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협정'에 속끊이는 미국
  • 李興煥 기자 (sisa@sisapress.com)
  • 승인 1995.06.0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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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은 주한미군 철수를 끌어내기 위해 평화협정 체결을 주장한다. 미국이 무력 제재 가능성을 포기해야만 미국과 손잡겠다는 것이다.
전쟁을 끝내는 방법은 세 가지이다. 교전 당사자들이 서로 싸움을 그만두든지(적대 행위 중지), 어느 한쪽이 다른 한쪽을 이기든지(정복), 이도저도 아니면 평화조약을 체결하는 것이다.

북한은 70년대 이후 줄곧 평화협정 체결을 주장하고 있다. 53년에 체결한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바꾸자는 것이다. 북한과 미국이 접촉할 때마다 이 평화협정 문제는 항상 핵심 사안으로 등장한다. 콸라룸푸르의 준고위급 회담에서도 평화협정 논의 여부가 쟁점이 되었다. 미국의 입장은 명백하다. 정전협정의 틀을 유지하겠다는 것이다. 북한과 미국 간의 신경전은 지루하게 이어지고 있다.

아태평화재단 林東源 사무총장은 “평화협정이라는 말 안에 섞여 있는 두 가지 개념을 나누어 보아야 혼란스럽지 않다”고 지적한다. 적대 관계였던 나라들이 관계를 정상화하려면 평화협정을 체결한다. 북한과 미국 간의 관계 정상화를 뜻하는 평화협정 개념과, 정전협정을 대체하는 의미의 평화협정은 구별해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미국과 북한 사이에는 이미 외교 관계 정상화를 위한 얘기가 오가고 있다. 제네바 합의도 그 일환이다. 두 나라의 접촉은 삐걱거리는 소리가 요란하기는 하지만 수교라는 궁극의 목표점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공통된 견해이다. 결국 양쪽의 관계 정상화를 위한 평화 체제의 틀은 밑그림이 그려져 있는 셈이다. 남은 문제는 군사정전협정의 틀을 고수하려는 미국의 속뜻이다.

“한국도 평화협정 체결 당사자 될 수 있다”

북한이 겨냥하는 것은 주한미군을 주축으로 한 한국내 유엔군사령부의 해체이다. 유엔군사령관이 이른바 ‘교전 당사자’이므로 정전협정의 효력이 사라지고 나면 유엔군의 존재 근거가 없어지기 때문이다. 군사정전협정의 주체는 협정문 제목(‘국제연합군 총사령관을 일방으로 하고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 및 중국인민지원군 사령관을 다른 일방으로 하는 한국 군사정전에 관한 협정’)에 명시되어 있다.

미국의 고민은 바로 여기에 있다. 한국 내에 미군이 주축이 된 유엔군을 주둔시키는 정책이 변하지 않는 한 미국은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바꾸는 데 동의하기 힘들다. 일부 전문가들은 미국이 미·북한 접촉에서 공개적으로 말하기 힘든 또 다른 고민을 지적한다. 일본에 주둔한 미군의 존재이다.

한반도에서의 유엔군 활동을 지원하기 위해 일본 정부는 미국에 일본 내의 군사 기지 및 시설·용역을 제공하기로 되어 있다. 한국전쟁 때 체결한 미·일 간의 조약에 따른 것이다. 따라서 한국의 유엔군사령부를 해체할 경우 미국은 일본의 군사 기지를 사용할 명분이 없어진다. 일본은 미국이 취하고 있는 동북아 정책의 주춧돌 노릇을 하고 있다. 군사·경제력 확장에 따른 중국의 패권주의를 경계하고, 동북아에서 힘의 균형을 유지하려는 미국의 처지에서 일본은 없어서는 안될 존재이다. 결국 미국으로서는 당분간 정전협정 체제를 대체하는 평화협정을 지지할 처지가 못되는 것이다.

임동원 사무총장은 “북한이 미국의 고민을 모를 리 없다. 그런데도 계속 평화협정을 주장한다. 평화협정을 당장 체결하자는 것이라기보다는 미·북한 관계 개선이라는 1차 목표를 우선 관철하기 위해서이다”라고 말한다.

미국과 북한의 접촉은 끊이지 않고 있다. 지난해 12월 미군 헬기의 북한 불시착 사건이 터졌을 때 미·북한 간에는 군사접촉 채널(military liaison missions)이 가동되었다. 홀 준위 송환도 이 채널을 통해서 이루어졌다. 정전위 접촉이 없던 상황이었다. 미국은 정전위를 재가동하려고 애를 썼으나 결국 무산되고 편법이 동원되었다. 일부 전문가들은 이 군사접촉 채널을 평화협정과 군사정전협정의 중간 단계로 해석하기도 하지만, 관계 정상화를 위한 대화 통로의 하나일 뿐 평화협정 체결에 근접하는 단계로 보기는 힘들다는 지적도 많다.

평화협정 체결 여부에는 조약 체결에 따른 법적인 문제가 뒤따른다. 평화협정 체결 당사자는 누구인가, 91년에 작성된 남북합의서와는 어떤 관계가 있는가 하는 문제들이다. 남북한의 법적 지위에 관한 국제법을 연구한 金明基 교수(명지대·법학)는 남북한과 미국 사이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평화체제 전환 논의에서는 정치적 성격 못지 않게 법적인 문제가 중요한데, 당사자들이 이 점을 지나치고 있다고 주장한다.

정전협정의 유엔군측 서명자는 유엔군 사령관이다. 대한민국 대표는 단독으로는 물론 유엔군 사령관과 공동으로 협정에 서명한 바 없다. 더구나 대한민국 정부는 휴전협정 체결에 반대했기 때문에 협정 당사자도 아니다.

하지만 김교수는, 한국이 얼마든지 평화협정 체결의 당사자가 될 수 있다고 지적한다.

정전협정에는 ‘정치적 수준에서 평화적 해결을 위해 양쪽이 적당한 협정 규정으로 명확하게 교체할 때까지 계속 효력을 지닌다’는 효력 규정(부칙 62항)을 두고 있다. ‘정치적 수준’에서 ‘평화적 해결’을 꾀할 수 있다는 이 규정은, 군사 협정을 정치적인 차원에서 다룰 수 있음을 뜻한다. 즉 군사적 측면에서 한국이 당사자는 아니지만 정치적 측면에서는 법적 당사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김교수는 국제법 관행상 휴전조약 당사자와 평화조약 당사자가 언제나 일치하는 것은 아니라고 지적한다. 법률적으로는(‘휴전’과 ‘정전’이 다른 뜻이지만 여기에서는 구분하지 않기로 함) 특히 연합군을 편성하여 작전하는 경우 휴전조약 당사자와 평화조약 당사자는 각기 개별적으로 정해지며, 양쪽 당사자가 일치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일반적이다. 73년 1월 월남전의 휴전조약은 미국·월남공화국·월남민주공화국·월남임시혁명정부 간에 체결되었지만, 같은해 3월 파리에서 체결된 평화조약에서는 ‘월남에 관한 국제회의 의정서’에 12개국이 공동 선언 형식으로 서명하였다. 1·2차 세계대전과 중동전의 경우에서도 휴전조약과 평화조약의 주체가 다르다.

김교수는 평화협정의 정치적 성격을 강조하면서 54년 제네바 정치 회담을 한 예로 든다. “휴전협정 60항에 따르면 휴전협정은 순수하게 군사적 성질을 갖는다. 정치 문제 해결은 차후의 정치회담에서 해결하기로 미루었고, 이에 따라 54년 제네바 정치회담이 개최되었다”고 지적한다. 제네바 정치회담은 휴전협정 60항의 규정에 근거해 유엔 총회가 채택한 정치회담 개최 결의(53년 8월)에 따른 것이다.

54년 4월26일부터 6월15일까지 열린 제네바회담에는 한국도 참가했다. 유엔측에서는 남아연방을 제외한 15개 참전국과 공산측에서는 중공·북한·소련 대표가 참가했다. 한국도 참가한 이 제네바 정치회담은 한국도 한반도 정치 문제의 당사자라는 것을 실증해준 셈이다.

현재 경수로 보급을 주제로 한 미·북한 접촉에서 한국은 배제되어 있고, 미·북한 접촉의 최대 현안은 경수로 문제이다. 그리고 경수로 문제를 논의할 때마다 평화협정 문제가 늘 끼여든다. 한 전문가는 “미·북한 접촉은 정치·경제 등 모든 문제가 연관된 포괄적 협정이다. 경수로는 그중의 일부분일 뿐이다”라고 지적한다.

한국은 언제까지 입을 다물 것인가

북한은 에너지 부족에 시달리고 있다. 경수로의 완공 시점도 2003년께이다. 먼 훗날 얘기다. 에너지 부족 사태를 당장 해결하기에는 경수로보다 단기간에 화력발전소를 건설하는 것이 훨씬 효과적이다. 그럴 경우 화력발전소는 경수로에서 쟁점이 되고 있는 한국표준형인지 아닌지가 문제될 것이 없다. 북한의 경수로 협상이 미·북한 협상 통로를 유지하기 위한, 다분히 정치적인 게임이라는 분석이 나오는 것은 이런 배경 때문이다.

한 전문가는 경수로의 명칭은 사실 왈가왈부할 사안이 아닐 수 있다고 지적한다. 국제 관례에 따라 고리 1·2호처럼 지역명을 따다 붙이면 된다는 것이다. 한국의 기존 원자로를 미국 제조회사 이름으로 부르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라는 주장이다.

경수로·장성급 회담 등 미·북한간 접촉의 핵심은 평화협정 체제로 전환할 것인가 여부이고, 이는 곧 주한미군 철수 문제로, 한발짝 더 나아가 주일미군의 존재 여부로 이어진다. 미국이 북한과 손을 잡고 관계 개선을 원한다면 다른 것은 몰라도 북한을 무력으로 제재할 수 있다는 생각은 버려야 한다는 것이 북한의 일관된 주장이고, 이 주장은 주한미군 철수를 전제로 한 평화협정 체결 주장으로 이어진다.

반면 북한의 핵을 의심하고 있고, 자국의 국익을 염두에 둔 미국은 주한미군을 철수하게 될 평화협정을 꺼리고 있다. 정전협정은 유지하되(주한미군은 그대로 두되) 북한과는 관계 개선(수교)을 꾀할 수 있는 새로운 체제야말로 바로 미국이 원하는 것이다. 한국은 언제까지 입을 다물고 있을 것인가. 평화협정을 둘러싼 미·북한간 샅바싸움의 막간을 장식하는 조연자 역할에 머무를 수만은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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