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아일랜드에 총성은 그쳤지만…
  • 런던·韓准燁 편집위원 ()
  • 승인 1997.08.0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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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레어 영국 총리, IRA 휴전 선언 끌어내… 평화 정착·회담 성공 여부는 미지수
메이저 총리는 실패했다. 이번에는 블레어 총리의 차례이다. 그는 성공할 수 있을까?

북아일랜드 사태 해결을 집권 초기의 최우선 과제로 설정한 토니 블레어 영국 총리는 지난 5월 취임한 후 첫 방문지로 ‘저주받은 땅’ 북아일랜드의 수도 벨파스트를 선택했다. 그리고 그는 취임 2개월 만에 영국에 대한 폭력 투쟁 노선을 완강하게 지켜온 아일랜드 공화국군(IRA)으로부터 휴전 선언을 이끌어냈다. 이로써 그는 오는 9월15일 열리는 ‘북아일랜드 평화회담’의 마지막 승차권을 IRA의 정치 조직인 신페인당 손에 쥐어주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그것이 과연 평화회담의 성공을 보장하는 것일까? 낙관하기는 아직 이르다.

지난 3세기 동안 북아일랜드에서는 신·구 교도 간의 갈등과 정파끼리의 대립이 끊이지 않았다. 특히 68년의 유혈 사태는 영국군 주둔이라는 ‘치욕적 결과’를 초래했으며, 그후 29년 동안 계속된 유혈 보복 테러는 3천5백여 명의 사상자를 낳았다. 난마처럼 얽힌 종교 갈등과 정파 간의 이해 관계는 실마리를 찾지 못한 채 오늘에 이르렀다. 북아일랜드의 각 정파와 1백60만 신·구 교도 주민들이 7월20일자로 발효된 IRA의 휴전 선언에 냉소와 불신과 무관심을 보내는 데에는 이같은 역사 배경이 깔려 있다.

이번 IRA의 휴전 선언에 손뼉을 치며 즐거워할 사람은 어쩌면 당사자인 블레어 총리와 신페인당의 제리 애덤스 당수 두 사람뿐인지 모른다. 여기에 한 사람 덧붙인다면 미국의 클린턴 대통령을 꼽을 수 있다. 4천만명에 이르는 아일랜드계 미국인의 여론을 의식해야 할 그는 앞으로 영국과 아일랜드 공화국, 그리고 신페인당을 포함한 여러 정파와 협력해 북아일랜드에 평화가 정착하도록 노력하겠다고 다짐했다.

지난 한 달 동안 테러로 1백34명 사상

어찌됐든 IRA의 휴전 선언은 놀라운 사건이었다. 그 직전까지도 북아일랜드에서 유혈 사태가 멈출 줄 몰랐기 때문이다. 7월 초만 해도 신교도들이 구교도 지역을 통과하는 여름철 연례 행사인 ‘오렌지 행진’을 둘러싸고 몇 차례 충돌이 있었으며, 지난 한 달 동안 발생한 테러로 4명이 죽고 1백30명이 다쳤다.

게다가 IRA는 94년 8월31일 전격적으로 휴전을 선언한 뒤 아무런 예고 없이 약속을 깨뜨린 전력이 있다. 당시 휴전 선언은 큰 기대를 모았으나 경계가 느슨해진 틈을 타 IRA는 런던에서 폭탄 테러를 치밀하게 준비했다. 96년 2월 런던 동북부 신흥 상업 지역 도플랜드에서 대규모 폭탄 테러가 발생하자 살얼음판 같던 휴전 상태는 17개월 만에 깨지고 말았다. 그 사건 이후 두번째 휴전이 발효된 지난 7월20일까지 17개월 동안 무려 10여 차례의 폭탄·총격 테러가 이어졌다.
이러한 상황에서 IRA측은 왜 그들의 공식 노선인 무력 항쟁·폭탄 테러를 멈추고 2차 휴전이라는 올리브 잎사귀를 흔들었을까?

다른 무엇보다도 △무장 폭력 테러 중지(즉 휴전 선언)를 평화회담 참가의 선결 조건으로 내세우면서 △적절한 절차를 통해 점진적으로 무기를 양도하라고 요구한 토니 블레어의 노동당 정부의 유연하고도 일관된 정책이 IRA측의 강경 자세를 누그러뜨렸다고 볼 수 있다(과거 메이저 정부는 △폭력과 테러를 영원히 중지하겠다고 선언하는 것과 함께 △무장을 해제하고 은닉한 무기를 전부 인도하라는 까다로운 조건을 제시했었다). 블레어 내각의 북아일랜드 담당 모 모우란 장관은 지난 2개월 동안 IRA측을 협상 테이블에 끌어내기 위해 페인당과 비밀 협상을 벌여 왔다.

이 과정에서 블레어 총리는 메이저의 보수당 정부와 달리 의회내 절대 과반수 의석을 확보한 자신감을 바탕으로 과감한 정책을 펼쳤다. 그는 지난 5월 벨파스트를 방문했을 때, 평화 협상의 마지막 열차가 출발 신호를 울리고 있다면서 이번에도 탑승 시간을 놓친다면 영영 기회가 오지 않을 것이라고 강경한 어조로 경고했다.

신페인당 제리 애덤스 당수의 역할도 무시할 수 없다. 그는 지난 2년 동안 투쟁 노선을 둘러싸고 신페인당의 무장 군사 조직인 IRA 내 강경 세력과 불화를 빚어 왔지만 ‘이번이야말로 94년 휴전을 회복할 최적의 시기’라는 주장을 관철해 휴전 선언을 이끌어냈다. 덕분에 그는 영국 정부가 붙인 테러리스트라는 딱지를 떼고 합법적 정치 단체의 당수로서 공개적으로 정치 협상 무대에 설 수 있게 되었다.

오는 9월15일 벨파스트의 스토르몬트 성에서는 최초로 북아일랜드 평화회담이 열린다. 북아일랜드의 평화를 위한 협상 열차는 영국·에이레 정부 대표, 북아일랜드의 각 정파 대표 등 기존 승객 외에 신페인당이라는 새로운 예약 승객을 받아들임으로써 성원을 이루었다. 그러나 이 열차가 ‘무장 해제’와 ‘영구적 평화 정착’이라는 종착역에 닿기까지는 상당한 곡절을 겪을 것이 분명하다.

벌써부터 북아일랜드내 신교 무장 세력들과 친영국 강경 연방주의 정당들은 IRA의 휴전 선언이 일시적인 정치 책략에서 나온 것이라면서 신페인당에 평화회담 참가 길을 터준 블레어 정부를 비판하고 있다. 이들 신교 세력이 들고 나온 쟁점은 IRA의 무장 해제와 은닉 무기 완전 양도에 초점이 모아진다.
이와 관련해 북아일랜드의 최대 정당인 얼스터연방주의당(UUP)의 데이비드 트림블 당수는 지난 7월21일 △평화회담이 시작되기 전에 IRA의 무장 해제 시간표가 작성되어 상당량의 무기가 인도되어야 하고 △회담이 종료될 내년 5월까지 은닉 무기가 완전히 인도되어야 한다는 신교계 정파의 공통된 의견을 블레어 총리에게 전달했다.

또한 연방주의 세력 안에서도 과격하기로 소문난 민주연방주의당(DUP)의 아이언 페이슬리 당수는 “이번 IRA의 휴전 선언 소동과 거기에 놀아나서 신페인당 대표에게 평화회담 참가를 허용한 영국 정부의 조처는 지난날 평화를 모색하기 위해 관련 당사자들이 기울여온 값진 노력을 익사시킨 것이나 다름없으며, 우리는 IRA의 은닉 무기 양도에 관한 명확한 시간표가 정해지지 않는 한 앞으로의 평화회담에서 신페인당과는 결코 자리를 함께하지 않을 것이다”라며 회담 참가 거부 의사를 분명하게 밝혔다.

이같은 신교계·연방주의 정당의 비난과 반발은 휴전 발효 3일째인 7월23일 벨파스트 스토르몬트 성에서 열린 IRA의 무장 해제에 관한 영국·에이레 정부의 합의안 표결에서 연방주의 정당의 완전 반대로 이어졌다.

이에 따라 영국과 에이레 정부는 회담 개시일인 9월15일을 불과 두 달 앞두고 북아일랜드 내의 적대적인 두 세력과 접촉하면서 새로운 돌파구를 찾아야 할 어려운 지경에 빠졌다. 영국 정부는 앞으로 3~4주일 안에 연방주의 세력과 신교도 정당들의 거부감이 차츰 누그러질 것으로 보고, 그 안에 IRA를 비롯한 신·구교 양파의 행동대인 준군사 조직들에 대한 무장 해제와 은닉 무기 인도를 감시·전담할 국제위원단을 유엔 주관 아래 구성할 것으로 알려졌다. 위원장에는 캐나다 방위군 최고사령관을 지낸 존 드 차스텔레인 장군이 내정되어 있다.

언제 깨질지 모르는 ‘유리 방패’ 평화

9월15일부터 시작될 평화회담에서 북아일랜드 사태를 해결할 실마리를 찾으려는 블레어 총리는, 예정대로 회담이 순조롭게 진행되어 IRA를 포함한 신·구교 양파 무력 조직의 무장 해제가 완전히 이루어질 경우, 내년 5월 말 남북 에이레 주민을 상대로 북아일랜드의 미래를 결정하는 국민투표를 실시한다는 방안을 이미 에이레 정부측과 합의한 바 있다. 블레어 총리는 이처럼 낙관적인 전망을 갖고 신페인당을 협상 테이블에 초청하는 데 성공했지만 의외로 연방주의·신교 세력의 반발에 부딪혀 평화회담을 두 달 앞두고 정치적 고비를 만난 셈이 되었다. IRA가 휴전을 선언하고, 연방주의 세력의 최대 정당인 얼스터연방주의당 역시 협상 채널을 완전히 닫아 버리지 않았다는 점을 위안 삼을 수 있겠지만, 그것은 언제 깨질지 모를 ‘유리 방패’일 뿐이다. 북아일랜드의 평화를 위해 야심만만하게 첫발을 떼어놓은 블레어 총리는 벌써부터 녹록치 않은 정치 시험대에 오른 셈이다.

북아일랜드 평화 정착을 위해 런던·더블린·벨파스트·워싱턴을 넘나들며 진행될 4각 외교 협상의 추이를 지켜보는 것도 흥미진진한 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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