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쿠바 혼내려다 ‘사면초가’ 위기
  • 박재권 기자 ()
  • 승인 1996.08.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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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름스-버튼법’ 무리한 적용이 전세계 반발 불러
‘패권주의’라는 말은 중·소 분쟁이 한창이던 시절 중국이 소련을 비난할 때 사용했던 말이다. 다른 나라의 의견을 완전히 무시하고, 자기들 정책을 강요하는 안하무인 격인 태도를 비판한 것이다.

 
그런데 지금 미국이 똑같은 비난을 받고 있다. 91년 소련이 해체된 후 유일한 초강대국으로 남게 된 미국이 자기들의 국내법을 다른 나라 기업에 강제 적용하려고 한 것이 화근이었다. 헬름스-버튼법으로 더 잘 알려진 ‘1996 쿠바 자유 및 민주 연대법’이 바로 문제의 법률이다. 이 법의 핵심은 59년 쿠바에 카스트로 정권이 들어선 후 몰수된 미국 기업과 개인의 재산을 외국 기업이 거래할 경우, 해당 기업과 개인을 미국 국내법에 따라 처벌할 수 있도록 규정한 것이다. 공식 발표에 따르면, 카스트로 정부가 몰수한 미국 재산은 당시 금액으로 60억달러 정도이지만, 비공식으로 집계한 액수는 그보다 10배나 많다. 이 중에서 현재 소송이 제기된 건수는 전체 5천9백11건이고, 액수로는 18억달러에 이른다.

이 법에 따라 미국 정부는 7월10일 처음으로 쿠바와 거래한 캐나다 탄광회사 셰릿 인터내셔널사의 이사 2명과 그 가족 등 7명에게 미국 입국이 거부될 것이라고 통보했다. 미국의 국내법 때문에 자국 기업들이 줄줄이 미국 법원에 제소될지도 모르는 사태가 발생하자, 각국 정부가 들고일어났다. 쿠바에 가장 많이 투자하고 있는 캐나다·멕시코는 물론이고, 외국인 투자의 45%를 점유하고 있는 유럽연합(EU) 15개 회원국, 그리고 중남미 국가들이 일제히 미국의 조처를 비난하고 나섰다. 이들은 미국 정부가 이 법 집행을 강행할 경우 세계무역기구(WTO)에 제소하거나 보복법을 마련해 강력 대응하겠다는 자세를 보였다.
카스트로 정권 전복이 주목적

국제 사회의 비난이 거세지자 클린턴은 7월16일 논란이 된 일부 조항의 발효 시점을 6개월 뒤로 연기하는 타협책을 제시했다. 미국내 보수파와 쿠바계 미국인들의 요구를 무마하면서도, 국제 사회의 비난을 비켜 가겠다는 속셈이다. 그러나 클린턴이 제시한 해결책은 어느 쪽도 만족시키지 못하고, 11월 대선 이후로 골칫거리를 미룬 것에 불과하다. 캐나다, 멕시코, EU 국가들이 클린턴의 결정을 일단 환영하면서도 헬름스-버튼법에 대한 대응책을 다각도로 모색하고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헬름스-버튼법은 얼핏 30여 년 전 몰수된 미국의 재산을 되찾는 것이 목적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실제로는 쿠바로 들어가는 외국 자본을 차단해 카스트로 정권을 무너뜨리는 데 목적이 있다. 클린턴 정부가 이것을 쿠바의 민주화를 촉진하는 것이라고 달리 부르고 있을 뿐이다.

현재 쿠바에는 서방 기업과 자본이 대거 유입되어 있지만 정확한 통계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최근호 <타임>은 4천여 기업이 50억달러 이상을 투자하고 있다고 파악하고 있고, 미국·쿠바무역경제위원회는 투자하기로 약속한 50억달러 가운데 실제 이행된 액수가 10분의 1 정도밖에 안된다고 평가 절하하고 있다. 그리고 <워싱턴 타임스>가 발행하는 <인사이트 온 더 뉴스>에 따르면, 50개국에서 2백개 기업이 진출해 있다. 하지만 쿠바 정부가 후원하는 경제지 <쿠바 리뷰>는 최근 몇년간 외국 기업 6백50개가 21억달러를 투자했다고 밝혔다. 미국은 이같은 자본 유입을 막음으로써 카스트로의 숨통을 죄겠다는 것이다. 미국의 제재 조처가 강화되면서 실제로 쿠바에 대한 외국인 투자는 줄어드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클린턴의 봉쇄 정책을 놓고는 미국 내에서도 의견이 분분하다. 올해 초 외교 전문지인 <포린 어페어스>를 통해 ‘봉쇄냐 개입이냐’를 놓고 전문가들 간에 치열한 공방이 벌어졌는데, 봉쇄를 주장하는 측은 카스트로 정권을 무너뜨리고 쿠바에 민주화를 이루는 최선의 방책은 봉쇄를 강화하는 것뿐이라고 주장했다. 반면 과거 레이건 대통령의 측근이었던 로저 폰테인 같은 이는 봉쇄 정책이 카스트로를 권좌에서 내쫓기는커녕 그의 인기만 높여주고, 미국과 동맹국들 간의 관계만 악화시킬 것이라고 주장했다.

 
클린턴, 대선 앞두고 쿠바계 미국인 표 의식


하지만 미국 정부가 쿠바를 복속시키거나 사회주의 체제를 무너뜨리기 위해 취했던 숱한 시도가 번번이 실패한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이것은 이란·이라크·리비아에 대한 정책도 마찬가지이다. 따라서 워런 크리스토퍼 국무장관은 클린턴 대통령에게 이 법안에 거부권을 행사하라고 조언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런데 지난 2월24일 쿠바 공군이 미국의 민간 항공기 2대를 격추해 4명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상황이 완전히 달라졌다. 원래 이 사건은 과거 중앙정보국(CIA) 요원으로 활동했던 쿠바계 미국인들이 91년 조직한 ‘구조를 위한 형제들’에 소속된 경비행기로서, 카스트로 정권을 전복하도록 부추기는 전단을 살포하기 위해 쿠바의 수도 아바나까지 날아간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그때마다 쿠바 정부는 미국 정부에 항의했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지난 2월의 격추 사건도 쿠바 공군의 경고를 무시하고 비행을 감행하다 발생한 것이었다. 사고 직후 <타임>과 가진 회견에서 카스트로는 “참는 데에도 한계가 있다”라고 잘라 말했다.

하지만 이 사건을 계기로 미국내 분위기는 극도로 격앙되었다. 게다가 11월 대선을 눈앞에 둔 클린턴으로서는 플로리다와 뉴저지 주에 몰려 있는 쿠바계 미국인들의 존재를 무시할 수 없는 상황이다. 이들이 누구를 찍느냐가 대선에서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클린턴은 지난 3월12일 헬름스-버튼법안에 서명한 데 이어, 7월16일에는 일부 조항을 6개월 유보한다는 단서를 달고 발효시켰다. 클린턴은 미국의 국가 이익이 가장 중시될 것이라고 말했지만, 동맹국과의 관계를 악화시키면서까지 실패할 것이 뻔한 법률을 시행하는 것은 대선용이라는 것이 대다수 관측통의 시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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