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기여 불을 뿜어라, 중동 평화는 없다
  • 박재권 기자 ()
  • 승인 1996.10.1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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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타냐후 총리, 평화협정 무시…무력 충돌 불가피
 
93년 9월13일 오전 세계인의 이목이 백악관 남쪽 잔디밭으로 쏠렸다. 87년부터 시작된 팔레스타인 주민들의 ‘인티파다’(무장투쟁)에 종지부를 찍는 중동평화협정 서명식이 거행된 것이다. 이 행사는 클린턴 대통령이 연출하고 이츠하크 라빈 전 이스라엘 총리와 야세르 아라파트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 의장이 주연을 맡았다. 서명식을 계기로 세계인들은 중동 지역의 분쟁이 종식될 것이라는 희망에 부풀었다. 라빈 총리는 ‘무기여 잘 있거라’라고 말할 수 있는 날이 오도록 다같이 기도하자고 말했고, 클린턴 대통령은 ‘폭력의 외침이 그대 땅에서 더 이상 들리지 않으리’라는 이사야의 예언을 인용하며, 평화를 위해 함께 노력하자고 당부했다.

클린턴 중재 실패…돌파구 마련 기대난

하지만 그로부터 3년이 흐른 지금, 그날의 기쁨과 희망은 실망과 좌절로 바뀌었다. 지난 5월 당선된 후 취임 백여 일을 맞은 베냐민 네타냐후 총리가 팔레스타인과 맺은 합의 사항을 모두 무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이스라엘에 맞서 제2의 인티파다를 준비하고 있다.

중동이 언제 다시 폭발할지 모르는 상황으로 빠져들자 클린턴은 부랴부랴 사태 진화에 나섰다. 그는 10월1∼2일 백악관에서 네타냐후 총리, 아라파트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수반, 후세인 요르단 국왕을 불러모아 긴급 정상회담을 열었다. 대선이 한 달도 남지 않은 상황에서 클린턴은 자신의 최대 외교 치적으로 꼽히던 중동 평화가 좌초되는 것을 지켜보고만 있을 수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회담은 예상대로 실패로 돌아갔다. 실무 회담을 재개한다는 데 합의했지만, 이것은 대선을 앞둔 클린턴의 입장을 고려한 미봉책에 불과했다.

양측의 충돌은 지난 9월23일 예루살렘에 있는 고대 지하 터널을 이스라엘이 일반에 공개함으로써 촉발되었다. 공개된 지하 터널은 회교 성지인 알 아크사 사원 옆을 지나가는데, 터널 일부와 그 출구는 팔레스타인 관할 지역에 들어 있었다. 이에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이를 이스라엘이 예루살렘을 독차지하려는 의도적 행위라고 보고 강력하게 저항했다. 양측의 무력 충돌로 72명이 사망하고 수백 명이 다쳤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저항이 격렬한 데는 그동안 누적된 네타냐후 체제에 대한 불만이 깔려 있다. 지난 5월29일 총선에서 온건파인 페레스 전 총리를 물리치고 당선된 네타냐후 총리는 안보지상주의자이다. 그는 중동평화협정의 기본 틀인 ‘땅과 평화 교환’ 원칙을 전면 거부하고 있다. 이스라엘이 67년 제3차 중동전쟁(6일전쟁) 때 점령한 동예루살렘·요르단 강 서안·가자 지구·골란 고원을 돌려주는 대신 평화를 보장받는 평화협정의 기본 원칙에 반대하는 것이다. 그는 이스라엘 국민의 안전을 최우선 과제로 설정하고, 점령지 반환에는 부정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다.

팔레스타인과 관련해서 보면, 그는 우선 요르단 강 서안 지역의 헤브론에서 이스라엘군 철수를 미루고 있다. 93년 중동평화협정에서 양측이 합의한 바에 따르면, 이스라엘은 이미 지난 3월에 군대를 철수했어야 했다.

동예루살렘을 팔레스타인 사람에게 내주지 않겠다고 주장하는 것도 양측 합의 사항을 깬 것이다. 예루살렘은 유대교·기독교·회교가 모두 성지(聖地)로 삼는 곳으로서, 양측은 이미 지난 5월 동예루살렘의 지위에 관한 협상을 시작해야 했다. 그리고 그에 관해 최종 결론이 나기 전에 예루살렘의 지위에 대해 언급해서는 안된다. 그런데도 그는 예루살렘이 분리될 수 없는 이스라엘의 영토라며 팔레스타인과의 협상 자체를 거부하고 있다.

그뿐 아니다. 네타냐후는 요르단 강 서안에 유태인 정착촌 건설을 재개하도록 결정했다. 지난 9월 그는 주택 1천8백 채를 이 지역에 신축하도록 함으로써, 중동평화협정의 기본 전제를 무시했다. 옛 소련 등 외국에서 몰려드는 유태인들을 이 지역에 수용하기 위한 것이다. 유태인이 다수가 되면 협상할 필요 없이 이 지역을 차지할 수 있다는 계산이 깔린 것이다. 야세르 아라파트 팔레스타인 자치 정부 수반은 네타냐후의 그같은 정책을 ‘선전포고’라고 규정하고,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총파업 투쟁에 나서라고 촉구했다. 이런 상황에서 지하 터널 공개가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분노를 촉발했던 것이다.
10월2일 워싱턴 회담이 실패로 끝나자 팔레스타인인들의 과격 조직 하마스는 이스라엘에 대한 전면 봉기를 주장하고 나섰다. 중동에 평화의 기운이 무르익자 하마스는 점차 지지 기반을 상실했었다. 독립 국가 건설과 경제 발전의 꿈에 부푼 팔레스타인인들이 과격 투쟁에 등을 돌렸던 것이다. 그 때문에 하마스는 지난 1월20일 치러진 팔레스타인 총선 때 선거 참여 여부를 놓고 내분을 겪기도 했다. 그런데 네타냐후가 등장해 강경 정책을 펼치자 팔레스타인인들이 제2의 인티파다 대열에 나서고 있는 것이다.

앞으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양측은 실무 회담을 계속할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돌파구가 마련되리라고 기대하는 전문가는 한 사람도 없다. 네타냐후가 93년 평화협정의 합의 사항을 거부하는 한 폭력 사태는 피할 수가 없다.

양측 사이에서 곤혹스러워진 것은 클린턴 대통령이다. 대선을 한 달도 남겨 놓지 않은 그는, 네타냐후에게 지하 터널을 폐쇄하라고 요구했다. 이에 대해 네타냐후는 거부 입장을 분명히 밝혔다. 중동 평화가 계속되기를 바란다는 미국의 주문에 대해서도 협상을 계속하겠다며 얼버무리고 있다. 클린턴은 이같은 사태가 올 것을 우려해 지난 5월 총선에서 페레스 전 총리를 지원했다. 그런데 예상을 뒤엎고 네타냐후가 총리에 당선됨으로써 클린턴은 곤란한 처지에 빠졌다. 두 사람의 관계가 서먹해진 것은 물론이고, 클린턴의 영향력이 약해질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렇다고 미국이 이스라엘을 제재할 수도 없다. 냉전이 종식된 후 아랍권 국가들이 친미로 돌아섬으로써 이스라엘의 중요성이 줄어든 것은 사실이다. 그럼에도 이스라엘은 여전히 미국의 중동 정책에서 가장 중요한 위치에 있다. 이스라엘이 매년 미국 정부원조(ODA)를 30억달러씩 받는 최대 수혜국이라는 사실만 보아도 그 점은 분명하다.
 

강경 네타냐후 총리 궁지에 몰려

여기에는 미국내 유태인들의 입김이 크게 작용한다. 96년 1월 현재 미국에는 유태인 5백80만명이 산다. 이것은 이스라엘에 사는 유태인보다도 많은 숫자이다. 뿐만 아니라 미국내 유태인은 정계·관계·경제계·언론계에서 막강한 위력을 발휘하고 있다. 제너럴 일렉트릭·제너럴 모터스·AT&T·IBM·보잉·듀퐁·제록스 등은 대표적 기업들이고, <워싱턴 포스트>와 <뉴욕 타임스>도 유태계 신문이다. 1천7백명 정도로 구성된 유태인들의 정예 조직 ‘외교문제평의회(CFR)’는 미국 내에서 ‘보이지 않는 정부’라고 불릴 정도이다. 이 때문에 미국의 어떤 정권도 유태인을 무시하고는 정책을 펼 수 없게 되어 있다. 인구 5백50만인 이스라엘의 총리가 클린턴 앞에서 당당할 수 있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 유혈 충돌을 계기로 네타냐후는 내외의 거센 저항에 직면하게 되었다. 걸프전 이후 분열 양상을 보이던 아랍국들이 단결해 아라파트를 지원하고 있으며, 이스라엘 내에서도 네타냐후에 반대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가장 많은 의석을 가진 노동당은 물론이고, 집권당인 리쿠드당과 함께 연정을 구성하고 있는 나머지 정당들에서도 걱정하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최근 실시된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예루살렘 지하 동굴을 공개한 것에 반대하는 응답자가 54%나 된다. 클린턴 정부의 압력도 만만치 않고, 국제 사회 역시 네타냐후에 대해 혹독한 비판을 가하고 있다.

국내외에서 궁지에 몰린 네타냐후는 강경 정책을 포기할 것인가. 아니면 ‘안보’에 매달리다가 93년 출항한 ‘중동평화호’를 좌초시킬 것인가. 선택은 네타냐후에게 달려 있다. 그는 평화와 폭력의 갈림길에서 선택을 강요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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