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더십이 없다" 일본에 위기감
  • 도쿄·蔡明錫 편집위원 ()
  • 승인 1995.06.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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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더십 공백에 사회 불안 겹쳐 “쇠퇴기 들어섰다” 위기감
도쿄 지하철역 구내에 사린 가스를 살포하여 무차별 테러 사건을 일으킨 혐의로 체포된 오움 진리교 교주 아사하라 쇼코는 태양적정국(太陽寂靜國)을 세워 일본을 지배하겠다는 야망을 품고 있었다.

이 교단이 작성한 헌법 초안에 따르면 아사하라는 천황을 갈음하여 신성 법황으로서 유일 절대 통치자가 된다. 또 군대를 창설하여 모든 국민에게 병역 의무를 부과하고, 오움 진리교 이외의 종교를 인정하지 않는다. 현재의 천황은 태양적정국이 건국되면 국외로 추방한다.

오움 진리교 최종 목표는 정부 전복

이같은 무장 쿠데타 계획을 실현하기 위해 이 교단은 사린 가스뿐 아니라 러시아제 AK47 자동소총을 비밀리에 제조하고 있었다. 또 세균무기·핵무기 제조 및 구입 방법을 면밀히 연구하고 있었다.

요가 교실을 모태로 출범한 종교 단체가 어떻게 해서 일본 정부를 전복하려는 전투 조직으로 변질되었는가. 여기에 대한 해답의 하나가 월간 <세카이> 6월호에 실린 정체 사회의 병리 현상에 관한 특집이다. 이 특집은 일본의 고도 성장이 멈추고 사회 전체가 정체 현상을 보이고 있는 데서 그같은 광신적 집단을 배출하는 토양이 마련되었다고 지적하고 있다.

5년 전 영국의 유력 시사 주간지 <이코노미스트>의 빌 에모트 편집국장은, 일본의 번영이 90년대 중반, 즉 올해부터 내리막길로 접어든다고 예고한 바 있다. 그는 <해는 또다시 진다>는 책에서, 일본의 번영은 이미 한낮을 지나 오후 2시를 가리키고 있다고 지적하고, 일본이 생산대국에서 소비대국으로, 젊은이의 나라에서 노인의 나라로 전락해 갈 것이라고 주장했다.

물론 이 책이 출판된 5년 전 ‘일본의 낙일’을 예언한 빌 에모트의 주장에 귀를 기울인 일본인은 거의 없었다. 예를 들어 우익 논객으로 잘 알려진 상지 대학의 와타나베 쇼이치(度部昇一) 교수는 <일본의 번영은 끄떡없다>는 책을 출판하고, 세계 최첨단을 걷고 있는 일본의 로봇 기술을 예로 들어 ‘일본이란 해는 절대로 지지 않는다’고 에모트의 지적을 일축했다.

그는 또 영국이 보수당과 노동당 양대 정당의 잦은 정권 교체 때문에 쇠락의 길로 접어들었다고 주장하면서 영국은 자민당 장기 정권을 본받으라는 충고도 잊지 않았다.

또 당시 <산리오>란 한 연구소는 일본의 GNP가 이대로 계속 증가한다면 21세기 초에 일본은 ‘대중 귀족화 사회’를 맞게 될 것이라고 예언했다. 즉 2000년 일본의 1인당 GNP가 세계 귀족 수준에 육박하게 되므로 일본인들은 의식주를 해결할 생산의 고통에서 해방돼 귀족처럼 인생을 즐길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로부터 5년 후 빌 에모트의 예언은 이상할 정도로 적중하고 있다. 우선 전후 고도 성장을 이끌어 온 자민당 장기 정권이 무너짐으로써 일본은 영국보다 더한 정치적 혼란을 거듭하고 있다. 영국처럼 양대 정당제가 정착하기는커녕 군소 정당이 난립하고 있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일본 평론가들에 따르면 오움 진리교가 신도수 만명, 교단 재산 천억엔의 종교법인으로 급성장하게 된 것은 80년대 후반의 거품 경제와 무관치 않다. 땅값이 천정 부지로 치솟아 신도들의 재산이 급격히 불어나자 교단은 출가 형식으로 이들의 재산을 끌어들이게 되었고, 이 재산을 바탕으로 무장 쿠데타 계획까지 세울 수 있었다는 지적이다.

거품 경제가 시든 지도 이미 5년. 그러나 일본 경제는 그 후유증으로 아직도 불황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최근의 급격한 엔고 때문에 불황 탈출은커녕 제조업의 공동화 현상, 즉 공장의 해외 이전을 가속시켜 일본의 국내 산업과 고용이 큰 위협을 받게 될 위기에 직면해 있다.
이처럼 경제 상황이 날로 악화함에 따라 경영자들의 모임인 일본경영자단체연맹이 최근 종신고용제를 간부 후보생에게만 적용하자는 제안을 내놓아 눈길을 끌고 있다. 이 단체의 <신시대의 일본적 경영>이라는 제언서에 따르면, 일본은 지금 경제성장 둔화, 엔고에 따른 기업의 해외 진출, 아시아 각국의 경제성장에 따라 고용 상태가 매우 유동적이다.

한신 대지진으로 일본의 기술 신화도 맥없이 무너졌다. 얼마 전 미국 정부가 발표한 국제 경쟁력 보고서에 따르면, 첨단기술 20가지 중 일본이 우세를 보이고 있는 기술은 한 종류도 없었다.

여기에 지하철 사린 사건, 경찰청 장관 저격 사건, 도쿄도 지사실 폭발 사건이 잇달아 일어남으로써 일본의 ‘안전 신화’도 이제는 옛 이야기가 되어 버렸다.

도쿄 근교에 사는 치과의사 야마우치 다케시(山內健)씨는 40 평생 일본을 떠나본 적이 없다. 일본처럼 안전한 나라가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철석같이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올 들어 대형 사건이 잇달아 터지자 그는 호주로 이주할 결심을 굳히고 있다. 일본이란 나라도 결국 모든 것이 풍족하고 안전한 ‘특수한 나라’가 아니라 ‘보통 나라’에 불과하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일본은 지금 어디로 흘러가고 있는가. <아사히 신문>이 발행하는 시사 주간지 <아에라>는 최근호에서 ‘일본은 쇠퇴중인가’라는 기사를 싣고, 일본의 괘종시계는 지금 ‘오후 4시’를 가리키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 주간지는 정치·경제 혼란에 사회 불안이 가중되어 일본인들은 지금 막연히 그런 생각을 갖고 있으며, 이런 혼란상은 에도(江戶) 중·후기와 너무 닮았다고 주장한다.

“제3의 개국 필요하다”

일본의 에도 시대 중·후기는 경지 개발이 안돼 인구 3천만명분의 식량밖에 생산할 수 없었던 정체기다. 이에 따라 농민들의 반란이 일어났고 쌀 소동이 끊이지 않았다.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당시의 시대 상황은 신흥 종교가 날뛸 토대를 제공했다.

이때 등장한 난세의 영웅이 도쿠가와 막부 8대 장군 도쿠가와 요시무네(德川吉宗)다. 요시무네는 ‘쿄호(享保)의 개혁’이라는 행정 개혁을 단행함과 동시에 서민들에게 꽃구경과 신체 단련을 권유해 침체된 사회 분위기를 일신했다.

요시무네의 일대기는 현재 NHK가 매주 일요일 밤 대하 드라마로 방영하고 있다. 최근 실시한 한 시청률 조사에 따르면 이 드라마는 7주 연속 선두를 달리고 있다. 시청자들이 요시무네와 같은 개혁자를 갈망하고 있기 때문에 인기가 급상승하고 있다는 것이 방송 평론가들의 일치된 견해다.

<아에라>를 발행하는 <아사히 신문>도 한신 대지진이나 지하철 사린 가스 사건이 일어나기 전인 작년 연말 ‘일본은 지금 오후 3시’라는 사설을 실어 큰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이 신문에 따르면, 94년의 일본은 리스트럭처링(사업구조 개편), 가격 파괴, 경제 공동화로 점철된 한 해였다. 이에 따라 일본은 소비자의 나라, 쾌락을 추구하는 연금생활자의 나라로 변질되어 가고 있는 중이다.

정치권도 일본 쇠퇴론에 점차 위기 의식을 느끼기 시작했다. 최근 자민당과 신진당 일부에서 대두하고 있는 ‘총리 직선제 개혁’ 주장도 바로 그런 위기 의식에서 나온 것이다. 그들은 정치적 지도력 부재가 일본의 혼란과 쇠퇴를 가중시키고 있다고 지적한다.

평론가 마쓰모토 겐이치(松本健一)씨는 일본에게 ‘제3의 개국’이 필요하다고 본다. 즉 메이지 유신과 패전 직후에 버금가는 일대 개혁만이 오후 4시를 가리키고 있는 일본의 괘종시계를 되돌려 놓을 수 있는 유일한 방편이라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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