 밤손님이 너무 많이 찾아와 옷과 곡식을 다 준 나머지 자신들이 갈아입을 옷조차 없었다.

이 조선족 마을에서는 밤 11시 이후에 개가 짖으면 북한에서 밤손님이 온 것으로 생각한다. 밥을 해주면 혼자서도 5인분용 밥솥 하나를 비워 버리고, 혹시 먹고 남으면 호주머니에 넣어 간다. 그러나 반갑지 않은 밤손님들이 남기고 가는 것은 없다. 요즘 들어 중국 정부는 이들을 맞아들이는 집에 대해 벌금(인민폐 5천위안)을 부과하겠다는 방침을 발표했다. 따라서 ‘목구멍이 포도청’인 북녘 동포들이 밤손님 노릇을 하는 것도 점점 어렵게 되었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