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6 주체 백태하 대령의 최초 증언(상) “강영훈씨는 5·16 지지했다”
  • 구술 정리·趙瑢俊 기자 ()
  • 승인 1995.06.1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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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16일 새벽, 쿠데타 성패 좌우한 ‘육본 회의실 사건’의 진실
역사에 대해 증언하기는 매우 어려운 일이다. 12·12와 5·18에 대한 공소 시효가 얼마 남지 않은 상태에서 全斗煥·盧泰愚 두 당사자나 崔圭夏 전 대통령이 입을 다물고 있는 것처럼, 역사의 정확한 실체를 밝혀내는 일은 참으로 어렵다. 이미 군사 쿠데타로 정리된 5·16 또한 발생한 지 34년이 넘었고, 그동안 설왕설래가 많았지만 전모가 완벽하게 밝혀진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 사건 당사자들이 아직 이 땅에 생존해 있기 때문이다.

<시사저널>은 5·16 당시 육군 6군단 포병 대대장으로 육군본부를 제일 먼저 접수했고, 그후 중앙정보부 서울지부장을 지냈던 白泰夏 전 대령(70)의 증언을 2회에 걸쳐 공개한다. 현재 미국에 거주하는 백태하씨는 그동안 모든 언론과의 인터뷰를 거절해 오다가 ‘역사에 참회하는 마음’으로 <시사저널>에 최초로 증언했다.

이 증언에서는 5·16, 그중에서도 아직 논란을 빚고 있는 5월16일 새벽 육군본부 회의실에서 벌어졌던 일의 정확한 진상이 공개된다. 백씨는 중앙정보부 서울지부장 시절 겪었던 굵직한 사건들과 金炯旭 전 중앙정보부장에 대해서도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백씨는 5·16을‘12·12와 5·18의 원죄’로 규정하고, “군이 다시 정치에 간섭해서는 안된다”고 말했다. <편집자>


최근 李錫濟씨(전 총무처장관·감사원장)가 5·16을 합리화하고 미화하는 책 <각하! 우리 혁명합시다>(서적포)를 펴낸 것에 대하여, 한때 같은 혁명 주체 세력이었고 동지였던 내가 그의 글에 반론을 제기하는 처지가 되었다. 나는 그와 동지가 아닌 적이 될 각오로 감히 그에게 도전하기로 결심했다.

 
나는 평소에 이석제씨를 지극히 존경해 왔다. 그는 군인이면서도 차분한 성격과 남달리 해박한 지식을 지녔고, 맡은 일에 열중하는 한편 성격도 원만했다. 그는 나와 같은 육군 중령이면서도 지식과 태도가 훌륭하여 朴正熙씨의 측근으로 신임을 받고, 박씨가 서거하는 날까지 변치 않고 충성한 몇 안되는 훌륭한 분이었다.

그러한 그가 오늘의 시대를 정확히 읽지 못하고 있다. 그는 군사 혁명의 잘못을 고백하는 성의를 보여야 하는데도, 그 자신이 군사 혁명의 창시자인 양, 李鍾贊·박정희 장군을 포섭하여 혁명을 달성시킨 주역을 맡았다는 식으로 자기를 과장했다. 그간에 국민이 겪은 고초와 난국의 원인이 우리들로 인한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박대통령의 경제발전 업적을 내세워 혁명을 미화하고 국민을 기만하려는 불순한 행위에 대해 나는 참기 어려운 심정이 되었다.

그는 애국심이 남달리 강하여 일찍이 혼자서 혁명을 준비하였다니, 그가 쓴 책대로라면 우리의 불운은 박정희가 아니라 이석제였음을 알게 되었다. 현세에서 그에게 한풀이할 기회가 생긴 것이 다행이다. 아니면 죽어서까지 다른 사람을 원망했을 것이 아닌가. 나는 그의 책을 읽고 한참 고민했다. 혁명의 중요 대목마다 자기가 위기를 극복하는 중대한 결정을 했다는 자기 과장은 용서하더라도, 어찌 이러한 시대착오적인 생각을 하고 있을까 하고 안타깝기까지 했다.

이석제씨는 혁명 직후부터 국가재건최고회의에서 최고위원과 법사분과위원장을 지냈기 때문에 그가 겪은 일 중에는 내가 모르는 것도 있을 터이니, 그의 책 내용 전체를 비판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의 글에서 그대로 두면 역사가 잘못 기록될 수도 있는 대목이 있다. 그러한 오류를 지적하고자 한다. 단적으로 말하자면 5월16일 아침 육군본부에서 벌어진 사건에 대해 그는 정확하게 기술하지 않았고, 정직하게 쓰지도 않았다.

백태하 중령, 육군본부 무혈 점령


혁명 당시 나는 전방 제6군단의 포병 대대장에 불과했다. 그런 내가 군사 혁명에 가담한 것은 실로 우연한 일이었다.

61년 5월15일 오전 10시. 文在駿 대령이 지휘하는 제6군단 포병사령부(경기도 연천 부근 소재)에서 지휘관회의가 소집되었다. 6개 대대장 중에서 5명이 참석했다. 이 자리에서 문대령은 아주 평온한 태도로 “내일 한국에서 군사 혁명이 있는데, 귀관들은 나와 같이 혁명에 참가하겠는가?”라고 물었다. 아무도 반론을 제기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것이 당시 군의 일반적 분위기였다. 그리고 단결을 자랑하는 포병의 전통이었다.

그러나 나는 마음 한구석에 불안한 마음이 생겨 혁명 지휘관이 누구인가를 확인하고 싶었다. 문대령은 張都暎 육군참모총장이라고 말했다. 그 말을 듣자 안심이 되었고, 문대령을 따라 죽음의 장소로 출동하기로 결심했다.

내가 지휘하는 포병 대대는 5월16일 오전 3시에 서울의 육군본부를 무혈 점령했다. 그렇지만 내 마음은 착잡하기 그지없었다. 처자를 버리고 반란군으로 변신한 것이다. 울고 싶기도 하고 미칠 것 같기도 했다. 무슨 고약한 운명 때문에 내가 반란군이 되었는가. 혁명에 실패하면 나는 총살형을 받아야 한다. 그런데도 나는 처자를 배신하고 여기까지 왔다!

사실 우리 부대가 육본을 점령하기까지는 혁명이라는 말이 싱거울 정도로 손쉬웠다. 부대가 서울로 진입할 때까지 우리는 단 한번도 저지 당하지 않았다. 대규모 병력이 이동하는데도 저지는커녕 검문도 없었으니 당시 치안이 얼마나 허술했는지 알 수 있다. 그러나 광화문 근처를 지나면서는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계획대로라면 우리 부대가 광화문을 지나갈 시각에는 이미 해병대와 공수단이 그곳을 점령하고 있어야만 했다. 그러나 그곳에는 쥐 한 마리 얼씬거리지 않았다. 나는 혁명이 실패한 것이 아닌가 걱정이 되어, 부대를 더욱 독려해 육본으로 진입했다.

우리가 육본을 점령하기 전에 정부의 요소요소를 점령하고 있어야 할 공수부대와 해병여단이 한강교에서 육군 헌병에게 저지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들의 서울 진군은 한 시간 이상이나 늦은 것이다. 작전 명령대로 서울에 진입한 부대는 전방에서 출동한 제6군단 포병 5개 대대 병력뿐이었다.

사실 혁명은 그 때 실패할 수도 있었다. 우리 부대가 한강교의 헌병부대를 뒤에서 치지 않았더라면 공수부대와 해병의 서울 진입은 실패했을 것이고, 혁명 또한 좌절되었을 것이다. 박정희 장군도 한강교에서 저지 당해 넘어오지 못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육본 지휘부는 혁명에 가담한 부대가 한강에서 저지된 해병과 공수단, 그리고 전투력이 대단치 않은 30사단·31사단 병력뿐인 것으로 알고 있었다. 때문에 헌병이 한강에서 저지한다면 반란군 진압이 가능하다고 판단하고 있었는데, 상상도 하지 못했던 우리 부대가 전방에서 동원되었으니 장총장과 박장군의 게임은 이로써 판결이 났고, 그들의 운명이 여기서 다른 길을 가게 된 것으로 생각한다

오전 10시께 부대 지휘관들은 육본 대회의실에 집합하라는 명령에 따라 나는 회의장 말석에 자리했다. 가운데 상석에는 박정희 장군과 이주일 장군이 앉았고, 동편에는 육본 참모 장성들이, 서쪽에는 혁명 지휘부 요원과 출동 부대 지휘관들이 마주앉게 되었다. 이제부터 전개되는 상황은 이석제씨의 설명과 큰 차이가 있다.

잠시 뒤에 장도영 총장이 입장했으나 자리에 앉지도 않고 회의 참석자들을 날카롭게 바라보면서 노기 띤 표정으로 발언하기 시작했다. 도저히 잊혀지지 않는 기억을 더듬어 그의 발언을 종합하면 다음과 같다.

 
“나는 군사 혁명이 무엇인지 모릅니다. 나는 군사 혁명의 필요성을 인정할 수 없습니다. 때문에 나는 군사 혁명에 반대합니다. 여러분이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으로 부대를 출동시켰으나, 정부에 대해 충분한 경고가 된 것으로 알고 부대를 철수하면 여러분의 행위를 불문에 부칠 터이니 이제부터 육군본부의 참모부와 출동 부대장이 철군을 협의하여 나에게 보고하시오. 나는 어젯밤부터 한잠도 자지 못했으니 잠시 총장실에서 잠을 좀 자야겠소.”

장총장은 이 말을 마치자마자 회의장을 나가려 했다. 나는 이 때 비로소 혁명 지휘관이 장총장이 아니고 박장군이라는 사실과, 문대령이 우리를 속인 사실을 알게 되었다. 마주앉은 참모 장성들이 이제까지와는 다르게 목에 힘을 주고 우리를 냉소하는 듯 내려다 보았다. 한편 반대편에 앉은 혁명군은 이와는 대조적으로 어깨를 떨구고 불안한 표정으로 한숨을 쉬는 사람도 여럿 있었다.

권총 뽑아들고 ‘장총장의 탈출’ 막아


나는 박정희 장군이 원망스러웠다. 혁명 계획 자체가 불만이었다. 어쨌든 나는 순간적으로 장총장이 나가 버리면 모든 것이 끝장이라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그런데도 혁명 지휘부의 상관과 상급자들이 겁에 질렸는지 아무도 나서지 않는 것이 또한 불만이었다. 불과 10여 초 사이에 나는 머리를 정리했다. 그리고 장총장을 잡아야 한다고 결심했다.

말석에 앉았던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리고 빠른 걸음으로 총장에게 다가서면서 “총장님, 못나가십니다. 서세요!”라고 고함을 질렀다. 주위를 둘러보니 모두 깜짝 놀라고 있었다.“총장님, 군사 혁명이 무엇인지 정말 모르십니까?” 나는 속사포를 쏘듯 두서 없는 말을 시작했다. 깜짝 놀란 장총장은 머뭇거리면서 “이게 누구야…” 하는 말뿐이었다. 나는 문득 허리에 차고 있는 권총에 생각이 미쳤다. 45구경 권총을 품고 있는 권총 지갑은 어느 사이엔가 뚜껑이 열려져 있었고, 어젯밤 부대를 출발할 당시에 장전한 실탄이 그대로 있었다. ‘나는 여기서 이 사람과 함께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죽게 되는 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나는 계속 말했다. “혁명이 무엇인지 모른다면 소인이 설명하겠습니다. 먼저 아실 것이 군사 혁명에 출동한 우리는 군의 위계 질서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저 자리로 가서 앉으십시오! 군사 혁명에 대해 설명을 하고 토론을 하셔야 합니다.” 총장은 자리에 앉지 않았다. 그렇다고 회의실을 나갈 용기도 없는 듯했다. 나는 선 채로 국내 정세, 장병들의 동향, 혁명의 필요성과 불가피성 등에 대해 내가 아는 대로 떠들었다. 장총장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하고 난처한 표정이었다. 나는 무례하고 못된 짓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어쩔 수 없었다. 내친 김에 결판을 내야 했다. 아무도 나서지 않는 가운데 약 3분간 말없이 일촉즉발의 대립이 계속되었다.

행동의 자유를 잃은 3성 장군의 위용은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고, 그를 잡고 있는 내 꼴도 보기 좋은 모양은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박정희 장군이 자리에서 일어나 다가왔다. 박장군은 미소를 지으면서 “백중령, 말이 조금 지나쳤소. 총장이 그 뜻을 아셨으니 다시 생각하실 시간을 드립시다. 총장님 나가셔서 쉬십시오”라고 말했다.

박장군과 나의 만남은 꽤 오래된 편이었다. 52년 강원도 양구 근방의 포병 진지에서 처음 만났을 때 그는 과묵한 제2군단 포병사령관이었다. 그리고 54년 박장군이 광주의 육군포병학교 교장 시절에 나는 포병의 꽃인 포병학교 포술학 과장, 화포학 과장을 지냈다. 그런 인연을 가진 박장군이 내게 물러설 수 있는 명분을 찾아준 것이었다. 그런데 이 부분에 대한 이석제씨의 묘사를 발췌해 보면 다음과 같다.

‘그 때 육군본부 외곽을 포위하고 있던 6군단 포병단 병력의 일부가 상황실을 완전히 봉쇄했다. 이 부대는 과단성과 용맹성으로 이름을 떨친 백태하 중령이 지휘하는 대대였기 때문에 대단한 과격파인 그들이 어떤 행동을 저지를지 우리들도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이번에는 성격이 괄괄하기로 소문난 6군단 포병단의 백태하 중령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우리는 죽음을 각오하고 총칼 들고 나온 혁명군입니다. 생명을 걸고라도 목적을 달성할 것입니다. 장군들께서 혁명에 동조하지 않으면 신상에 상당한 어려움이 발생하리란 점을 각오하셔야 합니다. 혁명 지도자 박정희 장군께서 무혈을 원하기 때문에 참고 있는 거요!” 백중령의 발언은 ‘수틀리면 죽인다’는 협박이나 다름없었다. 분위기가 차츰 살벌해져 갈 즈음에 침묵을 지키던 박정희 장군이 일어섰다.’

‘“당신들 허튼 수작 부렸다가는 즉석에서 체포하겠어.” 흥분한 백태하 중령의 발언에 심기가 상한 장총장은 찬바람을 일으키며 자신의 집무실로 퇴장했다.’

먼저 책을 쓴 金炯旭씨도, 이번에 책을 펴낸 이석제씨도 모두 나의 행동을 과격한 무뢰한의 짓으로 표현하고 있을 뿐 아니라, 그들은 흥분한 백태하를 자기가 나서서 원만히 수습했다고 거짓말을 하고 있다. 당시에 나는 그들이 누군지도 몰랐으며, 그들은 한 발짝도 내게 접근하지 못했다. 柳原植 대령이 나섰다는 말도 거짓말이다.

박장군의 중재로 일촉즉발의 위기를 모면하기는 했으나, 장총장으로부터 혁명을 지지한다는 답변을 듣지 못한 채 상황이 끝난 것이 나는 아쉬웠고 분통했다. 나는 다시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회의장을 빠져나왔다. 태도가 모호한 장총장을 감시하는 사람이 있는지 걱정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만큼 혁명 지휘부의 행동에는 신뢰성이 없었다.

총장실로 향하는데 때마침 장총장이 수행원을 대동하고 나오고 있었다. “어디로 가십니까” 하고 물었는데 장총장은 대답도 하지 않고 현관 앞에 대기한 지프에 올라탔다. 나는 아차 했다. 한발만 늦었어도 그를 놓칠 뻔했던 것이다. 나는 더 큰 위기를 느꼈고 흥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총장은 약속을 어기고 외출하려 하지 않는가. 차가 떠나려는 순간 나는 권총을 빼들고 공포를 3발 쏘았다. 그리고 연병장에 대기하던 부하들을 소집하여 본관 건물을 포위하고 총장의 외출을 막았다. 잠시 후에 보니 차는 그 자리에 있는데 총장이 보이지 않았다. 그는 황급히 도망쳐 총장실로 숨어 버렸던 것이다.

그로부터 다시 30분쯤 뒤에 회의가 재개되었다. 그동안 나는 과격해질 수 있는 부하들을 추스르느라 바빴고, 박장군은 그 나름대로 총장실에 들어가 마지막 설득 작업에 나섰다. 사람이 다 모이자 장총장은 육사 교장인 강영훈 중장, 신응균 예비역 중장, 합참의장 김종오 중장 등을 대동하고 들어왔다. 자리에 앉은 지 5분 이상이 지났는데 아무도 발언하지 않았다. 이윽고 육군에서 명성이 높은 강영훈 장군이 일어섰다.

이 때 연설한 강중장의 발언이 혁명 기록에는 빠져 있다. 그의 연설은 군의 위기를 극복한 명연설로 육군사에 남아야 할 연설이라고 믿는다. 그런데 책을 펴낸 사람들은 실수인지 고의인지 그 연설을 빠뜨렸다. 강영훈 장군의 연설은 간단 명료했다.

강영훈 “총장님도 혁명을 지지하십시오”

“나는 오늘 새벽 연속되는 총성을 듣고 전쟁이 일어난 줄 알았습니다. 사관학교와 각처에 연락해 보니 적의 움직임은 없다고 했습니다. 한참 뒤에야 군사 혁명이라고 보고 받았습니다. 동시에 나는 올 것이 왔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나도 고위 장성으로 혁명의 대상이며, 내 어깨에 달린 3성 계급장을 떼이고 형무소에 수감될 것을 연상했습니다. 여러분, 나는 그렇게 될지라도 혁명을 지지합니다. 존경하는 총장께서도 시국의 중대성을 감안하셔서 혁명을 지지하시고, 시국을 수습하십시오.”

강장군의 연설은 차라리 훈계라고 해야 옳았다. 짧은 내용이지만 엄숙했다. 일동이 그에게 열렬히 박수를 보냈다. 긴장은 이 때부터 풀어지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후 강장군은 혁명에 반대하여 그의 예언대로 형무소에 수감되었으니 이해하기 어렵다. 지금 그 분은 혁명을 반대한 용장으로 존경을 받는다. 혁명에 반대했다고 해야 그 분의 처지가 좋아질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위기 수습에 기여한 혁명 지지가 그 분의 소신이었다고 생각되어 감히 여기서 공개하는 바이다.

 
강장군이 발언한 효과는 즉시 나타났다. 이번에는 장총장이 발언했다. 그의 입은 무거웠다. 마음이 내켜서 하는 말은 아닌 것 같았다. “여러분의 말씀을 감사히 들었습니다. 그러나 지금부터 두 시간의 여유를 주시면 내 결심을 말씀 드리겠습니다.” 공은 다시 장총장에게 넘어갔다. 그의 결심 여하에 따라 우리의 운명도 정해지는 것이었다. 그로부터 두 시간 뒤 장총장으로부터 ‘본인은 여러분의 뜻에 따라 지금부터 혁명위원회 위원장 직을 수락합니다’라는 성명이 나왔다. 군사 행동은 이로써 끝난 것이다.

5·16 군사 혁명이 있은 지 34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동안 나는 참회하는 사람이었다. 내가 글을 쓸 기회가 있다면 ‘반역자의 참회록’이라는 제목으로 쓰기로 마음 먹고 있었다. 그리고 그 기회를 이석제씨가 준 것이다. 이석제씨에게 감사드린다. 나는 군사 혁명에 참가했던 사람이지만 혁명을 예찬한다면 두 번 죄를 짓는다고 생각한다. 경제 발전에 기여했다고 보아주면 고맙게 생각할 따름이지 자랑할 일은 아니라고 믿는다. 5·16을 합리화하고 자랑한다면, 다시는 이 땅에서 군인이 정치에 나서면 안된다는 국민적 합의를 모르거나 저버리는 사람이다.

나는 이 지면을 통해 이석제씨에게 다음과 같은 공개 편지를 보내고 싶다.

‘이석제 형님. 우리들이 군사 혁명으로 국운을 바로잡고 경제 발전에 기여한 것 같지만 결코 혁명을 합리화하고 공을 자랑하지 말아야 합니다. 당신의 애국 충정을 존경해 왔습니다. 우리의 나머지 인생도 오래지 않습니다. 죽기 전에 참회해야 합니다. 군인이 정치를 하면 나라가 망한다는 말이 옳습니다. 다만 나라의 운이 좋아서 망하지 않았을 뿐입니다.’

나는 김종필씨에게도 하고 싶은 말이 있다. 김종필씨는 ‘과거는 현재의 어머니’라고 말했는데, 5공과 6공의 어머니는 5·16이란 것이다. 12·12도 5·18도 과거의 어머니 잘못이다.

(다음 호에서는 백태하씨와 김형욱씨의 중앙정보부 시절, 미국에서의 일 등에 대한 비화가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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