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루뭉실 알쏭달쏭 외교관의 말치레
  • 변창섭 기자 ()
  • 승인 1996.10.1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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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차 실수하면 외교분쟁 비화…말 속에 뼈 담은 완곡어법 사용
 
아차 실수하면 외교분쟁 비화…말 속에 뼈 담은 완곡어법 사용

외교관이 일반적으로 갖추어야 할 신언서판(身言書判) 덕목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을 꼽으라 한다면 말솜씨일 것 같다. 물론 기지와 유머도 빼놓을 수 없지만 상대측과 외교 협상을 벌이려면 아무래도 협상의 주무기는 말솜씨일 것이다.

그런데 영어가 모국어가 아닌 한국 출신 외교관들의 경우 영어를 능통하게 구사하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적절한 수사(修辭)를 가미해 정확하게 표현하는 것이 훨씬 중요하다. 같은 말이라도 뒤탈이 없도록 가려서 해야 하고, 때로는 상대방이 불편하지 않도록 직선적인 표현을 피할 줄 알아야 한다. 딱딱한 말이라도 부드럽게 표현해야 하고, 날카로운 의미를 포함하더라도 되도록이면 노골적인 표현을 자제하면서 할 말을 충분히 할 수 있어야 1등 외교관이라는 뜻이다. 우리 속담 중에‘말 속에 말이 있다’는 표현은 특히 외교관들이 예사로이 지나칠 수 없는 격언이다.

외교는 상대가 있는 만큼 외교관이 쓰는 용어는 상대를 놀라게 하거나 당혹하게 해서는 안되며, 경계심을 갖게 하거나 불편하게 해서도 안된다. 그래서 외교관들의 외교 언사는 때로 답답하다는 느낌을 주기도 한다. 속시원하게 직설적으로 표현하는 법이 없기 때문이다.

한 예로, 어떤 협상이 심한 의견 차이로 결렬되었을 때 보통 사람 같으면 직선적으로 있는 그대로를 얘기할 것이다. 외교관이라면 다르다. 그는 협상이 결렬되었다고 말하기보다는‘회담이 솔직하고 정중한 분위기에서 진행됐다’는 식으로 둘러 말할 것이다. 외교적 수사인 완곡어법으로 얘기한 것이다.

실제로 최근 국회 외무통일위원회에서 한·미공조체제의 허점을 캐묻는 의원들의 질의에 대해 유명환 외무부 미주국장이 “한·미 양국이 이견이 있는 것이 사실이나 이를 녹여내 합치된 방향으로 나가자는 것이 공조 체제이다”라는 완곡어법으로 얘기할 수밖에 없었던 것도 자칫 속내를 비쳤다가는 불필요한 외교 잡음을 낳을 수 있기 때문이다.

자신 없으면 “말할 입장 아니다”

최근 미국 워런 크리스토퍼 국무장관이 북한군 강릉 침투 사건과 관련해 외교적 완곡어법을 쓴다는 것이 도가 지나쳐 톡톡히 망신을 당했다. 카터 행정부 시절 국무부 부장관을 지낸 그는 외교적 수사에 관한 한 달인에 가깝다는 평가를 들어온 터였다. 그런 그가 9월19일 워싱턴에서 열린 한 기자회견에서 북한의 무장 간첩 및 잠수함 침투 사건과 관련해 “모든 당사자(all parties)가 더 이상 도발적인 행동을 삼가하기를 바란다”라고 지극히 중성적인 표현을 썼다. 이 말은 통상적으로 분쟁 당사자들에 대해 쓸 수 있는 중성적인 완곡어법에 속한다. 얼핏 보면 이 표현은 사건을 일으킨 북한이라는 당사자뿐 아니라 또 다른 당사자인 한국까지를 가리키고 있다는 점에서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었다. 실제로 그날 기자회견장에 배석했던 찰스 카트먼 동아시아·태평양 담당 차관보가 적극 해명에 나선 것도 그 때문이었다.

크리스토퍼 장관이 한 발언은 부주의에서 말미암은 단순한 실언으로 넘길 수도 있다. 특히 그가 고령(71세)이라는 점, 그의 주관심사가 중동과 유럽이어서 한반도 문제를 제대로 파악하고 있지 못하다는 점을 감안할 때 그런 추측이 가능하다. 그러나 한 나라의, 그것도 세계 외교를 주무르는 미국의 국무장관이 아무 생각 없이 그런 표현을 썼겠느냐는 추측 또한 가능하다.

크리스토퍼 장관은 자타가 알아주는 노련한 외교관으로, 자기 같은 고위 외교관이 신중하지 못한 말을 했을 때 어떤 외교적 파장이 올 수 있는지를 몸소 겪어온 사람이다. 변호사 출신인 그는 93년 클린턴 대통령에게 국무장관에 발탁된 뒤 전세계를 순방하며 정력적인 외교를 펼쳐 왔는데, 말에 관한 한 별로 실수를 하지 않은 것으로 평이 높았다. 따라서 그가‘모든 당사자가 자제하라’고 한 말에는 한국을 겨냥해 북한의 잠수함 침투 사건에 맞서 과잉 대응을 자제하라는 고도의 계산된 메시지가 담겼다고도 볼 수 있다.

이 문제는 미국측이 외교 경로를 통해 한국 정부에 정식 해명함으로써 외교 마찰로 비화하지는 않았지만, 크리스토퍼 장관의 진의를 둘러싼 의혹이 말끔이 가시려면 시간이 걸릴 것으로 보인다. 크리스토퍼 장관의 실언 소동은, 책임 있는 자리에 있는 외교관의 한마디가 경우에 따라 커다란 외교적 파장을 일으킬 수 있는 실례를 보여준 셈이다. 비록 그의 측근들이 적극 해명에 나섰지만 크리스토퍼가 내뱉은 말은 주워담을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쯤되면 외교적 수사 표현에 익숙하지 못한 초급 외교관들의 경우 말이 두려워 말을 못하는 형국이 벌어진다. 주한 미국대사관의 한 초급 외교관은 “실수하지 않으려고 자신이 없는 사안에 대해 질문을 받으면‘말할 입장이 아니다’라는 말을 즐겨 쓴다”라고 말했다. 한 전직 대사는 “고위직 외교관일수록 외교적 완곡어법을 보호막으로 삼아 국제 무대에서 활동한다”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국제 사회에서 외교관들이 즐겨 사용하는 외교적인 완곡어법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금세기 초 영국 출신 명외교관인 해럴드 니콜슨 경은 라는 저서에서 외교적 완곡어법의 실례를 들어 설명했는데, 지금도 전세계에서 많은 외교관이 이를 활용하고 있다.

우선 잘 쓰는 표현으로 어떤 사태를 ‘관심을 갖고 지켜본다’거나, ‘중대한 관심을 갖고 관망한다’는 말이 있다. 얼핏 보면 부드러운 말 같아도 실제는 그렇지 않다. 이런 말이 한 나라의 외무장관 입에서 나왔을 때 그 뜻은 해당 정부가 강경한 노선을 취하겠다는 것이다. 얼마전 이라크 사태가 전쟁으로 비화하기 전과 지난 봄 대만 해협에 군사적 긴장이 높아갈 때 마이크 매커리 백악관 대변인이 이런 표현을 담은 성명을 발표한 바 있다.

“결과 책임 못져”는 일전 불사 의미

앞서 예를 든 것과 비슷하지만 좀더 강력한 뜻을 담은 표현으로는‘무관심하게 남아 있을 수 없다’가 있다. 밋밋한 표현 같지만 이런 말이 나오면 해당 정부가 어떤 식으로든 개입하겠다는 뜻을 담고 있기 때문에 만만히 보아서는 안된다. 다소 표현을 달리했지만, 이번에 물의를 일으킨 크리스토퍼 장관이 93년 3월 북한 핵문제 사태가 터졌을 때‘미국 정부는 북한이 핵사찰에 성의를 보이지 않으면 가만있지는 않을 것이다’라는 강경 표현을 쓴 바 있다. 그 얼마 뒤 미국 정부내 매파를 중심으로 하여 북한의 핵시설이 모여 있는 영변에 대한 군사 공격설이 나온 것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아마도 외교적 완곡어법의 활용 빈도에서 1, 2위를 다투는 표현은 ‘입장을 신중히 재검토하겠다’라는 말일 것이다. 오늘날 이 표현은 예전처럼 국교 단절까지 포함하는 뜻은 담고 있지는 않지만, 외교 관계에 중대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강경한 의미를 여전히 함축하고 있다. 실제로 73년 가을 중동 분쟁을 종식시키기 위한 협상이 진행되는 가운데 석유 위기까지 고조될 기미를 보이자 몇몇 정부는 사태의 책임을 이스라엘에 돌리면서‘이스라엘에 대한 정책을 재검토하지 않을 수 없다’는 성명서를 발표했었다.

국교 단절을 고려하고 있다는 완곡어법으로는 ‘자국 정부의 이익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는 표현을 들 수 있을 것 같다. 이 말은 해당 정부가 국익 보호를 위해 필요하다면 국교 단절까지 고려하고 있다는 중대한 표현이다. 과거 중·소 분쟁이 걷잡을 수 없이 치달을 때 닉슨 대통령은 양국에 대해 이 분쟁이 미국의 국익에 위배된다는 점을 명백히했었다. 그 말 뜻은, 미국이 국익을 지키기 위해 개입할 수밖에 없으며, 최악의 경우 단교까지도 고려할 수 있다는 경고성 외교 메시지였다.

그밖에 요즘도 자주 쓰는 완곡어법으로는‘○○ 정부의 조처를 비우호적 행동으로 간주한다’와‘결과에 대해 책임지지 않겠다’는 표현이 있다. 두 표현 모두 사태가 여의치 않을 경우 일전도 불사한다는 뜻을 함축하고 있는 무서운 말들이다. 특히 후자의 경우 함축 강도는 더하다. 외교상 책임질 수 없다는 표현은, 통상 정세가 막바지 단계에 접어들었을 때나 쓰는 극한 표현이다. 이와 관련해 종종 신문 머리 기사 제목으로 등장하는 단어가‘중대한 결과’라는 말이다. 어떤 사태에 대해 중대한 결과에 ‘직면할 것’이라든가 또는 ‘초래할 것’이라는 표현은 최악의 경우 전쟁까지 각오하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외교적 완곡어법은 잘 구사하면 외교관의 품위를 더해 주지만 잘못 구사할 경우 크리스토퍼 장관처럼 망신을 당할 수 있다. 특히 매일매일 각종 성명서를 발표하고 기자들의 질문에 답해야 하는 국무부나 외무부 대변인은 말 실수를 하지 않으려고 극도로 자제된 외교적 수사에 의존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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