反美 불끄러 나선 '지한파' 대사
  • 卞昌燮 기자 ()
  • 승인 1995.10.1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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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철 사건/미국측 “잘못 보도돼 오해”, 한국측 “주둔국 질서 무시”
47~48년에 미국 육군 방첩요원으로 한국에서 근무했고 한때 국내 대학에서 교편을 잡기도 한 제임스 레이니 주한 미국대사는 역대 대사 중에서 한국을 꽤 이해하는 편이다. 바로 이 ‘지한파’ 대사가 근래 주한미군의 범죄와 관련한 한국 언론의 보도 태도를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듯한 견해를 한·미 양국의 주요 언론에 밝혀 서울 외교가에서 관심을 끌고 있다.

그는 8월24일자 <뉴욕 타임스>에 실린 한 기사에서 ‘문제는 미군 병사들이 범죄를 많이 저지르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무책임한 한국 언론이 범죄 사건을 대단히 섬뜩하게(in a particularly lurid way) 묘사하는 데 있다’고 주장해 국내에 미묘한 파문을 일으켰다. 니콜라스 크리스토프 도쿄 특파원이 서울발로 쓴 이 기사는, 지난 5월19일 서울 지하철 충무로역에서 발생한 주한미군 병사와 한국인 간의 ‘폭행 사건’을 집중적으로 다루었다. 따라서 레이니 대사가 지적한 대목은 아마도 이 문제에 대한 한국 언론의 보도 태도를 겨냥한 것 같다.

실제로 서울의 미국 외교관들은 ‘지하철 사건’에 관한 한국 언론의 보도가 처음부터 잘못됐고, 그 때문에 돌이킬 수 없는 오해가 빚어졌다고 보고 있다. 한 고위 관리는“한국 언론이 처음부터 지하철 사건을 공정하게 보도했더라면 사태가 이렇게까지 확대되지 않았을 것이며, 양국의 안보 유대에도 영향을 주지 않았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행정협정 개정이 근본 치유책

미국측이 문제삼는 것은 폭행 사건의 발단이 된 한국 여인 성희롱 부분에 대한 한국 언론의 최초 보도다. 미국측은 성희롱을 당했다는 문제의 한국 여인이 실은 미군 병사의 아내였는데도 한국 언론은 최초 보도에서 이 병사가 처음 보는 한국 여인을 성희롱한 것처럼 묘사했다는 것이다. 최초 보도가 나간 뒤 미8군사령부 공보실이 국방부 기자들에게 해명 차원의 브리핑을 했지만 기사에 거의 반영되지 않았다고 한다. 주한 미국대사관 공보실 관계자들도 사태의 진실을 알리기 위해 주요 언론의 관계자들을 만났으나 정작 지면에는 반영되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따라서 레이니 대사가 <뉴욕 타임스>에서 주장한 대목은 미국측이 그동안 한국 언론에 대해 느껴온 ‘좌절감’을 표출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는 특히 지하철 사건 이후 반미 감정의 수위가 갈수록 높아지자 얼마전 한 연회에서 청와대 인사를 만나, 이런 사태가 한·미 유대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점을 주지시킨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뉴욕 타임스> 보도가 나간 직후 일련의 사태가 양국 언론의 감정 싸움으로까지 번졌다. 국내 언론은 앞서 인용한 레이니 대사의 발언을 집중 부각해 가뜩이나 지하철 사건에 곱지 못한 시각을 갖고 있는 많은 한국민들을 분노하게 만들었다. 미국 언론은 한술 더 떴다. 레이니 대사의 말을 인용 보도한 <뉴욕 타임스>의 크리스토프 기자는 한국을‘지독히 민족주의적인 나라(intensely nationalist country)’라고 표현해, 마치 주한미군의 범죄에 대한 한국민과 언론의 대응이 순전히 민족적 정서에서 나온 것처럼 보도했다. 또 <워싱턴 포스트>는 8월31일자 잭 앤더슨 칼럼을 통해 지하철 사건에 대한 한국 언론의 보도 태도를 비난했다.

이처럼 사태가 엉뚱한 방향으로 전개되자 레이니 대사는 9월2일자 <동아일보>에 기고한 글에서 자신의 <뉴욕 타임스> 발언 내용이 한국 언론에 대한 도전이 아니며, 주한미군 범죄에 관한 진실이 한국 언론에 누락됨으로써 결과적으로 부정적인 반미 여론이 조장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음을 지적하기 위한 것이라고 해명했다.

지하철 폭행 사건으로 표출된 일련의 사태는 한·미 양국 국민에게 모두 경각심을 불러일으킬 만하다. 한 중견 미국 외교관은 “어찌 보면 지하철 폭행 사건은 한·미 안보의 중요한 사안들에 비하면 지극히 미미한 촌극이다. 이 사건이 확대돼 양국 관계에 손상을 주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고 지적했다.

최초 보도에서 일부 사실을 누락해 보도한 한국 언론도 이번 사태에 일정 부분 책임을 느낄 만하다. 그러나 한국민과 한국 언론의 반응을 단순히 ‘감정적인 처사’로만 보는 미국측 태도에도 문제는 있다. 주한미군의 범죄는 기본적으로 주둔국의 법과 질서를 무시한 데서 발생한, 감정 이전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근원적으로는 현재 불평등 조항 문제로 개정 논의가 활발한 주한미군의 주둔 지위에 관한 한미행정협정(SOFA) 협의가 하루빨리 마무리돼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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