확대되는 유고 내전
  • 朴在權 기자 ()
  • 승인 1995.05.1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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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전 끝내고 정부군·반군 다시 총격전…크로아티아도 세르비아계 지역 기습
지난 3년간‘인종 청소’와 대규모 약탈·파괴를 거듭해온 옛 유고 지역의 보스니아 내전이 크로아티아로 확대될 조짐을 보이고 있다.

지난 1일 보스니아 접경 지대에 주둔한 크로아티아 정부군이 세르비아계가 장악하고 있는 서부 슬라보니아 지역을 기습 점령했다. 이를 계기로 크로아티아 정부군과 세르비아 민병대 간에 무력 충돌이 확대되고 있다. 세르비아 민병대는 이에 대한 보복으로 크로아티아 수도 자그레브에 로켓포 공격을 퍼부었다. 이로 인해 자그레브의 민간인 6명이 사망하고, 2백여 명이 부상했다.

무력 충돌의 양쪽 당사자는 분쟁을 평화적으로 해결하겠다면서 휴전을 약속했다. 하지만 양측은 접경 지역에 탱크와 병력을 전진 배치했고, 유엔평화유지군이 차지하고 있는 평화지대에 군대를 배치했다. 이로써 한동안 불안한 휴전을 거듭해 오던 양측 간에 다시 내전의 위험이 고조되고 있다.

유엔 특사 “중재 실패했다”

이번 사태를 계기로 보스니아와 크로아티아 세르비아계 반군들이 연합 전선을 형성할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보스니아내 세르비아계 지도자 라도반 카라지치는 “크로아티아 정부군이 세르비아계에 대한 공격을 재개할 경우 개입하겠다”고 공언했다.

보스니아와 크로아티아 내전의 핵심 당사자인 세르비아계 민병대는 신유고연방과 연계하여 대(大) 세르비아주의 연방을 추구해 왔다. 보스니아내 세르비아계는 전체 인구의 32%밖에 되지 않지만 전체 영토의 70 %를 차지하고 있고, 크로아티아내 세르비아계는 전체 인구의 12%에 불과하지만 전체 영토의 3분의 1을 차지하고 있다. 특히 크로아티아내 세르비아계는 91년 12월에 크라이나공화국 건국을 공포했다.

그런데 이번의 무력 충돌에서 특징적인 것은 밀로셰비치 신유고연방 대통령이 크로아티아 공화국과 함께 세르비아계 반군을 비판하고 있다는 점이다. 크로아티아 정부군에 비해 군사적으로 열세인 세르비아계는 신유고연방의 지원을 받지 못함으로써 불리한 상황에 놓여 있다.

보스니아 역시 정부군과 세르비아계 반군 간에 전투가 재개되었다. 지난 1일 정오를 기해 4개월 시한부 휴전이 종료되자 수도 사라예보에서는 저격병 간에 다시 총격전이 벌어졌다. 보스니아에서도 보스니아 내전 중재를 맡은 아카시 야스시(明石康) 유엔 특사가 “휴전이 끝났다”고 말함으로써 자신의 중재 노력이 실패로 돌아갔음을 실토했다. 세르비아계는 유엔군 소속 영국군 부대에 포격하는 한편, 무기 보관소에 집결해 무기를 손질함으로써 본격적인 전투 준비에 들어갔다.

보스니아 내전이 시작된 것은 92년 4월26일이다. 이 날은 보스니아가 유고연방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한 날이기도 하다. 세르비아계는 회교계가 주도하는 보스니아가 총선을 거쳐 독립을 선언하자 신유고연방과 손잡고 수도인 사라예보를 공격했다. 신유고연방은 즉시 군대를 철수했지만, 보스니아의 세르비아계 반군은 민병대를 조직해 내전을 이끌며 전체 영토의 70% 이상을 차지했다. 이 과정에서 발생한 사상자가 20여만명, 난민이 2백70여만명이나 된다.

유엔과 서방 국가들은 ‘20세기 말 최악의 인종 대학살’로 불리는 보스니아 내전을 해결하기 위해 네 번이나 중재안을 제시했으나 뚜렷한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 첫 번째 제안은 93년 1월 사이러스 밴스 전 미국 국무장관과 데이비드 오웬 전 영국 외무장관을 공동의장으로 하는 옛 유고 평화국제회의가 제시한 안이다. ‘밴스·오웬 평화안’으로 불리는 이 안의 골자는, 보스니아를 10개 자치구로 분할한다는 것이다. 세르비아계와 회교계가 각각 3개 지역, 크로아티아계가 2개 지역을 지배하고, 나머지 2개 지역은 세르비아계·회교계·크로아티아계가 공동으로 관할한다는 것이다.

이 안은 세르비아계의 반대로 무산됐다. 이미 보스니아 영토의 70%를 점령하고 있던 세르비아계는 이미 확보한 전략 요충지 대부분을 포기하라는 이 안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두 번째 제안은 93년 7∼8월에 오웬과 유럽공동체 특사인 토르발트 슈톨텐베르크가 작성한 안이다. 이들은 보스니아를 셋으로 분할해 지배하는 연방제 정부 형태를 제시했다. 이 안에 따르면 세르비아계는 영토의 52%, 회교계는 31%, 크로아티아계는 17%를 각각 차지하게 된다.
밴스·오웬안을 거부했던 세르비아계는 이 제안을 군말없이 받아들였다. 영토 분할의 기득권을 인정받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불리한 크로아티아계는 보스니아 중부 지역을 더 할애해 달라고 요구했고, 회교계는 더 많은 영토와 아드리아 해에 대한 접근권, 회교계 밀집 지역인 고라제와 제파 등 고립 지역에 대한 연결로를 확보해 달라고 요구했다. 회교계의 이같은 요구는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결국 이 제안도 무산되고 말았다.

세 번째 안은 93년 말에 유럽연합이 제시한 것이다. 세르비아계의 영토 일부를 회교계에 넘겨주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안은 세르비아계가 반대했다.

마지막은 지난해 5월 미·영·독·불·러 5개국이 내놓은 안이다. 처음으로 러시아가 가담해 작성한 이 안은 보스니아 영토를 회교계·크로아티아계 연합이 51%, 세르비아계가 49%를 각각 차지하는 것이다. 그러나 세르비아계가 강력하게 거부하는 바람에 또다시 무산됐다.

그러자 5대국과 유엔은 세르비아계에 대해 공습과 금수 위협을 가했다. 그러나 상황은 오히려 악화해 세르비아계는 보스니아에서 활동하던 유엔 평화유지군을 인질로 잡고 저항했다. 위기로 치닫던 양측 간의 관계는 막판에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이 중재에 나섬으로써 해결의 실마리를 찾았다. 세르비아계는 4개월 간의 휴전에 들어간다고 합의했다. 그러나 서방측이 제시한 중재안을 받아들인 것은 아니었다.

배타적 민족주의의 산물

네 차례나 제시됐던 중재안이 별 실효를 거둘 수 없었던 근본 원인은, 인종 갈등과 함께 영토 분할에 따른 커다란 이견을 해소할 수 없었기 때문으로 지적된다. 이들은 조금이라도 자기 측에 불리하면 제안을 거부했다. 강대국들은 군사적·경제적으로 압력을 가했지만, 이같은 압력은 언제나 미봉책으로 끝나고 말았다.

미국·영국·프랑스 등 강대국이 보스니아 내전에 적극 개입하는 것을 꺼리는 것도 분쟁 해결을 지연시키는 원인으로 지적된다. 프랑스와 영국은 보스니아 내전에 가장 많은 병력을 파병하고 있지만, 중립적인 입장을 강조함으로써 사태 해결에 적극적인 도움을 주지 못하고 있다. 전세계 분쟁 지역에 군대를 파견해 온 미국은 제2의 베트남전을 우려해 선뜻 개입하지 못하고 있다. 보스니아 영토의 70%가 산악 지대라는 점과, 세르비아계 민병대가 게릴라전에 능하다는 사실이 미국을 주저하게 만든다. 평화유지군의 활동도 자연히 소극적일 수밖에 없다. 현재 유고 내전에는 유엔 평화유지군 2만5천명이 배치돼 있는데, 각국은 내전이 또다시 전면전으로 확대될 조짐을 보이자 철수를 서두르고 있다. 특히 가장 많은 병력(4천5백명)을 파병하고 있는 프랑스는, 4월 중순 자국 병사 2명이 희생당하자 휴전이 연장되지 않으면 철수하겠다고 공식 발표했다. 3천5백명을 파병한 영국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최근 들어 확대 조짐을 보이고 있는 보스니아와 크로아티아 내전은, 현재 확보한 영토를 그대로 인정 받으려는 세르비아계 반군과 이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정부군 간의 충돌로 요약된다. 여기에 세르비아계가 저지른 인종 청소와 대규모 약탈·파괴의 후유증이 겹쳐 있다.

보스니아와 크로아티아 내전이 단기간에 종식될 가능성은 희박해 보인다. ‘대화는 멀고 주먹이 가까운’발칸 반도의 비극은 배타적 민족주의가 낳은 비극을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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